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물치리 문동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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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120회 작성일 2018-02-22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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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동재 (남, 84세, 강현면 물치리)
■ 면담일 : 2015.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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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도 지급받지 못한 체 안동까지 따라갔다가 도망을 쳤다.


나의 출생지는 강현면 정암1리 이며, 어려서는 양양읍 서문리 99번지에서 생활을 하며 자랐다. 1950년 6·25전쟁 때 고급중학교 2학년이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8월 25일 신체검사도 없이 인민군에 끌려갔다.

훈련도 없었고, 총 쏘는 연습도 없었으며, 수류탄 투척도 배우지 않았다. 총도 지급받지 못하고 인민군 바지만 입고 집에서 입고 간 흰색 상의만 입고 도보로 안동까지 따라갔다.
총을 가진 인민군은 중대장급만 권총을 차고 있었다. 먼 길을 걷다보니 신발도 떨어져 발이 몹시 아팠고 식사는 하루에 주먹밥 한 덩어리가 전부였다. 배가 고프니 밭에 들어가 무를 뽑아먹고 산에서 머루 다래 같은 열매를 따 먹었다.
낮에는 비행기 폭격이 심해 숲속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걸었다. 안동 부근까지 갔을 때 선발대가 폭격으로 해산되다 시피 와해되고 말았다. 나는 마침 이것이 기회라고 생각하고는 도망쳐 산속으로 들어섰다.



◆ 무정장군이 이끄는 인민군 패잔병이 우리 뒤를 따라오다.


안동 인근에서부터는 큰길을 마다하고 주로 산길을 따라 산봉우리와 영을 넘어 백담사까지 와서 어떤 영(마등령으로 추정)을 넘어 신흥사까지 오니 땀이 나고 너무 더워 냇가에서 목욕을 하는데 국군이 나타났다.
“야! 손들어!”하고 국군이 총을 겨누고 나를 불렀다. 나는 옷도 벗었으니 대항할 것도 없이 국군에게 잡혀 막사까지 왔다.
“너, 무얼 했어!”하여 나는 학교에 다니다 잡혀 안동까지 갔다가 도망쳐 설악산까지 온 경위를 말했다. 특히 형이 월남하여 8연대 누구라고 하니 군번을 대 보라했다. 마침 나는 그전에 형에게서 온 편지에 군번이 적혀있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고, 큰형은 강릉에서 경찰로 근무하고 있다고 애기하니 국군이 확인하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주먹밥을 주어서 먹으니 마음속으로 며칠 만에 먹어보는 밥이더냐 고 생각하면서 밥을 다 먹고 나니 살 것 같았다. 안동에서부터 그렇게 갖은 고생을 하면서 국군에게 잡힌 날이 1950년 10월 9일이었다.
그 후 나는 인민군 따라 다니는 것보다 훨씬 마음도 편하고 먹는 것도 좋았다. 국군을 따라 북쪽으로 들어가 원산에 도착했는데, 우리 뒤에서는 국군에게 쫓기는 북한 무정장군이 이끄는 패잔병들이 뒤쫓아 온다고 했다.
그때 어떤 포로들은 도망가다가 총에 맞아 죽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신원도 확실한 것 같고 고분고분하고 말도 잘 듣고 하니 손도 묶지않고 잘 대해주었다.



◆ 반공포로와 공산포로 간의 싸움에서 방망이로 때려죽이는 일이 있었다.


국군을 따라 다니고 얼마 후 나는 원산에서 LST군함에 태워졌다. 며칠만에 도착한 곳은 거제도 포로 수용소였다. 옷을 벗기고 가슴에 PW(전쟁포로)라는 글씨가 박혀 있는 옷을 입혀주었다. 수용소 생활은 무서웠다.
반공포로와 공산포로 들로 나뉘어 서로 싸우고 방망이로 때려죽이는 일도 있었다.
나는 어떤 편에도 들지 않고 조용히 지내다가 우리는 그 안에서 반공청년단을 결성하여 가입하였다. 규약도 목표도 정하고 여단장, 연대장, 대대장, 중대장을 정하는 조직을 가지고 활동하였다.
후에 나는 광주포로수용소로 이전되어 포로 중에 글을 모르는 나보다 어린 사람들에게 국어, 수학을 가르쳤고, 외부에서는 민주주의나 기타 지식을 가르치는 인사가 와서 가르쳤다. 우리 반공 포로들은 미군들도 잘 봐주었다.



◆ 반공포로 출신들은 주문진을 넘지 못하게 막았다.


1953년 6월 16일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 석방을 실시했다. 저녁에 한국 헌병이 와서 새벽에 철조망을 넘으라고 일러 주었다. 그리고 나가면 어떻게 하라고 당시 원용덕 헌병사령관이 알려주었다. 우리는 옷에 포로를 표시한 모든 글자를 휘발유로 지우고 새벽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3m 높이의 철조망을 순서대로 올라가 아래로 뛰어 내렸다.

그리고 뛰어 광주 옆 영광군 불갑면에 3명이 같이 아무 집으로 들어갔다.
주인은 고생했다며 밥을 주었다. 며칠을 숨어 지내다 기차로 주문진에 왔다.
그러나 반공포로는 주문진을 넘지 못하게 했다. 마침 형님이 주문진 지서에 근무하고 있으면서 형님 집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조카를 가르치며 한 달을 지냈다. 얼마 후 형님의 주선으로 버스를 타고 38°선을 넘어 4년 만에 양양 집에 오니 다행히 부모님들은 살아계셨다.
한 달 가량 집에 있다가 한국군에 입대하여 제주도에서 훈련을 받고 9383443군번을 받았다. 제3보충대로 와서 1군사령부 감찰참모부 검열과 소령 정기택과 함께 근무하게 되었다.
정소령은 부대 검열을 다니면서 시인서를 받아다가 나에게 주면 검열 검사보고서를 차트로 작성 1군사령관 백선엽 장군에게 보고하였다. 당시 차트 펜이 없어서 붓으로 차트를 썼다. 하사로 근무하다가 제대하여 경찰전문학교에 입교하여 경찰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