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 3.1만세 운동사

Ⅴ.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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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064회 작성일 2019-10-24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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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결론



양양은 우수한 문화와 오랜 역사를 간직한 고을이다. 고대사회부터 자연의 풍요로움과 기후가 온화하여 풍속이 순박하고 낙천적이고, 문학과 예술을 숭상하여 공동체를 이루며 생활해 왔다.
정명 600년의 역사 깊은 고장으로 동북아 최고의 선사 유적지가 있고, 삼국시대부터 불교의 성지이고 화랑들의 중심수련장이었다. 오늘날은 동해의 중심지역으로 미래 산업의 중심지로 발돋움 하고 있다.
신라는 불교국가로 통일을 위한 중심인 양양에는 우수한 불교문화와 유적이 전해오고 있다. 불교의 一心으로 하나 된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였다. 화랑의 중심수련장으로 화랑교육에서 알 수 있듯이 의리와 충절의 고장, 문화예술의 고장,관광의 고장으로 예부터 사랑을 받아 왔다.


양양은 고요하면서도 열정적인 고을로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에서 가장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이는 양양인의 전통과 역사와 풍속에 서 찾아 볼 수 있다.
만세운동은 양양인의 정당한 주장으로 당위성을 강조하였다. 신분, 계층, 종교, 남녀노소 관계없이 하나 되어 민족자존과 양양인의 자존심을 지키려고 일어선 항일저항운동으로 양양인의 숭고한 정신이다.
일제의 기록에의하 면 1919년 4월 3일부터 4월 9일까지1주일 동안7개면 1백 32리 중 6개면82리에 4서천6백 명이 참가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하지만 실제로 1만5000여 명 이상이 참가한 저항운동으로 12명이 순국하였고, 172명이 체포되어 75명이 옥살이를 하였다.그리고 많은 지사들이 태형이나 장독(杖毒)으로 죽고 심한 고통으로 일생을 보내기도 하였다.


양양의 만세운동은 유림과 마을 구장이 중심이 되어 체계적이고 구체적으로 진행하 여 초기에일경 은 항복을 하는 등 속수무책이었다. 또한 양양의 교육기관인 현산학교와 쌍천서숙과 그리고 종교인들이 만세운동의 중심으로 그 역할을 다 하였다. 그리고 만세운동 이 후 신문명을 교육하여 양양문화에지 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양양인의 자긍심을 갖게 하였다.


양양 만세운동은 충절과 의리의 고장답게 가장 치열하였다. 어느 지역에서도 볼 수없는 우리나라 3‧1독립만세운동의 정신을 보여준 진수였다. 전 군민이 하나 된 만세운동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민족 자존심과 양양인의 정신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양양군민의 단합된 모습은 양양인의 새로운 역사와 군민이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