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30호

- 10월 : 조선시대 양양부사 유자한의 상소문으로 본 강원도민의 生活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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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109회 작성일 2019-01-16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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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한부사(柳自漢府史)의생애(生涯)


본관은 진주(晉州). 유광보(柳光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의(柳依), 아버지는 참판 유양식(柳陽植)이다. 세조 6년(1460) 평양별시문과(平壤別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464년 경기도경차관(京畿道敬差官)과 조정의 여러 요직을 거친 후 1486년 양양부사로 재임 시 환곡(還穀)에 따른 폐단을 상소하여 백성들의 구휼에 힘썼다.
유자한 부사는 생육신(生六臣)의 한사람인 매월당김시습(梅月堂金時習)과 같은 마을에서 태어난 죽마고우
로 양양부사로 재임 시 친필 서한을 주고받을 정도로 서로 가깝게 지내던 인물이다.



백성의사곡(私穀)을관부(官府)에간직하여낭비막기를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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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조실록 성종 17년


성종 17년(1486) 12월 14일 4번째 기사에 유자한 부사가 양양에 부임이후 임금에게 상소하기를 “신이 무능한 자질로써 외람되게 한 고을의 수령(守令)이 되었는데, 가뭄이 들어 백성이 굶주려 죽을 것을 근심하여 어리석은 힘을 다하여 흉년을 구제하는 일을 받들어 행하되, 위로는 전하의 부지런하고 근심하시는 마음에 부응(副應)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생민(生民)의 바라는 바를 위로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먼저 준비한 계책이 있었던 바, 감히 좁은 소견으
로써 굽어 살피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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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조실록 성종 18년


“국가에서는 조종(祖宗) 이래로 부터 의창(義倉)·군자창(軍資倉)·상평창(常平倉)을 두어서 흉년에 대비하는 법이 있으나 공사(公私)의 저축이 모두 적어서 창름[倉●곡식 저장창고]의 이름만 있고 명년 봄에 종자와 양식의 수요
를 일체 관대(官貸)에 의존하는 것이 상습(常習)이 되었으니 만일 적병의 경보(警報)나 수년의 재해[災]가 있으면 나라에서 어떻게 대응하겠습니까? 신은 그윽이 한심스러워합니다.”<..........중략>
유자한 부사는 중국의 목민심감(牧民心鑑)을 예로 들면서까지 호소하였다. 그러나 당시 일부 대신들은“백성의 사곡(私穀)을 거두어서 관부(官府)에 간직하여 백성이 낭비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백성에게 유리할듯하나, 곡식을 내고들일 때에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것이 반드시 많을 것이니, 결단코 행할 수 없다.”라는 등의 중론을 모았다.
그러나 영의정(領議政) 정창손(鄭昌孫)은“이 법이 편리하여 유익할 듯합니다. 청컨대 우선 한 고을만 시험하여 그 편부(便否)를 시험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으며, 우의정(右議政) 이극배(李克培) 또한“이 계책은 옛사람이 시행하여 효과가 있었던 것이기는 하나, 고금의 형편이 달라서 시행하는 데 그 적당한 길을 얻지 못하면 마침내 백성의 해가 될 것입니다. 유자한(柳自漢)으로 하여금 백성이 원하는가를 묻게 하여 우선 양양(襄陽) 한 고을만 시험하여 편부(便否)를 보도록 하소서.”
하자 임금께서는 우의정 이극배의 의논에 따름으로서 유자한 양양부사의 상소가 관철되었었음을 의미하므로 후세(後世)에 전하는바가 매우 크다고 본다.



백성의식량난해소를위해강무(講武) 연기를상서하다.


다음해인 성종 18년(1487) 9월 11일 2번째로 강원도민의 식량난 해소를 위해 상소하였다.
“강원도(江原道)는 다른 도와 달라서 서쪽으로는 대령(大嶺)에 의거하고 동쪽으로는 창해(滄海)에서 그쳤으며, 영서(嶺西)는 서리와 눈이 많고 영동(嶺東)은 바람과 비가 많은데다가 땅에 돌이 많아서 곡식이 번성하지 못하여, 풍년이라 하더라도 백성들이 오히려 지축[(旨蓄):겨울에 먹을 것으로 저장하는 시래기 따위] 과 감자나 밤으로 이어가고서야 겨우 한 해를 넘길 수 있으므로, 민간에서 도토리 수십 석(石)을 저장한 자를 부잣집이라 합니다.”
“농부를 먹이는 것은 도토리가 아니면 충족할 길이 없고, 백성이 도토리를 줍는 것은 다만 9월에서 10월 사이일 뿐인데, 강무(講武)로 인한 순행[巡幸: 임금이 나라 안을 두루 살피며 돌아다니던 일] 으로 백성들이 참여하지 않을 수 없으니, 어느 겨를에 도토리를 주워서 내년의 생계를 꾸리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강무(講武)는 우선 10월 보름 이후가 되기를 기다리고, 그래도 그 편의한 때를 얻지 못하거든 내년 봄에 행하는 사냥 때를 기다리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라 하였는데 임금께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이상과 의정부(議政府)와 병조(兵曹)의 의견을 듣도록 명하여 의견을 들었으나 대신들이 강무연기를 반대하였다.
반대이유는“강원도의 백성이 도토리와 밤을 식량으로 삼는 것은 참으로 유자한(柳自漢)이 아뢴 것과 같으나, 해마다 흉년이 들어 오래 강무(講武)를 폐지하였는데 올해에는 곡식이 조금 잘 되었고, 기한을 정하여 군사를 징발해서 꼴을 베고 행궁(行宮)을 영선(營繕)하는 일을 이미 하였으니, 밤을 줍는 데에 방해될 것이 없을 듯합니다.”<..........중략>
“강무는 나라의 큰일이고, 군사를 징발하는 기일이 임박하였으므로, 앞당기거나 물릴 수 없겠습니다. 봄에는 바로 농사철에 해당하므로, 더욱이 거행할 수 없겠습니다.”하니, 임금께서 전교(傳敎)하기를, “유자한의 말은 채용할 수 없다.”라 하였다.
유자한 양양부사는 2회에 걸쳐 상소문을 올려 백성들의 고충(苦衷)을 덜어주려 애를 썼지만 끝내 관철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의 강원도민의 찌든 생활상의 단면을 가늠해 볼 수 있는 향토사료 로서 가치가 높다고 본다.
이밖에 성종 18년(1487) 9월 19일 첫 번째 기사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노공유(盧公裕)가 아뢰기를 “강원도의 백성은 오로지 도토리ㆍ밤으로 생계를 유지하는데, 만약 강무(講武) 때문에 그것을 주울 때를 한번 놓치게 한다면 민생(民生)이 염려스럽습니다. 요즈음 유자한(柳自漢)의 상서(上書)에도 이것을 언급하였으니, 강무를 멈출 수 없다면 일수(日數)를 줄이소서.”하니, 임금께서 전교하기를 강무는 이미 대신들과 의논하여 정하였으니 들어주지 않았으며, 성종 18년(1487) 9월 20일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유인종(柳麟種)이 아뢰기를“양양 부사(襄陽府使) 유자한(柳自漢)이 본도(本道)에 흉년이 들었다 하여 강무(講武)를 멈출 것을 청하였는데, 신의 생각에도 강무는 중대한 일이므로 폐지할 수는 없겠으나, 일수(日數)가 너무 많으니 적당히 줄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하니 전교하기를 “강무는 큰일이니, 한 사람의 말에 따라 쉽사리 앞당기거나 물릴 수 없다. 하였다.
이처럼 사헌부와 사간원의 간관(諫官)들까지 유자한 부사와 같은 뜻으로 주청(奏請)을 올린 사례가 있어 시사(時事)하는바가 크다.
강무(講武) → 조선 시대에, 임금이 신하와 백성들을 모아 일정한 곳에서 함께 사냥하며 무예를 닦던 행사.
서울에서는 사계절의 끝 무렵에, 지방에서는 봄ㆍ가을 두 계절에 이루어졌는데, 수렵하여 잡은 동물로 종묘사직과 지방 사직에 제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