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30호

- 9월 : 양양 성황제는 국행성황제(國行城隍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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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183회 작성일 2019-01-16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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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황사 전경



성황제의유래


■ 성황제는 서낭제라고도 불리며 그 유래를 고문헌을 상고하면 5세기경 후한서(後漢書) 반표열전(班彪列傳)에 기록이 있다.
■ 우리나라에는 고려 성종 15년(996년)에 성황당 기록이 고려사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 고려 고종23년(1236년) 성황신에는 지역에따라 작호(爵號)[國師·大皇·將軍·護國伯…]가 덧붙여졌었으나, 공민왕17년(1370년) 각 지역의 주(州)·부(府)·현(縣)의 성황은 ○○주·부·현성황지신(某州·府·縣城隍之神)이라 고치도록 했다. [예: 양주성황지신(襄州城隍之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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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작례


조선건국 후 성황제는 유교예제의 적용을 받게된다.


■ 태조 1년(1392년)의 사전(祀典)에 여러 주군(州郡)의 성황(城隍)은 나라의 제소(祭所)이니, 다만 ○○주(州), ○○군(郡) 성황(城隍)의 신(神)이라 일컫고, 위판(位板)을 설치하여, 각기 그 고을 수령(守令)에게 매양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제물(祭物)·제기(祭器)·작헌(酌獻)의 예(禮)는 한결같이 조정(朝廷)의 예제(禮制)에 의거하도록 하였다.
■ 태종 13년(1413) 사전 개정안에 각관(各官)의 성황지신(城隍之神) 작호를 혁거(革去)하고, 단지 ○○주(州)의 성황지신이라 하며 성황사 안에는 주신(主神) 1위(位)만을 남겨 두고 상설(像設)은 모두 다 철거(撤去)하라고 명시했다.
■ 세종실록『오례의(五禮儀)』와 성종 5년(1474년)에 완성한『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전거하여 성황제를 행한다.
이에 양양성황사의 제례는 국행성황제에 전거하여 신위판은‘양양성황지신(襄陽城隍之神)’이라야 하며 성황사 안에는 신위만을 모시고 일체의 상설(像設)은 모두 철거하여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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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조실록태조실록



양양성황사는언제어디에설치되었을까?


고려 목종(穆宗) 10년(1007년)에 양양에 성을 쌓았는데 348칸이고 문(門)은 4개이다. 이 성은 양양의 현산 산등성에 쌓았으며 성안이 읍지가 되니, 성안 제일 높은 곳인 지금의 성황사 자리가 당초의 성황사 터였으리라 믿어진다.




오늘에이르러왜? 성황사제례에대하여논해야되는가?


이는 우리 양양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바로 잡고 고려시대이래 관주도의 고유전통 문화를 계승시키면서 오늘날 최첨단 과학문명과 접목시켜 약진양양의 건설과 군민의 대동화합을 꾀하여야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일제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말살시키려는 정책에 의하여 동해신묘와 같이 훼철시켰다.
다행히 6·25한국전행 후 우리 양양이 자유대한의 품에 안겨 종교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으나, 일제에 강점당하면서부터 50년간 까맣게 잊혀졌던 양양의 성황제에 대하여, 복구당시 관에서 무관심한 틈을 타, 무속에 의해서 주민 주도의 민간성황제로 변형 오늘에 이르렀으므로 이제 바로 잡아야할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 때문에 양양성황사의 성황제는 국가제사이므로 국행성황제(國行城隍祭)로 환원되어야 한다.


■ 고려 말 안향(安珦)이 상주판관(尙州判官)이 되어 무녀에게 곤장을 치고 칼을 씌워 옥중에 가두어 놓자, 도리어 무녀들은 용서를 구하였고,
■ 양양 조산리 강릉최씨의 중시조 최정립(崔挺立)선생이 1599년 사천리 웅이동에 있었다는 요신(妖神)의 사당인 도적음사(道積淫祠)를 헐어버림으로써 미신의 허구를 일깨운 위인이 있었으며 이후 주민은 안녕을 기할 수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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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례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