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서문리 최선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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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501회 작성일 2018-03-12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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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선권 (남, 80세, 양양읍 서문리)
■ 면담일 : 2015.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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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에 탄 쌀로 밥을 하면 냄새가 나서 먹기가 힘들었다.


6 ․ 25한국전쟁 당시 16세이었고 양양중학교 2학년생이었다. 우리 가족은 작은집 식구 7명과 우리 5식구가 함께 피란을 나갔다. 강릉 사천까지 나갔는데 먹을 것이 없어 촌으로 밥을 얻으러 다니고 작은 아버지는 불이 난 창고에서 탄 쌀을 구해다 밥을 해 먹는데 탄 냄새가 독하여 먹기 힘들었다. 그리고 마을에 다니며 군인들이 소를 잡아먹고 남긴 소가죽을 불로 털을 그슬린 다음 솥에 삶아먹는데 어찌나 질긴지 오래도록 씹어야 했다.
그렇게 여러 식구가 고달픈 피란살이를 하며 밥은 고사하고 감자까지 얻어먹어가며 연명을 하다가 더 이상 먹을 양식을 구하지 못해 이왕 배를 곯을 바에 고향 집에 가서 밥이나 실컷 먹고 죽자고 우리식구만 집으로 돌아오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 작은 아버지도“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고 작은집도 같이 고향으로 들어왔다. 그때 우리 집 뒤에 해마다 감이 많이 달리던 나무는 한쪽 가지가 썩었지만 그 감을 따서 곶감을 만들어 제사에 쓰기도하였던 그 감나무가 아직도 있다.



◆ 캄캄한 밤의 피란길에는 소꼬리를 잡고 따라 들어왔다.


1 ․ 4후퇴 시 우리 가족은 쌀과 살림살이를 감나무 밑에 묻어놓고 쌀 두말을 지고 손양 고개를 넘는데 양양읍 시내가 온통 불바다였다. 우리는 집이 타는 것을 돌아다보며 피란길을 재촉하여 강릉쯤 가다보니 눈이 많이 내려 오금 팍 만큼 쌓였는데 가다가 눈 속에서 무언가 걸려서 넘어지면 그것은 죽은 군인들과 민간인들의 시체였으며, 죽은 시체를 치우지 않고 길가에 즐비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그렇게 피란을 나가서 생활을 하다 보니 먹고사는 것이 어려워지자 작은 아버지가 나를 보고 남의 집에 일꾼으로 가서 살라고 하니 그 말을 들은 어머니가“나는 죽어도 집에 가서 가족과 같이 밥 먹고 살다 죽겠다.”라고 하셨다.
그때 숙부가 황소를 끌고 피란을 나왔는데 강릉 피란길에서 길이 어두워 앞이 보이지 않자 소꼬리를 잡고 소를 따라 들어왔다.



◆ 토굴에서 4가족 20여 명이 살았다.


피란 갔다 돌아오니 양양 읍내의 모든 집은 탔는데 4집만 남아있었다.
우리는 타지 않은 군행리 최동근씨 집에서 살면서 낮이면 뒤에 굴을 파고 4가족 20여 명이 굴속에서 살았다.
그래도 집을 지어야 하기에 17세 되던 해에 집을 지었는데 집은 타도 온돌이 남아있어 엄마와 흙을 반죽하여 벽을 쌓고 지붕을 덮고 바닥은 가마니를 깔았는데 들어갈 때는 기어들어갔고 들어가서도 허리를 펼 수 없는 움막집을 짓고 살았는데도 그때는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