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의 역사와 문화

[양양의 역사] 조선시대 (1392~1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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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419회 작성일 2019-01-25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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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97년 태조 6년 왕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양주부(襄州府)로 승격하고 태종 13년에는 양주도호부(襄州都護府)로 개칭.


◈ 1416년 태종 16년에 양양(襄陽: 해 오름의 고장)으로 고쳐 현재까지 존속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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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대 일출>



◈ 명창 동구리
1466년 세조는 정희왕후(貞憙王后)와 세자를 동반 강원도를 순행 하였는데, 금강산을 거쳐 낙산사 법당에서 향패(香牌)를 드리는 불사를 행한 후, 윤 3월 14일 월정사로 향하던 중 지금의 강릉 연곡에서 장막을 치고 농가를 잘하는 자를 모아 농가경연대회를 열도록 하였다.
그 결과 양양부의 관노 동구리(同仇里)가 당시 최고의 명창(名唱)으로 선발되어 악공(樂工)의 예(禮)로 어가(御駕)를 따르도록 하고, 포상으로 유의 일령(●衣一領)을 하사하였다. 양양문화원에서는 이를 선양(宣揚)하기 위해 2001년부터 매년 동구리 전통민요경창대회를 지방대회로 개최하던 것을 2017년부터는 전국대회로 격상하여 개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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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산사 동종(洛山寺銅鐘)은 조선 예종 1년(1469년)에 그의 부왕 세조를 위해 낙산사에 보시한 종이다. 숭유억불정책에도 조선 초기에 제작된 종(보물 제479호)으로 당대의 범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지난 2005년 4월 5일 양양산불로 녹아내려 보물 지정이 해제되었는데 2006년 10월 16일 문화재청에 의해 현대의 과학 기술로 완벽히 복원하여 현 범종각에 봉안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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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원)낙산사 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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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낙산사 동종



◈ 1490년 성종 21년에 강릉 안인포의 수군만호영(水軍萬戶營)을 양양 조산에 옮기고 대포영(大浦營)이라 칭함.


◈ 1520년 중종 15년 대포영에 높이 12척, 둘레 1,469척 석성을 축조 하였다가 인종 4년(1545)에 적합지 못해 혁파(革罷)함.


◈ 1529년 양양인 이봉(李●)을 대포수군만호(정3품)로 임명된 사실이 지난 2011년 3월21일 양양지역 전주이씨 문중 선묘 이장 중 묘지석(墓地石)이 출토되면서 밝혀짐.


◈ 1535년경 출생한 허억봉은 조선의 권문세가 자손으로 그의 8대조는 세종대왕 때 좌의정을 지낸 허조(許稠)였다. 그의 후손들이 사육신 등과 단종 복위를 기도하다 발각되어 그 집안의 직계자손은 죽임을 당하고, 형제의 자식들은 먼지방의 노비가 되었다고 『세조실록』에 기록하고 있어 이때 양양관노가 된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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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억봉의 적보(출처-간송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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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양문화원 대금반



◈ 허억봉(許億鳳)은 10대 중반에 대금 연주에 능하여 악공에서 일약(一躍) 장악원(掌樂院)에 불려가 최고 지휘자인 전악(典樂)으로 십 수 년을 재직하며 16세기 조선의 음악계에 대단한 명성을 떨쳤다. 정사룡(鄭士龍,1561)이 예조판서 시 장악원 첨정 안상의 주도로 만든 금합자보의 대금악보를 허억봉이 만들었다. 허균(許筠)은 자신의 문집『성소부부고(惺所覆●藁)』에 악공(樂工)가운데 허억봉(許億鳳)이란 사람이 있어 대금을 잘 불었는데···
라며 세상의 태평한 물물을 보았다. 라 기록하였다. 양양문화원에서는 허억봉 선양사업으로 2017년부터 대금강좌를 개설하였다.


◈ 1596년 선조 29년 이전에는 소솔령(所率嶺)이라 부른 것을 오색령(五色嶺)으로 개칭, 지금까지이어 지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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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색령



◈ 1609년 양양부(襄陽府)에는 8월 25일 미시(未時)에 품관(品官)인 전문위(全文緯)의 집 앞에 세숫대야처럼 생긴 것이 나타나, 땅에 내릴 듯 하더니 곧 올라갔는데, 우레 소리가 몇 번 나더니, 북을 치는 것 같은 소리가 나다가 그침.
《별에서 온 그대》는 1609년 음력 8월 25일 강원도에서 미확인 비행물체가 목격 되었다는〈광해군일기〉의 기록을 소재로한 공상 과학 SF 로맨스 드라마로 SBS에서 2013년 12월 18일부터 2014년 2월 27일까지 방영된 바 있음.


◈ 1628년 양양부사 조위한(趙緯韓)이 노경복·최정립·이현일 등과 상의 조산리에 조인벽의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충현사(忠賢祠)를 설립, 위패를 모시고 동명서원(東溟書院)이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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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양읍 조산리 동명서원



◈ 1666년과 1683년에 강릉·원주에서 각각 강상죄 발생으로 강원도의 도호(道號)를 양양의‘양’자를 넣어 2회 개칭하였음.


原襄道          江襄道



◈ 1682년 숙종 8년에 양양부사 최상익이 양양읍 구교리의 향교를 지금의 자리(林泉里)로 이건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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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양향교 대성전과 명륜당



◈ 1709년 양양부사 이해조(李海朝)는 김창흡(金昌翕)과 현산삼십경(峴山三十景) 시(詩)를 읊었는데 일명 양양별곡 이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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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조의 현산 30경(영)



◈ 1727년 유경시(柳敬時)는 양양부사 재임시부터 교학(敎學)에 힘쓰시면서 선정(善政)한 공로로 양양주민이 낙산사 이화정 앞 오동나무로 만든 거문고인 양양금(襄陽琴)을 제작 기증한 것을, 경상북도는 유형문화재 제314호로 지정, 창랑보(滄浪譜,악보)와 함께 안동시 소재‘한국국학진흥원 유교박물관’에 소장 전시 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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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시 소재 양양금



◈ 1800년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은 양양부사로 봉직할 당시 희대(稀代)의 목민관으로 공직기강확립과 이용후생의 생태정신을 발현 황장목 판교(黃腸木板橋)를 놓았고, 양양에서 녹봉은 1만 2천량을 받았는데“양양의 아름다운 산과 바다에서 1만 냥을 받았고 녹봉으로 2천 냥을 받았다”는 경관녹봉론(景觀祿俸論)을 제시해 세간의 관심을 모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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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암 박지원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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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암집



◈ 1896년 고종 33년에 13도제가 실시되면서 행정구역 명칭이 강릉부 양양군에서 강원도 양양군으로 개칭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