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30호

- 沙林寺와禪林院의연관성考察 / 향토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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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822회 작성일 2019-01-17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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沙林寺와 禪林院의 연관성 考察
<襄陽禪林院址를 중심으로>


양양문화원 부설 향토사연구소



[요약]



사림사(선림원)는 양양군 서면 황이리 미천골(米川谷)에 있었던 사찰로 절터만이 남아있는데 지금은 선림원지라 부르며 강원도기념물 53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에는 선림원지 삼층석탑, 선림원지 석등, 홍각선사탑비, 선림원지 부도 등의 중요 국보급 문화재들이 분포하고 있다.
지난 1948년 이 절터에서 출토된 신라범종(新羅梵鐘)의 내부 명문(銘文)중에는 해당 사찰 명이 아닌 약칭(略稱)으로‘당사(當寺)’즉 이 절로 표기하였다. 이에 따라 혼란스러운 것은 사림사(선림원)지를 2차에 걸쳐 발굴조사를 실시한 동국대학교 문명대 교수는 억성사라 하고 그 외 학자마다 억성사(億聖寺)·사림사(沙林寺)·선림원(禪林院)이라 주장을 함으로써 하나의 사찰 이름이 셋으로 나뉘어 부르고 있다.
지금의 선림원지는 명칭 상 문제의 소지가 많이 남아 있음에도 선림원지(禪林院址)로 고착되어 가고 있는 현실에 대해 필자는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사찰 명칭에 대해서도 중국 당나라 때에는 사(寺)와 원(院)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으나, 그 이후에는 즉 사(寺)는 사찰 전체를 가리키는 어휘로, 원(院)은 사찰 속에 있는 특정한 기능의 별사(別舍)를 지칭할 때 많이 사용하였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이를 받아 들여 사용한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선림원지(禪林院址)는 해인사를 창건한 순응법사(順應法師)가 창업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 절터에서 신라시대의 범종이 출토되면서 주조연대가 애장왕 5년(804)으로 밝혀져 절도 이때에 창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범종의 명문(銘文)에는‘당사(當寺)’라고 표기 되어 이 절은 선림원(禪林院)이 아니라 사(寺)이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또한 명문(銘文) 중에“이 절의 옛 종 쇠 이백 이십정을 밑천으로 삼음이라 한 것은 순응법사가 이곳의 범종을 주조하기 전에 이미 절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 한다고 볼 수 있다. 사찰의 이름에 관한 문헌(文獻)은 여지도서, 양주읍지, 관동지 등 다수 지리지에 수록되어 있고, 양양부사를 지낸 명암 이해조(李海朝)는 1709년 재임 시 남긴 현산삼십경(峴山三十景) 시제(詩題)에“사림사(沙林寺)”라 하였다. 조선시대 대사헌을 지낸바 있는 홍경모의 관암전서에는“신라 설악산 선림원 홍각선사비는 옛날 양양의 사림사에 있었다.”고 기록함으로써‘선림원’과‘사림사’두 절이 신라 하대에 이곳에 공존하였음을 알 수 있다.
만해 한용운이 지은「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乾鳳寺及乾鳳寺末寺事蹟)」에는 신흥사·백담사·영혈사 등 사찰을 중수하거나 이전 복원 한 경우 기존의 사찰명칭과는 무관하게 개명한 것으로 기록 되였는데 이는 불교계의 불문율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홍각선사가 함통 말년(870)에 이곳 억성사로 다시 들어와 머물면서 퇴락한 절의 금당(金堂)과 향사(香)를 대대적으로 중창한 후 기존의 억성사(億聖寺)를 사림사(沙林寺)로 개칭하고, 그 사찰 내에 있는 특정기능의 별사(別舍,승방지)를 선림원(禪林院)으로 명명(命名) 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Ⅰ. 문제의 제기


천년고찰 선림원지는 신라대의 선찰(禪刹)이었던바 언제인지는 모르나 폐허가 된지 오래이며 현재 그 구기(舊基)만이 강원도 양양군 서면 황이리 미천골(米川谷)에 남아있으며 양양군청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28km되는 산간지역1)으로 강원도기념물 제53호(1982.11.3.)로 지정되었다. 이곳에는 선림원지 삼층석탑(보물 제444호), 선림원지 석등(보물 제445호), 홍각선사탑비(보물 제446호), 선림원지 부도(보물 447호) 등의 중요 국보급 문화재들이 다수 분포하고 있다.2)
지난 1948년 이곳에서 출토된 신라범종(新羅梵鐘)의 내부 명문(銘文)중에는 해당 사찰 고유명사가 아닌 약칭(略稱)으로“당사(當寺)”즉 이 절(그 절)로 표기하였다.3)
이에 따라 혼란스러운 것은 선림원지를 2차에 걸쳐 발굴조사를 실시한 동국대학교 문명대 교수는 절의 명칭을 억성사(億聖寺)라 추정하고, 학술논문지에는 학자마다 사림사(沙林寺) 또는 선림원(禪林院)으로 칭하고 있어 한 곳의 절 이름이 셋으로 나뉘어 불리고 있는데 이와 같은 사례는 전국에서도 흔치 않다고 본다.(그림1) 반면『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선림원은 미천골에 있었던 절로 사림사(沙林寺)라 했다.
이와 같이 선림원지는 명칭 상 문제의 소지가 많음에도 작금의 상황은 선림원지(禪林院址)로 고착되어 가고 있는 현실에 대해 필자는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절의 명칭을 찾아내는 길만이 해결책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사(寺)와 원(院)에 대해 그 어원(語源)을 살펴보았다. 중국“당나라 때에는‘사(寺)’와‘원(院)’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를 산동반도의 적산촌(赤山村)에 있었던 신라인의 사찰‘법화원(法華院)’4)에서 쉽게 찾아볼 수가 있다. 우리나라도 이와 같은 영향을 받은 선림원(禪林院), 문수원(文殊院) 등의 사찰이 있다. 그러나 당나라 이후에는‘사(寺)’를 ‘원(院)’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하게 되었다. 즉, ‘사(寺)’는 사찰 전체를 가리키는 어휘로, ‘원(院)’은 사찰 내에 있는 특정한 기능의 별사(別舍)를 지칭할 때 많이 사용하였다.”5)고 했다.
유홍준의「나의문화유산답사기」를 보면“선림원은 804년 순응법사가 창건한 절이다. 순응(順應)은 당나라 유학승 출신으로 가야산에서 초당을 짓고 수도하던 중 애장왕 왕비의 등창을 고쳐주어 왕의 하사금으로 해인사를 세운 스님이다. 해인사를 802년에 세운 순응이 2년 후에 선림원을 세우고 다시 수도처로 삼은 것이다.”6)라 했다. 이러한 연대추정은 오랫동안 밝혀지지 않고 있었으나 이 절터에서 신라시대의 범종이 출토되면서 이 범종의 주조연대가 신라 애장왕 5년(804)으로 밝혀져 절도 이때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발굴된 동종의 명문(銘文)을 보면“貞元卄年甲申三月卄三日當寺鍾成內之古尸山郡仁近大乃末紫草里施賜乎古鍾金二百八十廷當寺古鍾金二百卄廷此以本爲內十方旦越勸爲成內在之...(정원이년갑신삼월이십삼일‘당사’ 종성내지고시산군인근대내말자초리시사호고종금이백팔십정당사고종금이백이십정차이본위내십방단월권위성내재지...)”7)라고 양각(陽刻)되어 있다.
범종에‘당사(當寺)’라고 표기 하였듯이 이 절의 명칭이 선림원 이라면 마땅히 당원(當院)이라 기록되어야 함에도 당사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 절의 건립연대도“당사의 옛 종에 시납을 받아 다시 주조하였다”고 하고 있어 정원 20년(804) 이전에 절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사찰의 이름에 대해서도 역사적으로 공존한다. 명암 이해조(鳴巖李海朝)는 1709년 양양부사 재임시절에 남긴 현산삼십경(峴山三十景)의 시제(詩題)에“사림사(沙林寺)’라 했고, 조선시대 대사헌을 지낸 홍경모(1774~1851)의 관암전서(冠巖全書)책 23에‘신라 설악산 선림원 홍각선사비는 옛날 양양의 사림사(沙林寺)에 있었다.”고 기록함으로써 사림사와 선림원이라는 명칭이 역사적으로 확실하게 등장한다. 그러나 선림원지를 2차에 걸쳐 발굴조사를 실시한 동국대학교 문명대 교수는 현재 발굴한 선림원지는 억성사 였다고 주장한다.
본 연구는 한곳의 사찰 경내에서 절 명칭이 억성사·사림사·선림원 등 셋으로 나뉘어 전해오고 있으며 최근에‘선림원지 (禪林院址)’로 고착되어 가고 있음에 대해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어 고문헌을 바탕으로 옳은 절 명칭을 밝혀 혼란을 불식시키고자 함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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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서면 선림원지 위치도




Ⅱ. 선림원지의 역사적 개관


1. 선림원지의 발굴조사 결과


선림원지 1차 발굴조사는 1985년 7월 23일부터 8월 14일까지, 2차 발굴조사는 다음해인 1986년 8월 2일부터 8월 25일까지 실시되었다. 3차 발굴조사는 2015년 7월 27일부터 2016년 11월 20일까지 양양 선림원지(약 9,096㎡)에 대해 (재단법인)한빛문화재연구원에서 정밀발굴조사를 실시하고 약보고서(略報告書)를 양양군청에 제출했다.(그림 2) 1~2차 발굴조사는 동국대학교 문명대(文明大)교수가 단장으로 실시하였으며, 1차 발굴조사 시는 금당지와 조사당지를, 2차 조사에서는 조사당지와 종각지, 추정 승방지를 발굴하고 금당지를 정리하였다. 3차 발굴조사는 한빛문화재연구원에서 2015년부터 발굴조사로 조사당지, 금당지, 승방지, 종각지 등의 유구가 3, 금동여래입상, 금동풍탁, 용면와, 막새기와, 와당, 금동장식, 철정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8)
1~2차 발굴조사결과 보고서에 의하면, 선림원은 804년경에 창건되었고, 전형적인 1탑식 산지가람(山地伽藍)으로 현재 발굴된 대부분의 기와는 9세기 후반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모두 동일한 양식의 기와들이므로 이 때 일시에 중창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시대 이후의 유물이나 유구, 기타 출토품이 전혀 없으므로 900년을 전후한 시기에 대홍수로 인한 산사태로 금당(金堂)과 조사당(祖師堂)이 함께 매몰되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는데 그 세부내용은 다음과 같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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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선림원지 유구분포도(출처:한빛문화재연구원)


1) 금당지 : 정면 3칸, 측면 4칸으로 산사태로 일시에 무너졌기 때문에 모든 주처가 완전히 남아있고, 또한 암막새, 수막새, 귀면와, 곱새와, 평와 등이 그대로 완존(完存)하므로 건물을 그대로 복원될 수 있는 초유의 중대한 자료이다. 특히 산간사원의 가람배치와 금당의 위치를 규명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이다.
2) 비각과 조사당 : 금당의 서북편인 일단의 높은 대지의 중심부에 석등을 전면에 안치한 조사당이 정면 2칸, 측면 2칸의 정방형으로 배치되어 있고, 조사당의 동편에 홍각선사의 부도로 추정되는 부도대석이 서편에는 비각이 안치되어 있다.
3) 1차 출토유물 : 금은동불입상(金銀銅佛立像), 금동풍탁(金銅風鐸), 귀면와(鬼面瓦), 막새기와, 곱새기와, 비편 등이 1차 발굴조사에서 발견되었다.
4) 종각지 : 금당의 동남쪽에 종각지로 추정되는 작은 규모의 건물지가 노출되었다.
5) 승방지 : 미천골로 들어오는 입구가 되는 곳에서 2개의 건물지를 확인하였다.
6) 2차 출토유물 : 기와[瓦當], 금동손잡이 장식, 쇠부싯 돌, 토기편, 철 못 등이 발견되었다.
7) 3차 발굴조사 : 기존 건물지들 외에 추정 승방지, 부속 건물지 2동 등의 유구와 금동불, 청동정병, 풍탁, 와당 등 다수의 유물이 출토되었다.(그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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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승방지 출토 금동불상 (출처:한빛문화재연구원)


금당지는 서편에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한 막초석 건물지가 1동, 동편에는 방형으로 치석한 초석을 사용한 건물지 1동으로 총 2동의 건물지가 중복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조사당은 조사하기 전정면 3칸, 측면 2칸의 초석 외에 기존건물지의 기단부, 계단시설과 건물지 양쪽에 추가로 정면, 측면 각 1칸의 초석이 배열된 것이 확인되었고, 조사당 뒤편으로 기존에 만들어져 있는 축대 외에도 양쪽으로 조사당을 두르고 있는 축대가 5m가량 추가로 확인되었다.
추정 승방지는 남서길이 29.2m, 북동길이 25m, 너비 13m 내외로 기단부 내부에서 초석이 확인되었고 외줄 방고래도 확인되었다. 부속건물은 2동이 확인되었는데, 부속건물지 1의 남동편은 얕은 골짜기가 만들어지면서 유구의 일부가 유실되었고, 부속 건물지 2는 현재 기와가 함몰되어 건물지를 덮고 있는 상태로 일부 석렬(石列)만이 확인되었다.(그림 4)



2. 선림원지의 역사인식


대한불교 조계종 종헌(宗憲:종회에서 정한 규범)에“본종은 신라 도의국사(道義國師)가 창수한 가지산문에서 기원하여(이하생략)”라고 기록하고 있다. 가지산문의 선맥(禪脈)은‘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비문(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文)’에“달마는 당나라의 제1조
이며, 우리 신라에서는 도의국사(道義國師)가 제1조, 염거선사(廉居禪師)가 제2조, 보조선사 (普照禪師)체징이 제3조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 선종의 시조는 도의국사이다.
도의국사는 선덕왕 5년(784)부터 37년간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면서 오랜 기간 배워온 남선종(南禪宗)을 최초로 신라에 도입하려 했으나 당시 경주를 중심으로 한 교종(敎宗) 불교계에서 환영받지 못하자 설악산 진전사에 은둔 수도하게 된다. 그 후 도의의 선문은 염거화상을 거처 체징에 의해 장흥 보림사에서 가지산문(迦智山門)으로 개창된다.
염거화상(廉居和尙)은 도의국사의 직제자(直弟子)이다. 그러나 염거화상은 스승이 머문 진전사가 아닌 억성사(億聖寺)에 머물면서 선법(禪法)을 계승하고 이를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에게 전하였다. 도의(道義)에 의하여 들어온 선종은 화엄적 선종사상으로써 초기 선사들은 화엄종 소속 사찰에 주석하면서 그 소속 사찰을 선종으로 서서히 전향시키는데, 도의의 진전사나 염거의 억성사도 그러한 예에 속한다.10)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체징의 창성탑비에 보면“처음 도의선사가 서당(西堂)으로부터 심인(心印)을 전수받고 후일 우리나라에 돌아와 그 선의 이치를 가르쳤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경전의 가르침과 관법을 익혀, 정신을 보존하는 법만을 숭상하여 무위법(無爲法) 즉 선(禪)에 관심을 갖지 않고 허황한 것으로 여겨 높이어 중히 여기지 않았으니, 마치 달마조사가 양무제를 만났음에도 뜻이 통하지 못한 것과 같았다. 이로 말미암아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함을 알고 산림에 은거하여 법을 염거선사에게 부촉(咐囑)했다. 이에 염거가 설산(雪山,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에 머물면서 조사의 마음을 전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여니 체징(體澄)선사가 가서 이를 섬겼다.(이하생략)”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염거화상(廉居和尙)은 중국 유학을 떠나지 않고, 설악산에 은거한 도의선사로부터 법을 전해 받아 억성사에서 이를 체징에게 전하였다. 그런데 염거화상이 머문 설악산 억성사는 홍각선사의 비문을 통해 다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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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양양향토사연구원들 선림원지 3차 발굴지 답사(2015)


함통(咸通860~873) 말에 다시 설산의 억성사로 가서 (마멸) 법당과 향사[절에 있는 누대[(樓臺)의 미칭(美稱)]를 이루었다. 옥과 같이 좋은 나무들이 소나무 사이에 뒤섞여 있었으니, 은둔하는 것은 (마멸) 거슬렸으나, (마멸) 때에 명성은 우레처럼 세상을 울렸다. (마멸) 성상(헌강왕)께서 명성을 듣고 그 덕을 사모하여(마멸) 자나 깨나 (마멸) 선의 자취를 (마멸). 그리워하여 내연에 올라가 고공(苦空)을 강연하고 묘(마멸)를 얘기하니 (마멸) 이에 (마멸) 용안(마멸) 푸른 하늘을 보게 되었다. 다시 열흘이 지나지 않아 하직을 고하자, 명을 내려 (마멸) 길에서 전송 하고 (마멸) 임금께서 또 사신을 보내 산에까지 호송하게 하였다.11)


홍각선사 비문에 의하면 810년을 전후하여 경주에서 출생 하였는데 속명은 김이관(金利觀)이다. "홍각선사는 17세에 출가하여 해인사에서 화엄교리를 익힌 후 선을 배우고자 선림(禪林:선종사원)을 두루 찾아다니다가 합천 영암사에서 선정을 닦고, 설산 억성사에서 염거화상을 만나 선종 승려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1982년 11월 15일, 홍각선사비 탁본이 박영순(당시 부산은행 근무)에 의해 발견됨으로써 해독된 비문은 “그가 중국으로부터 돌아왔다”고 밝힘으로써 홍각선사가 당(唐)의 유학승(留學僧)임을 처음으로 알려주고 있다고 했다.12)
염거화상은 844년에 입적(入寂)하므로서 홍각선사가 그를 만난 시기는 염거화상의 말년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염거화상이 입적한 이후에는 억성사를 떠나 각지를 돌아다니다가 합천 영암사를 다시 방문하고, 850년~860년대 혜목산 고달사 원감대사 현욱을 찾아가 제자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함통 말년인 873년[세수(世壽) 60세]의 홍각선사는 다시 억성사에 머물면서 염거화상 입적 후 퇴락한 절의 금당(金堂)과 누대(樓臺)를 중창(重創)하고 이곳에서 머물다가 880년 10월 21일 승랍(僧臘)50년, 세수(世壽)67세로 입적을 맞이하게 된다.”13)
선림원 동종에 표기된 상화상 순응(上和上順應)은 해인사를 창건한 순응으로 추정되며 종백사(鐘伯士)인각지(覺智)는 신흥사의 전신인 선정사(禪定寺)에서 설법한 사림사(선림원) 소속의 승려인 바, 해인사, 진전사, 사림사(선림원), 선정사는 화엄종계열의 사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중국에서 선(禪)을 배워온 초기의 선승들은 출국하기 전에 연고를 맺었던 원 소속종파의 사찰에 의탁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해인사를 창건한 순응이 사림사(선림원)의 상화상으로 주종불사를 사실상 주관한 것은 순응이 원래 유학하기 전부터 사림사(선림원) 출신이거나 사림사(선림원)에 오래 주석(駐錫)했던 사림사(선림원) 소속 승려였을 가능성을 시사해 주는 것이며, 귀국한 후에도 사림사(선림원)에 머물렀다가 사림사(선림원)를 기반으로 해인사를 창건했을 가능성도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14)
또한, 염거화상의 탑비가 일제강점기 원주 흥법사에서 반출되었다는 기록대로 고려 태조에게 귀부하여 왕사로 임명되고 흥법선원을 중건한 충담(忠湛)의 진공대사탑 비문에 보면 설산(雪山)에서 성도(成道)하였다고 하므로 충담 또한 염거화상이 주석했던 사림사(선림원)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15) 선종계보에서 홍각선사는 선승 현욱(禪僧玄昱)16)의 제자가 됨으로서 봉림산문(鳳林山門)에 속하는 것으로 인식되어왔지만, 873년경 가지산문 염거화상이 거하던 억성사로 다시 들어가 불사를 일으킨 것으로 보아 가지산문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해인사를 창건한 순응법사(順應法師)가 상화상으로 불사에 참여할 정도로 중요한 화엄종 소속 사찰로 도의의 제자 염거화상이 주석하면서 홍각선사와 보조선사 체징 등을 선종으로 전향하게하고 아울러 사림사(선림원) 자체까지도 선종화 시켰을 것으로 본다.17)
특히 체징의 가지산파와 다른 도의의 직계는 설악산의 진전사, 사림사(선림원), 선정사(신흥사) 등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했다고 생각되므로 사림사(선림원)는 도의, 염거, 홍각으로 이어지는 설악산파의 중심사찰로 사림사(선림원) 불사를 새로 이루는 등 홍각선사 때 가장 성황을 이루었던 선종의 중심사찰로 추정된다.




Ⅲ. 억성사지(億聖寺址)로 보는 기록


억성사(億聖寺)는 우리나라 초기 선종사(禪宗史)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신라 하대의 사찰이다. 헌덕왕대에 남종선(南宗禪)을 우리나라에 처음 전래하였고 후에 가지산파의 초조(初組)가 되었던 도의선사(道義禪師)의 법을 이어받은 염거화상(廉居和尙)은 이 절에 주석하였으며, 가지산문의 실질적인 개창주인 체징(體澄)은 억성사에서 염거로부터 심인을 전해 받았다. 또한 홍각선사 이관(利觀)은 이곳에 머물며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18) 앞의 발굴조사 결과에서도 보았듯이 800년경 창건되었다가 900년을 전후한 시기 내지 10세기 전반기경 대홍수로 인한 산사태로 매몰된 관계로 선림원지에 대해 남아있는 기록은 많지 않다고 했다.
먼저 범종에 새겨진 기록이다. 선림원지 범종은 1948년 10월경 숯 굽는 사람들에 의하여 완전한 상태로 출토되어 월정사로 옮겨진지 2년 후 6.25전쟁 때 월정사와 함께 불타 파괴되어 일부 파편은 현재 국립춘천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그림 5, 6) 범종의 내부의 명문(銘文)을 보면 다음과 같다.


貞元卄年甲申三月卄三日當寺鍾成內之」
정원이십년갑신삼월이십삼일당사종성내지」
古尸山郡仁近大乃末紫草里施賜乎古鍾」
고시산군인근대내말자초리시사호고종」
金二百八十廷當寺古鍾金二百卄廷此以」
금이백팔십정당사고종금이백이십정차이」
本爲內十方旦越勸爲成內在之」
본위내십방단월권위성내재지」
願旨是者法界有情皆佛道中到內去誓內」
원지시자법계유정개불도중도내거서내」
時寺聞賜主信廣夫人君」시사문사주신광부인군」
上坐令妙寺 日照和上」상좌령묘사 일조화상」
時司      元恩師」시사  원은사」
鍾成在伯士當寺覺智師」종성재백사당사각지사」
上和上     順應和上」상화상 순응화상」
                良惠師」양혜사」
                平法▨」평법▨」
                善覺師」선각사」
                如於▨」여어▨」
                日晶誓師」일정서사」
宣司      禮覺師」선사 예각사」
節唯乃     同說師」절유내 동설사」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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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1948년 발견당시 선림원종(국립춘천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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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6>파손된선림원종(국립춘천박물관)


이 절이 선림원(禪林院)이라면 범종 명문(銘文)에“당원(當院)”이라 양각(陽刻)되었어야 함에도“당사(當寺)”라고 한 것은 선림원이 아니라 사(寺)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당사의 옛 종 쇠 220정을 밑천으로 삼았다”고 하여 이미 절과 종이 함께 이곳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체징(普照禪師體澄)창성탑비이다. 보조선사의 탑비를 보면“처음 도의선사가 서당 지장(西堂智藏)20)으로부터 심인(心印, 말이나 글에 의지하지 않고 마음으로 전하여지는)을 전수받고 후일 우리나라에 돌아와 그 선(禪)의 이치를 가르쳤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경전의 가르침과 관법을 익혀 정신을 보존하는 법만을 숭상하여 무위임운(無爲任運, 평상의 삶에 마음을 맡겨 인위적으로 조작하지 않음)의 종에 관심을 갖지 않고 허황한 것으로 여겨 높이어 중히 여기지 않았으니, 이로 말미암아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함을 알고 산림에 은거하여 법을 염거선사에게 부촉(咐囑)했다. 이에 염거화상이 설산 억성사에 머물면서 조사의 마음을 전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여니 체징(體澄)선사가 가서 이를 섬겼다.(이하생략)”라고 적고 있다. 당시 염거화상은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에 머무르고 있었고, 체징은 염거화상으로 부터 선종(禪宗)을 전수받게 된다.
관암전서(冠巖全書)에 의하면 홍각선사탑비는“판독할 수 있는 글자는 460여 자이고 글자의 점획이 팔팔 뛰려는 것 같고 삼장(三藏)의 서문과 서로 비슷하여 낫고 못함이 없다.”라고 했는데 그 비문은 다음과 같다.(그림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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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선림원 홍각선사탑비 촬영 : 김양식 연구원. 2015)


故弘覺禪師碑銘幷序」
고홍각선사비명 병서」
儒林郞守兵部郞中兼崇文館直學士賜緋魚袋臣金薳奉敎撰」유림랑수병부랑중겸숭문관직학사사비어대신김원봉교찬」沙門臣雲徹奉敎集晉右將軍王羲之書」
사문신운철봉교집진우장군왕희지서」(마멸)知法本不眞不假迺達禪宗是故譚空而實在其中論實而空居其內逈曉千經之表恒彰萬象之」(마멸)지법본불진불가내달선종시고담공이실재기중론실이공거기내형효천경지표항창만상지」(마멸)
端焉壞道體兼作化成自然非滅非生不增不減修之則了乎正覺得之則豈究其源斯爲法焉法」단언괴도체겸작화성자연비멸비생불증불감수지칙료호정각득지칙개구기원사위법언법」(마멸)掃跡於玄寂之鄕安靜於忘言之域其惟弘覺禪師乎禪師神岸淸爽性覺非凡法海津梁(마멸)」(마멸)소적어현적지향안정어망언지역기유홍각선사호선사신안청상성각비범법해진량(마멸)」諱利觀字有者金姓京都人也默識天竺(마멸)粹堅貞居一節操無儔處世得松竹之心安(마멸)」휘리관자유자김성경도인야묵식천축(마멸)수견정거일절조무주처세득송죽지심안(마멸)」文該通書史一覽無遺誦讀經墳五(마멸)券之敏不爲尙也年十七遂剃髮披緇損俗」문해통서사일람무유송독경분오(마멸)권지민불위상야년십칠수체발피치손속」(마멸)往海印寺訪諸善知求其勝者參聞(마멸)如流義海無涯詞峰極峻耆宿咸贊曰後生(마멸)」(마멸)왕해인사방제선지구기승자참문(마멸)여류의해무애사봉극준기숙함찬왈 후생(마멸)」遊靈嶽遍詣禪林偶次凌岫便欲(마멸)翠泉雲奇而復異絶昏埃之態幽而(마멸)」유령악편예선림우차릉수편욕(마멸)취천운기이복이절혼애지태유이(마멸)」敎聽者無遠邇溱若雲屯禪師逍(마멸)聖跡名山願周巡禮乃振(마멸)」교청자무원이진약운둔선사소(마멸)성적명산원주순례내진(마멸)」年復於靈巖寺修定累月暄囂徒(마멸)」연복어령암사수정루월훤효도(마멸)」圓鑑大師自華歸國居于惠目山(마멸)」원감대사자화귀국거우혜목산(마멸)」架崖構壑重建創修月未朞而功成(마멸)禪師緇門模範(마멸)彩儼容觀覩者莫不神肅(마멸)가애구학중건창수월미기이공성(마멸)선사치문모범(마멸)채엄용관도자막불신숙(마멸)之爲上足咸通末復往於雪山億聖(마멸)成金殿與香榭參差琪樹共於松隱逆(마멸)於時譽雷지위상족함통말부왕어설산억성(마멸)성금전여향사참차기수공어송은역(마멸)어시예뢰於世聖上聆風慕德(마멸)寤寐(마멸)禪髑仍昇內筵演苦空談妙是乎龍顔(마멸)以覩靑天後어세성상령풍모덕(마멸)오매(마멸)선촉잉승내연연고공담묘시호룡안(마멸)이도청천후不逾旬而告辭詔(마멸)餞路(마멸)上亦遣使衛送至山廣明元年冬十月卄一日詰旦(마멸)今불유순이고사조(마멸)전로(마멸)상역견사위송지산광명원년동십월입일일힐단(마멸)금法緣營盡汝等勉㫋守道是日奄然遷(마멸)夏五十嗚呼生爲求俗亡以示滅(마멸)宸衷悼萬姓법연영진여등면전수도시일엄연천(마멸)하오십오호생위구속망이시멸(마멸)신충도만성悲凉忍草凋衰慈雪慘絶(마멸)徒興追痛之哀弟子梵龍使義等百(마멸)側恩命中官爭刻焉來年비량인초조쇠자설참절(마멸)도흥추통지애제자범룡사의등백(마멸)측은명중관쟁각언래년(마멸)贈諡曰弘覺禪師塔號爲禪鑑之塔巍巍(마멸)衣冠末流風塵冗吏▨▨▨譽藝匪揚(마멸)陳紀述雖文多簡略事不繁書蓋春秋一字之(마멸)년(마멸)증시왈홍각선사탑호위선감지탑외외(마멸)의관말류풍진용리▨▨▨예예비양(마멸)진기술수문다간략사불번서개춘추일자지(마멸)(마멸)大哉佛日有土皆周盛乎法▨簡方不流辰韓酷尙▨▨▨修竺乾可竝王舍斯儔師其弘敎聖跡皆遊(마멸)眞理了悟至道竟覺心鏡洞開▨霜自鑠談法言表▨▨▨廓論發傾河德存仰岳頻昇內座居▨▨▨▨▨▨摧摧毁禪敎削▨▨期▨▨▨謝人間蕭條禪室寂寞玄關(마멸)法要萬古誰攀▨瞻遺影涕想生顔凄凄巖樹慘慘雲山豊碑(마멸)大唐光啓二年丙午十月九日建車城(마멸)崔夐篆額報德寺沙門臣慧江刻字(마멸)대재불일유토개주성호법▨간방불류진한혹상▨▨▨수축건가병왕사사주사기홍교성적개유(마멸)진리료오지도경각심경동개▨상자삭담법언표▨▨▨곽론발경하덕존앙악빈승내좌거▨▨▨▨▨▨최훼선교삭▨▨期▨▨▨사인간소조선실적막현관(마멸)법요만고수반▨첨유영체상생안처처암수참참운산풍비(마멸)대당광계이년병오십월구일건차성(마멸)최경전액보덕사사문신혜강각자“21)


홍각선사가“함통(咸通, 860~873) 말에 다시 설산의 억성사로 가서 (마멸) 금당과 불전을 이루었다.”고 한다. 탑비와 부도는 통상 열반하신 곳에 세워지는 것이 불교계의 상례이다. 또한 발굴조사결과도 통일신라 말기인 당시 금당과 누대의 대대적인 중창이 있었음도 확인되었다. 홍경모(洪敬謨)의 관암전서(冠巖全書)에도 ‘신라 설산 선림원 홍각선사비’라고 적고 있어,22) 이곳 선림원지 터가 설산의 억성사(億聖寺)로 추정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권덕영 교수는 3종의 탁본자료와 5점의 비첩을 참조하여 비문 복원을 시도하면서 억성사를 지금의 선림원지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의 절 이름인 선림원이나 사림사는 원래 사찰 이름이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기에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어지게 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문명대 교수는 선림원은 억성사 일 가능성이 짙다고 할 수 있으나, 사림사는 선림원과는 구별되는 사찰로, 선림원과는 4km 떨어진 현재의 서림리 현서분교장 인근의 절터를 이르는 사명(寺名:서림사)이며, 고려 초나 일제강점기 때 산사태로 매몰된 선림원지에 있던 석조비로자나불상을 이곳으로 이안하였을 것으로 추정하는 등 선림원의 후신으로 보고 있다.23)반면 정영호(鄭永鎬전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장)는 서림사에 대해“이 절터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기왓편이 발견되고 있으며 석조비로자나불좌상도 신라하대의 조성으로 추정되어서 신라시대에 서림사가 자리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 절은 선림원으로 가는 도중으로 서림리 골짝에서는 가장 넓은 지역으로 이 일대에서 가장 큰 선림원 도량으로 가기 전 또 하나의 신라사원이 있었음을 알게 한다.”24)라고 함으로써 앞의 주장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Ⅳ. 사림사 와 선림원 연관성


사림사(沙林寺)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709년 양양부사를 지낸 명암 이해조(1660~1711)의 현산 30경(峴山三十景) 시제(詩題)의 서문(序文)에는“사림사는 부의 서쪽 70리 산협에 있는데 다만 폐허의 옛 절터만 남아 있다. 절 앞의 돌비에는 곧 매월당집(梅月堂集)에 왕희지(王羲之)의 글자체로 홍각선사(弘覺禪師)의 행적을 기록했다. 라고 했다. 필획이 완연하니 실물과 흡사하여 이 보물을 많은 사람이 완상한다. 근자에 나무꾼이 두들겨 부수어 조각난 비로 남아있다.”25)라 기록되어 있다.
지리지(地理誌)인 여지도서(輿地圖書, 1757-1765), 양주읍지(襄州邑誌, 1823년), 양양 현산지(襄陽峴山誌, 1823년), 관동지(關東誌, 1826년), 관동읍지(關東邑誌, 1868년), 양양군읍지 2(襄陽郡邑誌二, 1896년), 양양부읍지 전(襄陽府邑誌全, 1911년)의 고적에 다음과 같이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다. “沙林寺碑在府西三十里有沙林寺遺壚石碑金時習集王羲之字撰弘覺禪師碑字體古高世以爲寶中年爲野火所燒尙餘片石留在府中(사림사비재부서삼십리유사림사유로석비금시습집왕희지자찬홍각선사비자체고고세이위보중년위야화소소상여편석류재부중)”26)이라 하였다.(그림 8)
관암 홍경모[(冠巖洪敬謨, 1774~1851. 성균관 대사성, 사헌부 대사헌, 강원도 관찰사 등)의 관암전서(冠巖全書) 책 23지(冊23志) 사의당지(四宜堂志) 사림사비(沙林寺碑)와 관암전서(冠巖全書) 책27 제후 동국묵적(題後東國墨蹟) 신라 홍각선사비(新羅弘覺禪師碑)의 글이 전하는데 해석문은 다음과 같다.
“신라 설악산의 선림원 홍각선사비는 옛날 양양의 사림사에 있었다.
병부랑중 김원(金薳)27)이 글을 짓고, 승려 운철(雲徹)은 진나라 우장군 왕희지의 글을 모아 비면에 썼으며, 차성현령(車城縣令) 최형(崔夐)은 전액을 썼다.”28)라고 했다.
위를 종합할 때 통일신라 하대에 양양에는 사림사와 선림원이 공존하고 있었음이 문헌을 통해 입증되었다고 보는데, 권덕영 교수는 지리지인 「관동지」의 내용에 대해 잘못 기술되어 신빙성이 없다고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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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사림사홍각선사비명 (출처 : 한국사DB)


『관동지』에서는 이 절을 沙林寺라 하였는데, 무엇에 근거하여 그렇게 불렀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런데『관동지』의 관련 부분 내용을 보면, 홍각선사비문은 金時習이 왕희지의 글자를 집자하여 찬술한 것’이라하여 전혀 사리에 맞지 않게 기록하였다. 이점으로 보아『관동지』고적조의 해당 부분은 관련 자료의 광범위한 수집과 정밀한 조사 없이 민간에 떠도는 속설에 의거하여 기술한 것으로 보아도 크게 빗나간 추론은 아니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사림사라 칭한 것도 신빙성이 없다고 하겠다. 이처럼 민간전승의 불확실한 명칭을 일제시대에 그대로 답습하여 사림사라 하였고 지금도 일부에서는 이 절을 사림사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사림사라는 명칭 역시 신빙성 있는 자료에 근거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절의 본래 이름일 수가 없다.29)


이에 대해 필자의 견해는 한문해석상의 특수성 내지 해석자의 식견의 차이를 고려한다면, 김시습은 홍각선사비문을 보고 왕희지의 글자를 모아 지은 것이다. 라고 한 것을 마치 김시습이 왕희지의 글자를 집자하여 찬술한 것으로 해석한다면 옳지 않다고 본다. 만약 앞의 권덕영 교수의 주장이 옳았다면『관동지』와 같은 내용이「여지도서」·「관동읍지」·「양양군읍지2」·「양양 현산지」등 지리지에 수록되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석을 할 것인지 의구심(疑懼心)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더 나아가 당시의 양양부사나 관련업무 책임자들이 홍각선사비와 관련 시대구분을 잘못해 통일신라 말 제작된 비의 글을 조선초기의 학자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이 찬술한 것으로 기술하지 않았다고 본다.
또한 정영호 교수(전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장)도“일제시대에 이곳을 사림사로 부르게 된 이유는 원래의 선림을 지방인들이 와전해서 불렀던 것을 일본인들이 그렇게 사용한데 기인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선림(禪林)역시 앞에서 추론한 바와 같이 근거 없이 붙인 명칭에 불과하다.”30)라고 하였다.
권덕영 교수와 정영호 교수(전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장)의 주장에 대해 동의할 수 없는 것은 관동지와 같은 시기에 작성된 지리지인 양주읍지(襄州邑誌, 1823년)와 양양 현산지(襄陽峴山誌, 1823년) 고적편에는 “弘覺碑新羅國雪山禪林院弘覺師碑兵部郞中金薳撰沙門雲徹集右軍字書車城縣令崔夐篆筆書逼眞世以爲奇寶摸榻坌集土民甚苦之延以野火碑遂缺而尙有一片移處於府中碪礎之下今上丁卯府使安公慶運拾殘片留置府庫剝落不辨字畫(홍각비신라국설산선림원홍각사비병부랑중김원찬사문운철집우군자서차성현령최형전필서핍진세이위기보모탑분집토민심고지연이야화비수결이·그 외에도 한국사 역주기록(국사편찬위원회) 사림사(17건), 삼국사기 1 권 제39 잡지 제8 『숭문대(崇文臺)』31)에 관한 해석문의 주208과 주209에“사림사 홍각선사비(沙林寺弘覺禪師碑)”라고 기록하고 있음에도 이를 부정한 것은 폭넓은 자료수집이 안된 상황에서 작성한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위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하나의 절터에 2개의 절(사림사·선림원)이 공존하였다는데 대해 이론이 없다고 보며 불교계의 불문율(不文律)의 사례를 중심으로 사림사와 선림원의 해법(解法)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찾아보기로 한다.
만해(萬海) 한용운이 지은『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乾鳳寺及乾鳳寺末寺史蹟)』을 보면 신흥사는 신라 진덕여왕 6년 자장율사가 설악산의 동에 향성사(香城寺)를 창건한 후, 신라 효소왕 7년 소실되자 효소왕 10년에 의상조사가 향성사를 능인암지(能仁庵址)에 중건하고 선정사(禪定寺)라 개칭하였다. 조선 인조 20년 선정사가 소실되자 인조 22년 사승 영서(靈瑞), 연옥(蓮玉), 혜원(惠元) 세분의 고승들이 10리 아래에 중건하고신흥사(神興寺)라고 개칭(改稱)하였다.
백담사는 신라 진덕왕 원년 자장법사가 설악산 한계리에 한계사(寒溪寺)를 창건하고 미타상(彌陀像) 3위를 조성 봉안한 후, 신라 원성왕 원년 소실되자 원성왕 6년 사승 종연, 광학, 영희, 법찰, 설흡 등이 아래 30리 지점으로 이전복원하고 운흥사(雲興寺)라 칭했고, 고려 성종 3년 운흥사가 소실되자 성종 6년 사승 동훈, 준희 등이 북쪽으로 60리 지점으로 이전복원한 후 심원사(深源寺)라 칭하였다. 조선 세종 14년 심원사가 소실되자 세종 16년 사승 의준, 해섬, 취웅, 신영, 재익, 재화 등이 아래 30리 지점으로 이전복원한 후 선구사(旋龜寺)라 칭하였다. 조선 세종 25년에 다시 소실되자 세종 29년 서쪽으로 1리 지점으로 이전복원한 후 영취사(靈鷲寺)라고 개칭하였으며, 세조 원년 영취사가 소실되자 세조 2년 사승 재익, 재화, 신영 등이 상류 20리 지점에 이전복원한 후 백담사(百潭寺)라 개칭하였다.
영혈사(靈穴寺)는 신라 신문왕 9년(689)에 원효조사가 창건(刱建)하였다. 조선 숙종 14년에 소실되자 이절터에 숙종 16년에 취원(聚遠)스님이 중건하고 영천사(靈泉寺)라 칭하였는데, 이 절의 서쪽에 영천(靈泉:신령스러운 샘)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고종 24년에 지화(知和), 도윤(道允) 두 스님이 중수하고 다시 영혈사로 개칭했다. 또한 영혈사의 경우 원효대사가 입적한 때가 신문왕 6년(686)이므로 이곳 사찰의 창건 연대와는 맞지 않는다. 이러한 창건 연혁의 연대는 고승대덕(高僧大德)을 창건조사로 모심으로써 각기 사찰의 위상을 높이고자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고 했다.32)
이와 같이 사찰을 중수하거나 소실된 사찰을 이전복원 할 경우 기존의 사찰명칭과는 무관하게 개명할 수 있다는 것은 불교계의 불문율(不文律)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홍각선사가 기존의 억성사에 들어와 금당과 불전을 대대적으로 중창(重創)한 시기가 870년경으로 학계의 발굴조사결과와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홍각선사는 통일신라 말 이곳에서 불전을 대대적으로 중창한 후 기존(旣存)의 사찰로 보는 억성사(億聖寺)를 사림사(沙林寺)라 개칭 하고, 사림사 내에 있는 별사(추정 승방지)를 선림원(禪林院)으로 명명(命名)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Ⅴ. 사림사와 선림원의 폐사(廢寺) 추정


국립춘천박물관 소장품 조사연구보고서 1의 자료에 의하면 900년을 전후한 시기 내지 10세기 전반기 경 대홍수로 인한 산사태로 절터가 매몰된 것으로 조사되었다고 했으며 이와 관련 산사태 발생 시기를 고려 초나 일제강점기 때로 보았다.33)정영호 전 박물관장도 선림원지는 고려일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러 폐사된 것으로 보았다.34)
이로보아 대홍수의 전거(典據)는 선조 38년(1605) 7월 23일 기사가 유력하다. “강원도·경상도의 수재 상황을 열거하다.”의 기록을 일명 을사포락(乙巳浦落)이라고 하는데, 당시 강원도 영서에는“20일 밤에는 비가 억수같이 내리더니 갑자기 큰 홍수가 져 객사와 관청, 군기·창곡을 휩쓸어 버렸고, 크게는 사찰과 작게는 촌락이 물이 지나친 곳은 모조리 쓸려나갔으며 우마와 가재도구도 남김없이 모두 익사하거나 떠내려갔다.”라 했다.
“양양(襄陽)은 부내(府內)의 100여 호의 대소인가(大小人家)가 재산과 가축이 일시에 물에 잠기고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었다. 부모와 자녀, 또는 부부 형제 온 가족이 물에 빠지거나 산사태에 압사하여 여염 거리에는 통곡하는 소리가 하늘을 찌르고 해변에는 시체가 즐비하게 쌓였다.”35)라고 했다.
어느 때 인지 확실하지는 않으나 양양군 양양읍 화일리 소재 영혈사 주지가 제공해 준 사림사와 관련된 산사태 설화가 있어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천지를 분간할 수 없이 쏟아지는 폭우 속 어느 날 밤에 수많은 승려들이 걱정스레 요사(寮舍) 채에서 합장 불공하고 있었는데, 경내 뜰에 대호(大虎)가 나타나 볶아치므로, 수장스님께서 염불을 멈추게 하고서, 대호(大虎)가 저렇게 날뛰는 것은 예사가 아니요, 누구를 데려가려고 저러는 것이 분명하니 한분씩 밖으로 나가보자고 하였다. 두려움을 무릅쓰고 스님들은 차례로 모두 나갔으나 대호는 여전히 들뛰며 볶아친다. 이상히 여겨 인원을 점검하니 한분의 스님이 보이지 않아 찾아본 즉 요사 채 주방에서 저녁을 마친 설거지를 하는 스님이 있어 나오라 하였다. 주방담당 스님은 손도 닦지 않은 채 억수같이 퍼붓는 빗속마당으로 나오니 대호는 순간 그 스님을 덥석 물고 휙 날아가듯 어둠속을 가르는데, 벼락인가 쾅 우르르 쾅 쾅 어두운 밤 산을 부수듯 뒤흔들더니 높은 뒷산이 절개되어 삽시간에 절간을 덮쳐버렸다는 이야기를 전했다.36)
위의 역사적 자료들을 종합하면 선림원은 선조 38년(1605)에 있은 을사포락 때 산사태로 메몰 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양주읍지(1823) 사찰조에“사림사는 부 서쪽 40리 서림의 남쪽에 있는데 지금은 폐하여 졌다.”라 했고, 1747년 6월경에“서림 사람이 바위 낭떠러지에서 쇠사발 대나무 하나를 얻었는데 조금도 상하지 않았다.”고 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사림사 폐사는 그리 오래지 않았음을 추정할 수 있다.




Ⅵ. 맺는말


사림사(선림원지)는 황이리 남쪽 미천골(米川谷)에 위치하고 있는 통일신라 하대의 초기 선종사찰이다. 당시에 수많은 승려와 수도자들이 찾아 들었던 이곳은 조석으로 공양미를 씻은 물이 흘러내려 흰빛의 계곡을 만들었다고 해서 미천(米川)이라고 유래 한다. 이를 입증이나 하듯이 발굴조사결과 무려 남서 길이 29.2m, 북동 길이 25m, 너비 13m의‘ㄱ’자형 대형 승방지와 부속건물 2동이 확인되었다.
특히 사림사(선림원)는 선종(禪宗)의 종조인 도의국사(道義國師)로부터 선법(禪法)을 승계한 염거화상, 가지산문의 개창주인 보조선사 체징, 해인사를 창건한 순응법사, 흥법선원(興法禪院)의 진공대사, 홍각선사 등 당대(當代)의 불교계 고승대덕(高僧大德)들이 선법(禪法)을 익힌 설악산파의 중심사찰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사림사(선림원)에서 출토된 범종의 기록에 당사(當寺)라고 적고 있듯이 당시에는 선림원이 아닌 사찰(寺刹)이었고, “당사의 옛 종을 밑천 삼았다.”고 하고 있듯이 정원20년(804) 종을 만들 당시에 이미 종과 사찰이 있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보조선사 탑비에 보면 염거화상이 설산의 억성사에 머무르면서 선종을 전수했는가 하면, 홍각선사 탑비에는“함통(860~874) 말에 다시 설산의 억성사로 가서 금당과 불전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런데 홍경모의 관암전서에 보면“신라 설산의 선림원 홍각선사비는 옛날 양양의 사림사에 있었다.”라고 적고 있어 사림사(沙林寺)와 선림원(禪林院)이 이곳에 공존하였다는 사실과, 설산에 속하고 있음도 확인되었다. 또한 선림원지의 발굴조사 결과에도 9세기말경 대대적인 중창이 있었음도 확인되었으며 홍각선사의 탑비가 선림원지에 있는 점에 비추어 이곳 선림원지가 설산의 억성사(億聖寺)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렇다면 억성사, 사림사, 선림원의 관계이다.
선림원지 1-2차 발굴조사결과 이 시대 이후의 유물이나 유구, 기타 출토품(특히 와당)이 전혀 없으므로 900년을 전후한 시기 내지 10세기 전반기경에 대홍수로 인한 산사태로 금당지와 조사당 모두 매몰되었으며 그 후 복구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럼에도 갑자기 사림사라는 기록이 나타난다.
사림사(沙林寺)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709년 양양부사를 지낸 이해조의 현산 30경 시제(詩題)에 사림사비는 사림사 유허지에 있다고 한 후, 여지도서, 관동지, 관동읍지, 양양군읍지, 양주읍지, 양양현산지 등에 비슷한 내용이 전하고 있다. 이외의 각종역사서의 주석과 연구논문 등에도 이를 인용하여 사림사 홍각선사비로 명기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의 절터에 두개의 사찰명칭이 등장함은 우리나라의 불교계에서도 극히 드믄 일이다.
따라서 현재 통용되고 있는 사(寺)와 원(院)에 대해 그 어원(語源)을 살펴보았다. 중국“당나라 때에는‘사(寺)’와‘원(院)’을 같은 의미로 보았고, 당나라 이후에는‘사(寺)’를‘원(院)’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하였는데 즉, ”사(寺)는 사찰 전체를 가리키는 어휘로, 원(院)은 사찰 속에 있는 특정한 기능의 별사(別舍)를 지칭할 때 많이 사용하였다.“고 했다. 지금은 우리나라에서도 이를 받아 들여 사용한다고 앞에서 밝힌바 있다.
그런데 만해 한용운(萬海韓龍雲)이 지은『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乾鳳寺及乾鳳寺末寺史蹟)』을 보면 신흥사·백담사·영혈사는 신라 때 창건한 절로 몇 차례 우여곡절 끝에 사찰을 중수하거나 소실된 사찰을 이전 복원 할 때마다 기존의 사찰명칭과는 무관하게 개명하였다. 이는 불교계의 불문율(不文律)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홍각선사도 870년경 이곳 억성사에 다시 돌아와 금당과 불전을 대대적으로 중창(重創)한 후 기존(旣存)의 억성사(億聖寺)를 사림사(沙林寺)로 개칭하고, 사림사 내에 있는 별사(승방지)를 선림원(禪林院)으로 명명(命名)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렇게 볼 수 있는 요인은 홍각선사가 중국의 유학승으로서 선진사례를 받아들여 우리나라 초유의 사(寺)와 원(院)이 공존하는 사찰을 창업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향후 본 사찰과 관련 개선이 필요한 사항은 사림사와 선림원이 대등관계의 절이 아니라 사찰 내에 속해있는 특정한 기능의 별사(승방지)를 지칭할 때 사용하였던 원(院)으로써 새로운 호칭을‘사림사의 선림원’또는‘사림사 경내의 선림원’으로써 상호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감히 제언하면서 본 연구를 바탕으로 폭넓은 연구로 옳은 절 명칭이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참고문헌》
문명대,『선림원지 발굴조사약보고』, 1986.
정영호,「선림원홍각선사탑의 추정」,『이선근고희기념 한국학논총』, 1974
한빛문화재연구소,『양양선림원지정밀학술발굴조사』, 2015. 10.
문명대,『선림원본존불상문제와 석비로자나불상의 연구』, 2002.
권덕영,『홍각선사탑비문을 통해 본 신라 억성사지의 추정』,1998.
국립춘천박물관,『선림원종·염거화상탑지』, 1986.
한용운,『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 1928.
김현준,『사찰, 그 속에 깃든 의미』, 1991.
강릉대학교박물관,『양양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1994.
신철균·정연우,『양양 서림사지 석불좌상 및 삼층석탑 조사보고』, 1998.
양양군·강원향토문화연구회,『양양역사자료집』, 2003.
양언석,『연암 박지원과 양양의 역사문화유적지 연계방안』, 2014.


《자료》
『삼국사기』, 권1.
『명암집』, 권4.
『여지도서』, 1765.
『양주읍지』, 1823.
『관동지』, 1826.
『관암전서』, 책11, 책23, 책27, 1851.
『관동읍지』, 1868.
『양양군읍지』, 1896.
『양양현산지』, 1911.
『양양군지』, 2010.


《단행본》
金吉祥,『佛敎大辭典』, 上·下, 弘法院, 1998.
윤허용하,『불교사전』, 동국역경원, 1998.


《도움을 준 분》
홍선(弘宣, 남, 나이미상 , 영혈사 주지), 면담자료(2015.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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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영호「, 선림원 홍각선사탑의 추정」, 1974. p.231
2) 한빛문화재연구원「양양 선림원지 정밀발굴조사 약보고서」, 2016. p.10
3) 국립춘천박물관, 「선림원종.염거화상탑지」연구조사보고서, 2014, p.57
4) 당에 신라 사람들을 위해 세운 불교 사찰인 신라원 중 하나로 장보고가 설립함
5) 金鉉埈, 1991. 『사찰, 그 속에 깃든 의미』p.19
6) 유홍준『나의 문화유산답사기』1, 1993. p.232
7) 해석 : 정원 20년 갑신(804) 3월 23일에 당사의 종이 이루어지다. 고시산군(옥천군)의 인근 대내말과 자초리가 시납하신 옛 종의 쇠 280정과 당사의 옛 종의 쇠 220정, 이것으로 밑천을 삼고 사방의 단월들이 권하여 이루었다.
8) 2016년 11월 선림원지 정밀발굴조사 약보고서 .pp.31~36
9) 문명대, 『선림원지 발굴조사약보고서』, 1986. 참조
10) 국립춘천박물관, 「선림원종.염거화상탑지」연구조사보고서, 2014, p164
11) 禪咸通末復往於雪山億聖(마멸)成金殿與香榭參差琪樹共於松隱逆(마멸)於時譽雷於世聖上聆風慕德(마멸)寤寐(마멸)髑仍昇內筵演苦空談妙是乎龍顔(마멸)以覩靑天後不逾旬而告辭詔(마멸)餞路(마멸)上亦遣使衛送至山廣明元年冬十月卄一日詰旦(마멸)今法緣營盡汝等勉㫋守道是日奄然遷(마멸)夏五十嗚呼生爲求俗亡以示滅(마멸)宸衷悼萬姓悲凉忍草凋衰慈雪慘絶(마멸)徒興追痛之哀弟子梵龍使義等百(마멸)側恩命中官爭刻焉來年(마멸)贈諡曰弘覺禪師塔號爲禪鑑之塔巍巍(마멸)衣冠末流風塵冗吏▨▨▨譽藝匪揚(마멸)陳紀述雖文多簡略事不繁書蓋春秋一字之(마멸)(함통말부왕어설산억성(마멸)성금전여향사참차기수공어송은역(마멸)어시예뢰어세성상령풍모덕(마멸)오매(마멸)선촉잉승내연연고공담묘시호룡안(마멸)이도청천후불유순이고사조(마멸)전로(마멸)상역견사위송지산광명원년동십월입일일힐단(마멸)금법연영진여등면전수도시일엄연천(마멸)하오십오호생위구속망이시멸(마멸)신충도만성비량인초조쇠자설참절(마멸)도흥추통지애제자범룡사의등백(마멸)측은명중관쟁각언래년(마멸)증시왈홍각선사탑호위선감지탑외외(마멸)의관말류풍진용리▨▨▨예예비양(마멸)진기술수문다간략사불번서개춘추일자지(마멸)
12) 동아일보, 1982. 11. 16. 천년만에 햇빛 본 신라고승의 생애.
13) 『선림원종.염거화상탑지』국립춘천박물관, 연구조사보고서, 2014, p165
14) 문명대, 『선림원본존불상문제와 석비로자나불상의 연구』, p.17
15) 국립춘천박물관, 「선림원종.염거화상탑지」연구조사보고서, 2014, pp.166-167
16) 현욱(玄昱, 788 ~ 869)은 남북국 시대 신라의 승려 이다. 동명(東溟, 현재의 강원도 강릉) 출신이며, 시호는 원감화상(圓鑑和尙)이다. 선종구산 중 봉림산문을 세운 심희(審希)의 스승으로 봉림산문의 개산조로 일컬어진다
17) 앞 논문, p.166
18) 권덕영, 「홍각선사탑비문을 통해 본 신라 억성사지의 추정」, 1998. p.75
19) 해석문 : 정원 20년 갑신(804) 3월 23일에 당사의 종이 이루어지다. 고시산군의 인근 대내말과 자초리가 시납하신 옛종의 쇠 280정과 당사의 옛종의 쇠 220정, 이것으로 밑천을 삼고 사방의 단월들이 권하여 이루었다. 원하는 것은 법계의 유정이 다 불도에 이르러 감이다. 서원할 때 들으신 님은 신광부인님이다.
상좌 영묘사의 일조화상 당시 감독 원은스님 종을 만든 박사 당사의 각지스님 상화상 순응화상 양혜스님 평법스님 선각스님 여어스님 일정서사선사 예각스님 당시의 유나 동설스님
20) 당나라 때의 건화(虔化, 江西) 출신 선승(禪僧, 735-814)으로 속성(俗姓)은 요(廖)씨다. 8살 때 출가하여 25살 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불적암(佛迹巖)에서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을 뵙고 심인(心印)과 가사(袈裟)를 받아 그 법을 이었다.
21) 해석 : (마멸) 고 홍각선사의 비명 및 서 유림랑 수 병부랑중 겸 숭문관 직학사이며 비어대를 하사받은 신 김원이 교를 받들어 짓고, 사문인 신 운철이 교를 받들어 진나라 우장군 왕희지의 글을 집자하다. (마멸) 법은 본래 진도 아니고 가도 아님을 알아야 선의 종취에 통달하게 된다. 그러므로 공을 말하되 실이 그 속에 있고 실을 논하되 공이 그 안에 있어서, 멀리 천경의 밖까지 밝히고 항상 삼라만상의 ▨를 드러낸다. (마멸) 도의 본체를 허물면서 아울러 화합하게 하니 자연히 사라지지도 아니하고 생기지도 아니하며 더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다. 그것을 닦으면 마침내는 정각을 깨닫게 되고 그것을 얻으면 그 근원을 궁구하게 되니, 이것이야말로 불법이다. 법(마멸)은 그윽하고 고요한 고을에서 자취를 일소하고 말을 잊은 경지에서 편안하고 고요하니, (그 사람은) 바로 홍각선사가 아니겠는가! 선사는 정신이 뛰어나게 맑고 시원하며 본성의 깨달음이 비범하여, 법의 바다를 건너게 해주는 나루터이자 다리였다. (마멸) 휘는 이관이요 자는 유자이며 (속성은) 김씨로서 서울 사람이다. 묵묵히 천축 알아 (마멸) 굳건한 정절로 한결같이 머무르매 절개와 지조는 짝할 만한 사람이 없었고, 세상에 처함에 송죽 같은 마음을 지녔다. 편안히 (마멸)두루 경서와 사서에 통하여 한번 본 것은 잊어버리지 않았으며, 삼황오제의 고전을 암송하는 기민함은 그보다 나을 수 없었다.
17세에 드디어 머리를 깎았으며, 승복을 입고 세속의 옷을 버렸다. (마멸) 해인사로 가서 여러 선지식을 찾아갔다. 그 뛰어난 것을 구하여 참예하고 듣는 것이 (마멸) 물흐르듯 하였으며, 뜻의 바다는 한량 없고 글의 봉우리는 드높았다. 노숙들이 모두 칭찬하기를, “후생이 (마멸)”이라 하였다. (마멸) 영악에 노닐며 두루 선림을 찾았다. 우연히 어느 높은 산에 갔다가 문득 (마멸) 하고자 하였다. (마멸) 푸른 샘물과 구름은 기이하고도 빼어나며, 노을진 모습은 그윽하면서도 (마멸)하였다. (마멸)을 가르치니 (이를) 듣는 자가 원근을 막론하고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선사는 (마멸) 성스런 자취와 명산에서 두루 순례하기를 원하였다. (마멸)을 떨쳤다. (마멸)년에 다시 영암사에서 여러 달 동안 선정을 닦았는데 떠들썩한 무리들 (마멸). 원감대사가 중국에서 귀국하여 혜목산에 머물며 (마멸) 산비탈에다 단단히 얽은 것을 새로 중건하니, 한 달이 채 못되어 완공되었다. (마멸)이 집집마다 가득차고 수레가 성을 기울일 정도였다. (마멸) 선사는 불문의 모범이요, 모습과 풍채가 준엄하여, (그를) 보는 자는 정신이 엄숙해져(마멸) 선사를 상족으로 삼지 않음이 없었다. 함통(860~874) 말에 다시 설산의 억성사로 가서 (마멸) 금당과 불전을 이루었다.
옥과 같이 좋은 나무들이 소나무 사이에 뒤섞여 있었으니, 은둔하는 것은 (마멸) 거슬렸으나, (마멸) 때에 명성은 우뢰처럼 세상을 울렸다. (마멸) 성상(헌강왕。)께서 명성을 듣고 그 덕을 사모하여 (마멸) 자나깨나 (마멸) 선의 자취를 (마멸). 그리하여 내연에 올라가 苦空을 강연하고 妙▨를 얘기하니 (마멸) 이에 (마멸) 용안(마멸) 푸른 하늘을 보게 되었다. 다시 열흘이 지나지 않아 하직을 고하자, 명을 내려 (마멸) 길에서 전송하고 (마멸) 임금께서 또 사신을 보내 산에까지 호송하게 하였다. 광명 원년(880:헌강왕 6) 겨울 10월 21일 아침에 (마멸), “이제 법의 인연이 다 되었다. 너희는 힘써 도를 지키라”하고, 그날 자연스레 입적하니 (마멸) 법랍이 50세였다. 아! 살아서는 세속을 구제하더니 죽어서는 멸함을 보이는 구나. 임금께서 (마멸) 애도하고 만 백성이 슬퍼하였으며, 인동초가 시들고 자애로운 눈발이 처절하였다. (마멸) 무리들이 추모하는 슬픔을 못이기니, 제자 범룡과 사의 등이 매우 슬퍼하였다. (마멸) 임금은 중관을 명하여 시각을 다투도록 하였다. 이듬해에 (마멸) 시호를 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