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 3.1만세 운동사

(2) 개인별 공적(가나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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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150회 작성일 2019-10-25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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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산여(康山汝)


양양군 사람이다.그는1919년 4월 4일 양양읍 장날을 기하여 일어난 양양면, 서면, 손양면민의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이 운동은3월말 경 조화벽을 통해서 교회 청년 김필선에게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자 김필선을 비롯한 교회의 청년들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만세시위였다. 4일 각 마을의 주민은 책임자의 인솔아래 양양읍으로 들어가는 5개의 중요한 통로를 따라 양양 장터로 모여들었는데, 이들은 집을 떠날 때는 장꾼으로 떠나서 장터에가 는 도중 또는 장터에도 착하여 만세군중으로 변하였다. 만세군중은 옥양목으로 만든 큰 태극기를 앞세우고 행진하며 거리마다 독립선언서를 뿌리고 울분에 찬 독립만세를 계속 소리높이 외쳤다.만세시위는 하루 종일 계속되었는데, 군중의 일부는 돌아가기도 하고 새로이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또 한 식구끼리 교대로 참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날이 어두워지자 낮에는 쫓겨 숨어있던 경찰이 총을 쏘기 시작하였다.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사망하고 부상당하였다.그는 체포되어 1919년4월28일 함흥지방법원 강릉지청에서 태형 60대를 선고받고 고통을 치렀다.


◆ 참고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2권 614~616면, 독립운동사 자료집(국가보훈처) 14집 979면



○ 강춘실(姜春實)


양양군 현북면 사람이다. 현북면에는 4월 7일과 9일 사이에만세 운동이 있었는데, 7일의 운동은 9일로 계획 되어 있던 현북면 전체의 만세운동이 미리 탄로됨으로 인해 박규병‧ 박용규‧ 이성윤 등이 협의하여 부근의 원일전리‧ 장리‧ 도리의 주민만을 모아 300여명이 만세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그는 소위 ‘기사문 운동’이라 하는4월9일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운동은 양양군내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던 운동으로서 기독교인과 유학자 그리고 각 마을의 구장이 삼위일체가 되어 전개한 대규모의 운동이었다. 4월 9일 하광정리 면사무소에 모인 1천여 명의 군중은 만세를 부르고 기사문리에있 는 주재소로 향하였다.군중은 길가의 가로수 받침대를 뽑아들고 혹은 장작, 돌 등을 들고 하광정리에서 1km 정도 떨어져 있는 주재소에이르러 대한제국만세를 일제히 외쳤다. 이 때 미리 와서 군중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던 일군과 경찰이 발포하여 9명이 사망하고 20여명이 부상당하였다. 강춘실도 이 때 부상을 당하여 고통을 치렀다.


◆ 참고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2권626면



○ 고을주(高乙柱)


양양군 도천면 논산리 사람이다. 그는 당시 구장으로서 김주철‧황명찬‧박명원 등 다른 구장들과 함께 1919년 4월 8일 논산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들은 집집마다 한 명씩 동원한 농민과 어린이들을 이끌고 대포리 주재소로 가려고 하였으나 부월리 앞에서 면사무소의 회계서기 김우규가 만류하여 그곳에서 만세시위를 하고 돌아갔다. 그는 이일로 태형 90대를 받는 고초를 겪었다.


◆ 참고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2권619면



○ 김경도(金敬道)


양양군 강현면 주청리 사람이다.그는1919년 4월5일과6일 양일 동안 주청리 주민을 이끌고 도천면과 강현면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강현면과 도천면의 만세운동은 이국범과 이능렬이 추진하였는데, 그들은 4월 5일 강현면 물치 장날에만세 운동을 일으키기로 하고 각 마을에 책임자를 두어 태극기를 만들어 주민들을 동원하도록 하였다. 4월 5일 강현면의 물치장터에 모인 군중은 강현면 사무소와 장터에서 큰 태극기를 높이 세우고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후 만세를 높이 외쳤다. 오후에 는대포리 주재소로 가서 이미 모여 있던 도천면민과 합류하여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에 경찰이 완전히 굴복하여 사죄하자 군중은 다음날 양양읍으로 가서 다시 운동을 벌이기로 하고 일단 해산하였다. 4월 6일 도천면과 강현면의 주민은 삼베에 도시락을 싸서 망태에 넣어 걸머지고 양양읍에 모여 손양면의 군중과 합세하였다. 만세군중은 기세가 더욱 올라갔으나 경찰서장이 일본은 물러갈 터이니 만세만 부르고 돌아가 달라고 애원하여 결국 무력을 쓰지 않고 만세시위만 벌이고 저녁에 해산하였다. 그는 그 후 체포되어 1919년4월21일 함흥지법 강릉지청에서 징역10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 참고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2권 617면, 독립운동사 자료집(국가보훈처) 14집 977면



○ 김경숙(金敬淑)


양양군 서면 용천리 사람이다. 1919년 4월 4일 양양읍 장날을 기하여 양양면, 서면, 손양면 주민의 독립만세운동이 있었다.이 운동은3월 말경 조화벽이 김필선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자 김필선을 비롯한 교회의 청년들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만세 시위였다. 각 마을의 군중은 책임자의 인솔 하에양양 읍으로 들어가는5개의 중요한 통로를 따라 양양 장터로 모여들었는데 이들은 집을 떠날 때는 장꾼으로 떠났지만 장터에 가는 도중, 또는 장터에가서 만세군중으로 변하였다. 그는 당시 구장이던 노병우와 최명옥의 지도를 받으며 서면 용천리 군중과 함께 양양읍 서남쪽 길을 따라 장터로 들어갔다. 만세군중은 옥양목으로 만든 큰 태극기를 앞세우고 행진하며 거리마다 독립 선언서를 뿌리고 울분에 찬 독립만세를 계속 소리 높이 외쳤다. 만세시위는 하루 종일 계속되었는데, 날이 어두워지자 낮에는 쫓겨 숨어 있던 경찰이 총을 쏘기 시작하여 수 많은 사람들이 부상당하였다.김경숙도 이때 부상을 당하여 고통을 치렀다.


◆ 참고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2권616면



○ 김규용(金圭容)


당시19세. 양양군 양양면 서문리 사람이다.1919년4월초 최인식‧김재구‧김계호‧ 김필선 등과 함께 4월 4일 양양읍 장날을 기해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하고 김필선이 근무하던 면사무소의 등사기를 이용하여 독립선언서를 복사하고 성남동 뒤에 있는 곳집에 숨어서 태극기를 만들었다.또 때마침3월 삼짇날이라 삼짇날의 율계를 가장하고 이교완 ‧ 이건충의 집 등 몇 곳에 서 수십 명이 모여 대량의 태극기를 만들고, 한편 다른 마을로 보내기도 하며 만세준비를 하였다.그러던 중 일이 탄로나 이건충의 집에 서만들던 사람들은 체포되었고, 체포되지 않은 사람들은 다시 김종태의 집으로 옮겨 밤새 계속 준비하였다. 4월 4일 양양읍 장날을 기해 읍으로 통하는 5개의 도로를 따라 각 지역담당 지도자들의 지휘아래 장꾼을 가장한 군중들이 수천 명 모여 계획적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하니 장터는 태극기와 만세소리로 가득 찼고 독립선언서가 거리마다 뿌려졌다. 어둠이 깔리자 낮에는 숨어있던 경찰이 어둠을 이용해서 총을 쏘기 시작하였으므로 사망자가 속출하였고 부상자도 수없이 많았으며, 또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다.그는 체포된 후1919년 5월 31일 경성 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혐의로 징역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 참고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612, 613면, 독립운동사 자료집(국가보훈처) 14집 976면



○ 김대광(金大光)


양양군 사람이다.그는1919년4월 5, 6일 이틀동안 도천면과 강현면의 주민이 연합하여 일으킨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강현면과 도천면의 만세운동은 이국범과 이능렬이 추진했는데, 그들은 4월 5일 강현면 물치 장날에만 세운동을 일으키기로 하고 각 마을에 책임자를 두어 태극기를 만들며 주민을 동원하도록 하였다. 4월 5일 오전 강현면의 군중은 물치장터에 모여 강현면 사무소와 장터에 서큰 태극기를 높이 세우고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후 만세를 소리높이 외치며 시위를 하였고, 도천면의 군중은 경찰 주재소가 있는 대포리로 모여 만세시위를 하였다. 오후에는 강현면민이 대포리 주재소로 가서 이미 모여 있던 도천면민과 합세하여 계속 시위하니 이에경 찰이 완전히 굴복하여 사죄하자 군중은 다음날 양양읍으로 가서 운동을 펴기로 하고 해산하였다. 6일 도천면과 강현면의 주민은 삼베에도시 락을 싸서 망태에 넣어 걸머메고 양양읍에 모여 손양면의 군중과 합세하였다. 만세군중은 기세가 더욱 올라갔으나 경찰서장이 일본은 물러갈 터이니 만세만 부르고 돌아가 달라고 애원하여 결국 무력을 쓰지 않고 만세시위만을 펴고 저녁때 해산하였다.그는 이때 체포되어1919년 4월 21일 함흥지방법원 강릉지청에서 징역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 참고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2권 616~619면, 독립운동사 자료집(국가보훈처) 14집 977면



○ 김대선(金大先)


양양군 강현면 물치리 사람이다.그는1919년 4월 5, 6일 이틀 동안 도천면과 강현면의 주민이 연합하여 일으킨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강현면과 도천면의 만세운동은 이국범과 이능렬이 추진했는데, 그들은 4월 5일 강현면 물치 장날에만 세운동을 일으키기로 하고 각 마을에 책임자를 두어 태극기를 만들며 주민을 동원하도록 하였다. 그는 김두영‧ 박제범과 함께 물치리의 주민을 이끌고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4월 5일 강현면의 물치장터에 모인 군중은 강현면 사무소와 장터에 서큰 태극기를 높이 세우고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후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오후에 는대포리 주재소로 가서 이미 모여 있던 도천면민과 합세하여 만세시위를 하였다. 이에경 찰이 완전히 굴복하여 사죄하자 군중은 다음날 양양읍으로 가서 운동을 펴기로 하고 해산하였다. 6일 도천면과 강현면의 주민은 삼베에 도시락을 싸서 망태에 넣어 걸머메고 양양읍에 모여 손양면의 군중과 합세하였다. 만세군중은 기세가 더욱 올라갔으나 경찰서장이 일본은 물러갈 터이니 만세만 부르고 돌아가 달라고 애원하여 결국 무력을 쓰지 않고 만세시위만을 펴고 저녁때 해산하였다.


◆ 참고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2권617면



○ 김두선(金斗善)


양양군 사람이다.그는1919년 4월 4일 양양읍 장날을 기하여 일어난 양양면, 서면, 손양면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이 운동은 3월말 경 조화벽을 통해서 교회청년 김필선에게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자 김필선을 비롯한 교회의 청년들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만세시위였다. 4일 각 마을의 주민은 책임자의 인솔아래 양양읍으로 들어가는 5개의 중요한 통로를 따라 양양장터로 모여들었는데, 이들은 집을 떠날 때는 장꾼으로 떠나서 장터에가 는 도중 또는 장터에도 착하여 만세군중으로 변하였다. 그는 김주호‧ 김봉운‧ 김주열과 함께 읍내에서 아침 일찍부터 읍 부근의 주민을 지도하여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만세군중은 옥양목으로 만든 큰 태극기를 앞세우고 행진하며 거리마다 독립선언서를 뿌리고 울분에 찬 독립만세를 계속 소리높이 외쳤다. 만세시위는 하루 종일 계속되었는데, 군중의 일부는 돌아가기도 하고 새로이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또한 식구끼리 교대로 참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날이 어두워지자 낮에는 쫓겨 숨었던 경찰이 총을 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사망하고 부상당하였다.


◆ 참고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2권614면



○ 김두칠(金斗七)


양양군 현북면 어성전리 사람이다. 현북면에서는 4월 7일과 9일 사이에만세운 동이 있었는데, 7일의 운동은 9일로 계획 되어 있던 현북면 전체의 만세운동이 미리 탄로됨으로 인해 박규병‧ 박용규‧ 이성윤 등이 협의하여 부근의 원일전리, 장리, 도리의 주민만을 모아 300여명이 만세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그는 소위 ‘기사문 운동’이라 하는 4월 9일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운동은 양양군내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던 운동으로서 기독교인과 유학자 그리고 각 마을의 구장이 삼위일체가 되어 전개한 대규모의 운동이었다. 그는 어성전리의 구장으로서 태극기를 만드는 등 만세운동을 추진하는데 큰 힘을 발휘하였다. 4월 9일 하광정리 면사무소에 모인 1천여 명의 군중은 만세를 부르고 기사문리에있 는 주재소로 향하였다. 군중은 길가의 가로수 받침대를 뽑아들고 혹은 장작,돌 등을 들고 하광정리에서1km 정도 떨어져 있는 주재소에 이르러 ‘대한제국만세’를 일제히 외쳤다. 이 때 미리 와서 군중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던 일군과 경찰이 발포하여9명이 사망하고20여명이 부상당하였다.


◆ 참고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2권624면



○ 김봉구(金奉九)


양양군 현북면 사람이다. 현북면에는 4월 7일과 9일 사이에만세 운동이 있었는데, 7일의 운동은 9일로 계획 되어 있던 현북면 전체의 만세운동이 미리 탄로됨으로 인해 박규병‧ 박용규‧ 이성윤 등이 협의하여 부근의 원일전리,장리,도리의 주민만을 모아 300여명이 만세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그는 소위‘기사문 운동’이라 하는 4월 9일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운동은 양양군내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던 운동으로서 기독교인과 유학자 그리고 각 마을의 구장이 삼위일체가 되어 전개한 대규모의 운동이었다. 4월 9일 하광정리 면사무소에 모인 1천여 명의 군중은 만세를 부르고 기사문리에있는 주재소로 향하였다. 군중은 길가의 가로수 받침대를 뽑아들고 혹은 장작, 돌 등을 들고 하광정리에서1km 정도 떨어져 있는 주재소에이 르러 ‘대한제국만세’을 일제히 외쳤다. 이 때 미리 와서 군중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던 일군과 경찰이 발포하여9명이 사망하고20여명이 부상당하였다.김봉구도 이 때 부상을 당하여 고통을 치렀다.


◆ 참고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2권626면



○ 김봉도(金鳳道)


양양군 사람이다. 그는 1919년 4월 4일 양양읍 장날을 기하여 일어난 양양면, 서면, 손양면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이 운동은3월말 경 조화벽을 통해서 교회청년 김필선에게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자 김필선을 비롯한 교회의 청년들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만세시위였다. 4일 각 마을의 주민은 책임자의 인솔아래 양양읍으로 들어가는 5개의 중요한 통로를 따라 양양장터로 모여들었는데, 이들은 집을 떠날 때는 장꾼으로 떠나서 장터에가는 도중 또는 장터에 도착하여 만세군중으로 변하였다. 만세군중은 옥양목으로 만든 큰 태극기를 앞세우고 행진하며 거리마다 독립선언서를 뿌리고 울분에 찬 독립만세를 계속 소리높이 외쳤다.만세시위는 하루 종일 계속되었는데, 군중의 일부는 돌아가기도 하고 새로이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또 한 식구끼리 교대로 참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날이 어두워지자 낮에는 쫓겨 숨었던 경찰이 총을 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사망하고 부상당하였다.그는 이때 체포되어 1919년 4월 21일 함흥지방법원 강릉지청에서 징역1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 참고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14집 976면



○ 김봉운(金鳳運)


양양군 사람이다. 1919년 4월초 그는 김필선‧김재구‧김규용‧김계호‧김주호 등과 함께 4월 4일 양양읍 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하고 김필선이 근무하던 면사무소의 등사기를 이용하여 독립선언서를 복사하고 성남동 뒤에있는 곳집(상여 보관처)에 숨어서 태극기를 만들었다.또, 때마침3월삼짇날이라, 삼짇날의 율계를 가장하고 이교완 ‧ 이건충의 집 등 몇 곳에 서 수십 명이 모여 대량의 태극기를 만드는 한편 다른 마을로 보내기도 하며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그러던 중 일이 탄로나 이건충의 집에서 만들던 사람들은 체포되었고 체포되지 않은 사람들은 다시 김종태의 집으로 옮겨 밤새 계속 준비하였다. 4월 4일 양양읍 장날을 기해 읍으로 통하는 5개의 도로를 통하여 각 지역담당 지도자들의 지휘아래 장꾼을 가장한 군중들이 수천여명 모여 계획적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하니 장터는 태극기와 만세소리로 가득 찼고 독립선언서가 거리마다 뿌려졌다 어 . 둠이 깔리자 낮에는 숨어있던 경찰이 어둠을 틈타 총을 쏘기 시작하여 사망자가 속출하였고 부상자도 수없이 많았으며, 또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다.


◆ 참고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2권612면



○ 김석희(金錫熙)


양양군 현북면 사람이다. 1919년 4월 9일 유학자 박원병 ‧ 박규병 형제와 감리교회의 청년 오세옥‧이응렬 그리고 임병익‧오정현 등이 힘을 모아 추진한 소위 ‘기사문운동’ 에마 을 구장으로서 참가하여 큰 힘을 발휘하였다. 4월9일 주민을 인솔하여 하광정리 면사무소에 서1 여천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를 부르고 기사문리 주재소를 공격하기 위하여 주재소로 향하였다.주재소로 행진하며 가로수 받침대,장작, 돌 등을 들고 주재소에이르 러‘대한민국만세’를 일제히 부를 때 경찰의 발포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 참고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2권626면



○ 김승식(金昇式)


양양군 사람이다.그는1919년 4월 5, 6일 이틀 동안 도천면과 강현면의 주민이 연합하여 일으킨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강현면과 도천면의 만세운동은 이국범과 이능렬이 추진했는데, 그들은 4월 5일 강현면 물치 장날에만세 운동을 일으키기로 하고 각 마을에 책임자를 두어 태극기를 만들며 주민을 동원하도록 하였다. 4월 5일 오전에는 강현면의 물치장터에 모여 강현면 사무소와 장터에 서큰 태극기를 높이 세우고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후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며 시위를 하였고, 도천면의 군중은 경찰 주재소가 있는 대로피로 모여 만세시위를 하였다. 오후에는 강현면민이 대포리 주재소로 가서 이미 모여 있던 도천면민과 합세하여 계속 시위를 하니 이에경 찰이 완전히 굴복하여 사죄하자 군중은 다음날 양양읍으로 가서 운동을 펴기로 하고 해산하였다. 6일 도천면과 강현면의 주민은 삼베에 도시락을 싸서 망태에 넣어 걸머메고 양양읍에 모여 손양면의 군중과 합세하였다. 만세군중은 기세가 더욱 올라갔으나 경찰서장이 일본은 물러갈 터이니 만세만 부르고 돌아가 달라고 애원하여 결국 무력을 쓰지 않고 만세시위만을 펴고 저녁때 해산하였다.그는 이때 체포되어1919년 4월 21일 함흥지방법원 강릉지청에서 징역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 참고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2권 616~619면, 독립운동사 자료집(국가보훈처) 14집 977면



○ 김암이(金岩伊)


양양군 사람이다. 그는1919년 4월 4일 양양읍 장날을 기하여 일어난 양양면, 서면, 손양면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이 운동은3월말 경 조화벽을 통해서 교회청년 김필선에게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자 김필선을 비롯한 교회의 청년들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만세시위였다. 4일 각 마을의 주민은 책임자의 인솔아래 양양읍으로 들어가는 5개의 중요한 통로를 따라 양양장터로 모여들었는데, 이들은 집을 떠날 때는 장꾼으로 떠나서 장터에가는 도중 또는 장터에 도착하여 만세군중으로 변하였다. 만세군중은 옥양목으로 만든 큰 태극기를 앞세우고 행진하며 거리마다 독립선언서를 뿌리고 울분에 찬 독립만세를 계속 소리높이 외쳤다.만세시위는 하루 종일 계속되었는데, 군중의 일부는 돌아가기도 하고 새로이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또 한 식구끼리 교대로 참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날이 어두워지자 낮에는 쫓겨 숨었던 경찰이 총을 쏘기 시작하였다.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사망하고 부상당하였다.그는 체포되어 1919년4월28일 함흥지방법원 강릉지청에서 태형 60대를 선고 받고 고통을 치렀다.


◆ 참고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2권 616~619면, 독립운동사 자료집(국가보훈처) 14집 979면



○ 김영경(金英經)


양양군 도천면 사람이다.그는 강현면의 장세환과 함께 1919년 4월 5일에독립만 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고 중도문리 일대의 주민을 선동하며 계획을 추진하였다. 4월 5일 대포리에 모인 도천면민을 지휘하여 만세를 부르고 오후에는 강현 면민과 합세하여 헌병주재소 주변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했다.이어서6일에는 양양 읍으로 가서 제지하는 경찰을 물리치고 경찰서에서 만세를 부르며 시위하다 저녁때 해산하였다. 그 후 체포되어1919년 4월 21일 함흥 지방법원 강릉지청에서 징역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 참고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2권 616면, 독립운동사 자료집(국가보훈처) 14집 977면
매일신보 1919. 5. 3.



○ 김원식(金元植)


양양군 강현면 침교리 사람이다. 1919년 4월 4일 도천면 중도문리 이종국의 방에서 이능렬 ‧ 이형우와 함께 태극기 2폭을 작성하고 5일 봉현면 물치 시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한 후 주민들을 선동하였다. 5일 정오 물치 시장에 서수백 명의 군중을 지휘하여 태극기를 세우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후 약 20정 거리인 도천면 대포 경찰주재소 부근에 이르러 다시 독립만세를 외쳤다. 다음 6일은 양양읍으로 가서 오후1시경 사람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1919년 6월 14일 경성 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혐의로 징역1년4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 참고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2권 617면, 독립운동사 자료집(국가보훈처) 5집 975 ‧ 976면
독립운동사 자료집(국가보훈처)14집 977면



○ 김응옥(金應玉)


양양군 현북면 사람이다. 현북면에는 4월 7일과 9일 사이에만세 운동이 있었는데, 7일의 운동은 9일로 계획 되어 있던 현북면 전체의 만세운동이 미리 탄로됨으로 인해 박규병‧ 박용규‧ 이성윤 등이 협의하여 부근의 원일전리, 장리, 도리의 주민만을 모아 300여명이 만세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그는 소위 ‘기사문운동’이라 하는 4월 9일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운동은 양양군내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던 운동으로서 기독교인과 유학자 그리고 각 마을의 구장이 삼위일체가 되어 전개한 대규모의 운동이었다. 4월 9일 하광정리 면사무소에 모인 1천여 명의 군중은 만세를 부르고 기사문리에있는 주재소로 향하였다. 군중은 길가의 가로수 받침대를 뽑아들고 혹은 장작, 돌 등을 들고 하광정리에서1km 정도 떨어져 있는 주재소에이 르러 대한제국만세를 일제히 외쳤다. 이 때 미리 와서 군중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던 일군과 경찰이 발포하여 9명이 사망하고20여명이 부상당하였다. 김응옥도 이 때 부상을 당하여 고통을 치렀다.


◆ 참고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2권626면



○ 김익렬(金益烈)


양양군 현북면 상광정리 사람이다. 1919년 4월 9일 양양읍 장날을 기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여 마을 구장으로서 운동을 추진시키는데 큰 힘을 발휘하였다. 9일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양양 장터로 가려고 면사무소 주위에 모여 일단 만세시위를 벌인 뒤 계획을 변경하여 관할 주재소를 공격하기로 하고 가로수 받침대, 장작, 돌 등을 들고 ‘대한제국만세’를 부르며 행진 중 경찰의 발포로 해산하였다. 1919년 11월 12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 참고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2권 624면, 독립운동사 자료집(국가보훈처) 14집 984면



○ 김재구(金在龜)


당시20세.양양군 양양면 남문리 사람이다. 1919년4월초 최인식‧김재구‧김계호‧ 김필선 등과 함께 4월 4일 양양읍 장날을 기해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하고 김필선이 근무하던 면사무소의 등사기를 이용하여 독립선언서를 복사하고 성남동 뒤에 있는 곳집(상여 보관처)에 숨어서 태극기를 만들었다. 또 때마침 3월 삼짇날이라 삼짇날의 율계를 가장하고 이교완 ‧ 이건충의 집등 몇 곳에 서 수십 명이 모여 대량의 태극기를 만들고,한편 다른 마을로 보내기도 하며 만세준비를 하였다.그러던 중 일이 탄로나 이건충의 집에 서 만들던 사람들은 체포되었고, 체포되지 않은 사람들은 다시 김종태의 집으로 옮겨 밤새 계속 준비하였다. 4월 4일 양양읍 장날을 기해 읍으로 통하는 5개의 도로를 따라 각 지역담당 지도자들의 통솔아래 장꾼을 가장한 군중들이 수천 명 모여 계획적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하니 장터는 태극기와 만세소리로 가득 찼고 독립선언서가 거리마다 뿌려졌다. 어둠이 깔리자 낮에는 숨어있던 경찰이 어둠을 이용해서 총을 쏘기 시작하여 사망자가 속출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당하였고 체포되었다.김재구는1919년 경성 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 참고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612면, 독립운동사 자료집(국가보훈처) 5집 974 ‧ 975면



○ 김종대(金鍾大)


양양군 현북면 상광정리 사람이다. 1919년 4월 9일 현북면 만세운동에박 원병 ‧ 오세옥 ‧ 이응렬 등과 함께 참여하여 연락을 담당하였다.하광정리 면사무소에 모인1천여 명의 군중과 만세를 부르고 기사문리 헌병 주재소로 가 만세를 부르며 공격하였다.
1919년 11월 12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10월 벌금 30원의 판결을 받았다.


◆ 참고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2권 624면, 독립운동사 자료집(국가보훈처) 14집 983면



○ 김주열(金周烈)


양양군 양양면 월리 사람이다.그는1919년 4월 4일 양양읍 장날을 기하여 일어난 양양면, 서면, 손양면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이 운동은3월 말경 조화벽을 통해서 교회청년 김필선에게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자 김필선을 비롯한 교회의 청년들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만세시위였다. 4일 각 마을의 주민은 책임자의 인솔아래 양양읍으로 들어가는5개의 중요한 통로를 따라 양양장터로 모여들었는데,이들은 집을 떠날 때는 장꾼으로 떠나서 장터에가는 도중 또는 장터에 도착하여 만세군중으로 변하였다. 그는 김주호‧ 김봉운‧ 김두선과 함께 읍내에서 아침 일찍부터 읍 부근의 주민을 지도하여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만세군중은 옥양목으로 만든 큰 태극기를 앞세우고 행진하며 거리마다 독립선언서를 뿌리고 울분에 찬 독립만세를 계속 소리높이 외쳤다.
만세시위는 하루 종일 계속되었는데, 군중의 일부는 돌아가기도 하고 새로이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또 한 식구끼리 교대로 참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날이 어두워지자 낮에는 쫓겨 숨었던 경찰이 총을 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사망하고 부상당하였다.


◆ 참고문헌
독립운동사, 2권 614면



○ 김주철(金周哲)


양양군 도천면 논산리 사람이다. 그는 당시 황명찬‧ 박명원‧ 고을주 등 다른 구장들과 함게 1919년 4월 8일 논산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들은 집집마다 한 명씩 동원한 농민과 어린이들을 이끌고 대포리 주재소로 가려고 하였으나 부월리 앞에서 면사무소의 회계서기 김우규가 만류하여 그곳에서 만세시위를 하고 돌아갔다. 그는 이 일로 태형 90대를 받았다.


◆ 참고문헌
독립운동사2권619면



○ 김주호(金周鎬)


1919년 4월초 김필선‧ 김재구‧ 김규용‧ 김계호‧ 김봉운 등과 힘을 모아 4월 4일 양양읍 장날을 기해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고 면사무소의 등사판을 이용해 독립선언서를 복사하고 숨어서 태극기를 만들며 준비하였다. 4월 4일 아침부터 양양읍내와 부근의 남문리,군향리,구교리,서문리,성내리,청곡리 주민을 동원하여 만세를 부르기 시작하였다.점심때가 되어서는 만세군중이 더욱 불어나1천여 명이 넘는 군중과 종일 만세를 부르고, 저녁때부터는 돌과 몽둥이를 들고 군청과 경찰서를 때려부수는 등 무력항쟁을 하였다. 1919년 4월 21일 함흥지방법원 강릉지청에서 징역 8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 참고문헌
독립운동사2권612면, 독립운동사 자료집14집976면



○ 김태선(金泰善)


1919년 4월 5, 6일 이틀간 이국범‧이능렬‧김영영 장세환 등이 추진한 양양읍 만세운동에 참가하여 김원식과 침교리의 주민동원을 책임지고 태극기를 만들며 준비하였다. 5일주민을 이끌고 물치장터에서 강현면 전체에서 모인 군중과 독립선언식을 갖고 만세를 부른 후 오후에 는 대포리로가 도천면민과 합세하여 만세를 불렀다. 6일은 도시락을 싸가지고 양양읍으로가 만세를 불렀다. 1919년4월 21일 함흥 지방법원 강릉지청에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는 1929년 5월 1일 옥천동 권오훈의 집에 서결성된 강릉농업학교 독서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독서회는 ①사회과학 및 일반서적을 습득하여 교양을 높인다. ②일제 식민교육정책에반대 한다. ③ 일제를 타도하고 조선독립을 쟁취한다는 강령을 중심으로 매주 모임을 갖고 토론회를 열었으며 뜻있는 날에는 애국 전단을 요소에 붙여 민중의 민족적 자극을 촉진하였다. 1933년 6월에 는 평소 한국학생에게 모멸적인 언사를 사용하는 교사와 교사의 배척문제를 주도하여 전교생이 동맹휴학에이르게 까지 하였다.


◆ 참고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9권 695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21∽123면



○ 남순극(南淳極)


양양군 서면 용천리 사람이다.그는1919년 4월 4일 양양읍 장날을 기하여 일어난 양양면, 서면, 손양면민의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운동은 3월말 경 조화벽을 통해서 교회청년 김필선에게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자 김필선을 비롯한 교회의 청년들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만세시위였다. 4일 각 마을의 주민은 책임자의 인솔아래 양양읍으로 들어가는5개의 중요한 통로를 따라 양양 장터로 모여들었는데, 이들은 집을 떠날 때는 장꾼으로 떠나서 장터에가는 도중 또는 장터에 도착하여 만세군중으로 변하였다. 그는 당시 구장이던 노병우와 최명옥의 지도를 받으며 서면 용천리의 군중과 함께 양양읍 서남쪽 길을 따라 장터로 들어갔다. 만세군중은 옥양목으로 만든 큰 태극기를 앞세우고 행진하며 거리마다 독립선언서를 뿌리고 울분에 찬 독립만세를 계속 소리높이 외쳤다. 만세시위는 하루 종일 계속되었는데, 군중의 일부는 돌아가기도 하고 새로이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또 한 식구끼리 교대로 참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이런 가운데 날이 어두워지자 낮에는 쫓겨 숨어있던 경찰이 총을 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사망하고 부상당하였다. 남순극도 이 때 부상을 당하여 고통을 치렀다.


◆ 참고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2권614면



○ 노병우(盧炳禹)


양양군 서면 용천리 사람이다.그는1919년 4월 4일 양양읍 장날을 기하여 양양면, 서면, 손양면민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이 운동은 3월말 경 조화벽을 통해서 교회청년 김필선에게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자 김필선을 비롯한 교회의 청년들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만세시위였다. 4일 각 마을의 주민은 책임자의 인솔아래 양양읍으로 들어가는5개의 중요한 통로를 따라 양양 장터로 모여들었는데,이들은 집을 떠날 때는 장꾼으로 떠나서 장터에가는 도중 또는 장터에 도착하여 만세군중으로 변하였다. 그는 당시 구장으로서 최명옥과 함께 용천리의 주민을 인솔하여 양양읍 서남쪽 길을 따라 장터로 들어갔다. 만세군중은 옥양목으로 만든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행진하며 거리마다 독립선언서를 뿌리고 울분에 찬 독립만세를 계속 소리높이 외쳤다. 만세시위는 하루 종일 계속되었는데, 군중의 일부는 돌아가기도 하고 새로이 참여하기도 하였으며,또 한 식구끼리 교대로 참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이런 가운데 날이 어두워지자 낮에는 쫓겨 숨어있던 경찰이 총을 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사망하고 부상당하였다. 노병우도 이 때 부상을 당하여 고통을 치렀다.


◆ 참고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2권613∽616면



○ 노용수(盧龍秀)


그는 1919년4월4일 양양읍 장날을 기하여 양양면,서면,손양면민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이 운동은3월 말경 조화벽을 통해서 교회청년 김필선에게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자 김필선을 비롯한 교회의 청년들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만세시위였다. 4일 각 마을의 주민은 책임자의 인솔아래 양양읍으로 들어가는 5개의 중요한 통로를 따라 양양 장터로 모여들었는데, 이들은 집을 떠날 때는 장꾼으로 떠나서 장터에가는 도중 또는 장터에 도착하여 만세군중으로 변하였다. 그는 박춘실과 함께 서면 상평리와 북평리 주민을 인솔하여 양양읍 서쪽 길을 따라 장터로 들어갔다. 만세군중은 옥양목으로 만든 큰 태극기를 앞세우고 행진하며 거리마다 독립선언서를 뿌리고 울분에 찬 독립만세를 계속 소리높이 외쳤다.만세시위는 하루 종일 계속되었는데,군중의 일부는 돌아가기도 하고 새로이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또 한 식구끼리 교대로 참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날이 어두워지자 낮에는 숨어있던 경찰이 총을 쏘기 시작하였다.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사망하고 부상당하였다.


◆ 참고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2권613면



○ 문달문(文達文)


양양군 양양면 사람이다. 그는1919년 4월 4일 양양읍 장날을 기하여 양양면, 서면, 손양면민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이 운동은3월말 경 조화벽을 통해서 교회청년 김필선에게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자 김필선을 비롯한 교회의 청년들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만세시위였다. 4일 각 마을의 주민은 책임자의 인솔아래 양양읍으로 들어가는 5개의 중요한 통로를 따라 양양 장터로 모여들었는데,이들은 집을 떠날 때는 장꾼으로 떠나서 장터에가 는 도중 또는 장터에 도착하여 만세군중으로 변하였다. 만세군중은 옥양목으로 만든 큰 태극기를 앞세우고 행진하며 거리마다 독립선언서를 뿌리고 울분에 찬 독립만세를 계속 소리높이 외쳤다.만세시위는 하루 종일 계속되었는데,군중의 일부는 돌아가기도 하고 새로이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또 한 식구끼리 교대로 참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날이 어두워지자 낮에는 숨어있던 경찰이 총을 쏘기 시작하였다.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사망하고 부상당하였다.그는 체포되어 1919년4월28일 함흥지방법원 강릉지원에서 태형 60을 선고받고 고통을 치렀다.


◆ 참고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2권 614∽616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14집 979면



○ 문종희(文鍾熙: 1902~1919.4.9)


현북면 기사문리 만세고개 기념탑의 사망자 명단 등 현재까지 기록상 문종상(文鍾祥)으로 표기되어 있으나,2018년 양양문화원부설향토사연구소에서 조사한 결과 문종상은 1912년 출생(1919년당시8세)하여1979년까지 생존하였으며, 문종상의 형 문종희는 1902년 출생으로 남편문씨 족보에1919년4월9일 현북면 만세운동 당시 기사문리 만세고개에서 일경이 발포한 총상으로 현장에서 사망하였다는 기록을 확인하여, 기존의 만세고개 사망자가 문종상이 아닌 문종희로 밝혀졌으므로 2018년 11월 독립유공자 신청(문종희)을 하였음.
다음은 기사문리 만세운동 중 왜경에의해 피살된 문종희가 문종상으로 잘못 등재 되어 현재까지 유공자로 선정(행세)되어 온 사실을 바로 잡고자 그의 후손들로부터 조사한 자료를 소개한다.
양양군에서는 2000년3월1일 만세고개에만3세‧1 운동 유적지를 조성하고 기념탑 조형물을 세웠는데, 당시 사망자 9명의 명단 중에문 종상(文鍾祥:현북면 말곡리)이 기록되어 있었으나 당시 아들 문철수(文哲洙:양양읍 구교리 거주72세)는 그 사실을 알지못했다.
2018년 3월 1일 충렬사3‧1운동기념식장에 참석한 문철수는 무엇인가 잘 못되었음을 처음으로 인지하고, 2018년 10월 23일 본 연구원과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① 문철수(文鍾祥의 子)의 인터뷰


○본인에대 하여 간단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제 이름은 문철수(文哲洙)이며,1947년 12월 10일생으로 우리 나이로 일흔 두 살이고, 양양군 손양면 우암리에서 출생하여 손양초등학교(손양면 소재)를 졸업하고, 현재는 양양군 양양읍 구교 2리 에 서 살고 있습니다.


○문종상(文鍾祥)과는 어떤 관계인지요.?
▷ 제 아버지이며3남1녀중2남입니다.


○아버지의 생년, 몰 연월일과 아버지는 몇 형제였는지요?
▷ 아버지는 1912년 10월 15일 현북면 말곡리에서 출생하셨고, 1979년3월7일 양양읍 구교1리 에 서돌아가셨습니다.아버지는 6형제 중 막내인데 제일 큰아버지는 문종석(文鍾錫),둘째는 종각(鍾珏), 셋째는 종희(鍾熙),넷째는 종하(鍾夏), 다섯째는 종열(鍾烈),여섯째가 제 아버지로 종상(鍾祥)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여섯 형제 중 후손은 저 밖에없고 큰아버지들의 후손도 현재는 한 분도 없습니다.


○아버지(鍾祥) 형제분들의 1919년 3‧1만세운동에 대하여 아시는 대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1919년 4월 9일 양양군 현북면 만세운동 때 아버지의 연세는 1912년생으로8살이었으며, 종희(鍾熙)큰아버지는19세였고, 종석 큰아버지는 23세었다고 하는데요, 당시 아버지는 어린나이에도 형님들을 따라 만세운동 대열 후미에 따라갔다고 아버님이 생전에 말씀하였습니다. 만세를 외치며 기사문리 고개를 넘자 언덕 아래에서 갑자기 총소리가 나더니 많은 사람들이 죽어 쓰러지고 난리가 나서 너무 무섭고 놀라서 근처 소나무 숲에 숨어 있다 날이 어두울 무렵 집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 날이 어두워지자 아버지는 막내 할아버지와 함께 여기저기에쓰러 져있는 많은 시신 중 큰아버지의 시신을 찾아 가마니에 둘둘 말아 지게에지 고 오셔서 대치리 산에 매장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후일 저도 종희 큰아버지의 산소를 가본적이 있어 묘지가 있는 곳을 알고 있습니다. 후손이 없어 많이 훼손되었으리라 봅니다. 그래서 종희 큰아버지는 만세고개 만세운동 중 사망하신 걸로 알고 있으며, 종석 큰아버지는 만세고개 만세운동 후 일본경찰에 잡혀서 함흥 교도소에서 6개월 복역을 하셨다고 하며,그 후 일본 경찰이 무서워서 저희 아버지와 함께 기차를 타고 중국 하얼빈으로 도망을 갔다고 합니다.그곳에 서3 쯤년살다 우리 아버지는 고향으로 돌아 오셨고, 종석 큰아버지는 하얼빈에 서 사시다 그곳에서 돌아가시고 후손이 없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만세고개 기념탑에 사망자로 기록된 사실은 언제 알게 되었나요?
▷ 제가 농사일에바 쁘고 먹고살기 어렵다 보니 관심을 가지지 못하였는데 금년 2018년3‧1절날 충렬사 기념행사에 갔다가 양양문화원 향토사연구원 김양식님과 만세운동 관련 대화중에처 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만세고개 만세운동 중 일경의 총에 맞아 사망하신분이 아버지 문종상이 아니고 문종희 큰아버지였다는 것이 확실한가요?
▷ 저는 아버지로부터 만세운동을 할 무렵 아버지의 연세는 8살로 어린 나이였고, 당시 19세인종희 큰아버지가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종희 큰아버지 묘소도 제가 알고 종석 큰아버지는 함흥 교도소에서 형을 살고 나와서 하얼빈에 서 살다 돌아가셨으니까요.


○집에만 세운동과 관련하여 가지고 계신 물품이 있는지요?
▷ 아버지께서 만세운동 당시에사 용했다고 하는 태극기와,책자,조선팔도 지도에 초서로 쓴 지도, 아버지께서 받은 여러 상장 등이 커다란 박스에 꽉 채워져 있었는데, 지난 80년대 쯤 폭우로 집이 빗물과 흙으로 범벅이 되자,별거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버렸는데 너무 아쉽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보고들은 이야기가 있으면 해주시죠.
▷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아버지께서는 양양군에 서3‧1절 행사 때 마다 두루마기를 입고 나가시는 것을 많이 보았고, 행사에가시 면 자주 상을 받아 오셨는데 큰 박스에 보관 하다가 폭우에 젖어 버린 것이 너무 안타까우며 지금 남아 있는 자료는 없습니다.


○아버지 형제 세분이 만세운동 현장에 계셨는데 국가로부터 포상을 받은 분이 계시는지요.
▷ 아버님은 생전에 표창을 여러 번 받았는데 훈장은 받지 못했습니다. 현재 후손이라고는 저 밖에없고,그동안 먹고살기 힘들어서 지금까지 잘 모르고 있었고, 아버지는 참 훌륭한 분이라 것 외에 는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왔으니 안타깝습니다.


○더 하실 말씀이 있는지요?
▷ 양양문화원에서 지역 향토사를 연구하시는 분들을 만났으니, 이제라도 기사문리 만세고개 만세운동이 무엇이 진실인지 사실대로 밝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네, 지금까지 협조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2018. 10. 23
조사자:양양문화원부설 향토사연구소 연구원 김양식, 김광영



② 문복수(文鍾熙조카)인터뷰


1919년 4월 9일 현북면 기사문 만세운동은 동년 4월 4일부터 일어난 양양 3‧1만세운동 중 마지막 날이자 인명 피해가 가장 컸다. 이날 현북면 군중은 양양 장에가서 만세운동을 하기로 계획하고 하광정리에있 는 현북면사무소 앞에 모였다.
당시 현북면 각 마을에서 모여든 만세군중은 한창 농번기에도 불구하고 남녀노소 부녀자는 물론 어린 아이들까지도 주먹밥을 싸가지고 와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기사문리 관고개(만세고개)를 넘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감지하고 미리 잠복 중이던 일경(군)이 일제히 사격을 하자, 순식간에 군중의 선두에서는 신음소리와 함께 현장에서9명이 사망하고20여명이 쓰러지면서 피바다가 되었다.
양양군에서는 2000년3월1일 만세고개에만3세‧1 운동 유적지를 조성하고 기념탑 조형물을 세웠는데, 당시 사망자 9명의 명단 중에문 종상(文鍾祥:현북면 어성전리)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후손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본인에대 하여 간단히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 제 이름은 문복수(文福洙)이며,1962년 12월 14일생으로 우리 나이로 57살이고, 양양군 현북면 말곡리에서 출생하여 현북초등학교와 현북중학교, 강릉농공고를 졸업하고,현재까지 양양군 현북면 말곡리에서 농사일을 하며 거주하고 있습니다.


○문종석(文鍾錫),문종희(文鍾熙)와는 어떤 관계이며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알고 있는 내용이 있는지요.?
▷ 큰 댁 큰아버지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하며 문종석 큰아버지는 만세운동 때 징역살이를 했다고 어렴풋이 들었으며, 문종희 큰아버지는 만세운동 때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남평 문씨 족보 초보를 가지고 계신다면서요?
▷ 네 가지고 왔습니다.
<이때 문복수가 제출하는 남평 문씨 족보 초보를 받아 복사 하다.>


○이 족보 초보는 언제 누구로부터 받은 것인가요?
▷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초보에년甲午年(1954)이라고 되어있는 것을 보면1954년에 만든 것으로 알고 있으며 저희 아버지가 현재 82세인데 아직 살아 계시며 아버지가 소유하고 있던 것입니다.아버지께서 병제(秉濟)할아버지가 쓰셨다고 하셨습니다.


○족보 초보에대하 여 더 하실 말씀이 있는지요?
▷ 네,초보를 아버지로부터 받았는데 내용이 궁금한데 알 수가 없어서,2016년 1월에 양양문 화원을 찾아가서 해석해 주실 분을 요청하여 번역을 해 주셔서 알게 되었습니다.그때 문화원에 서 한시(漢詩) 선생님을 하시는 분(이종우 한시교실 강사)을 소개해 주셔서 그 선생님께 부탁을 하여 번역본을 받아 보게 됐습니다.


○더 하실 말씀이 있는지요?
▷ 네, 저희 조상님들에대 하여 저희는 한 일이 없는데 저희를 대신하여 깊이 조사를 해 주셔서 조상님들의 공적을 알게 되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감사합니다.


○네, 지금까지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018. 11. 13
조사자:양양문화원부설 향토사연구소 연구원 김양식, 김광영




○ 박경화(朴京化)


양양군 서면 용천리 사람이다.그는1919년 4월 4일 양양읍 장날을 기하여 양양면, 서면, 손양면민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이 운동은 3월 말경 조화벽을 통해서 교회청년 김필선에게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자 김필선을 비롯한 교회의 청년들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만세시위였다. 4일 각 마을의 주민은 책임자의 인솔아래 양양읍으로 들어가는5개의 중요한 통로를 따라 양양 장터로 모여들었는데,이들은 집을 떠날 때는 장꾼으로 떠나서 장터에가는 도중 또는 장터에 도착하여 만세군중으로 변하였다. 그는 당시 구장이던 노병우와 최명옥의 지도를 받으며 서면 용천리의 군중과 함께 양양읍 서남쪽 길을 따라 장터로 들어갔다. 만세군중은 옥양목으로 만든 큰 태극기를 앞에 세우고 행진하며 거리마다 독립선언서를 뿌리고 울분에 찬 독립만세를 계속 소리높이 외쳤다. 만세시위는 하루 종일 계속되었는데,군중의 일부는 돌아가기도 하고 새로이 참여하기도 하였으며,또 한 식구끼리 교대로 참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이런 가운데 날이 어두워지자 낮에는 쫓겨 숨어있던 경찰이 총을 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사망하고 부상당하였다.박경화도 이 때 부상을 당하여 고통을 치렀다.


◆ 참고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2권616면



○ 박관홍(朴寬弘)


양양군 사람이다.그는1919년 4월 5, 6일 이틀 동안 도천면과 강현면의 주민이 연합하여 일으킨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강현면과 도천면의 만세운동은 이국범과 이능렬이 추진했는데, 그들은 4월 5일 강현면 물치 장날에만세 운동을 일으키기로 하고 각 마을에 책임자를 두어 태극기를 만들며 주민을 동원하도록 하였다. 4월 5일 오전에는 강현면의 군중은 물치장터에 모여 강현면 사무소와 장터에 서큰 태극기를 높이 세우고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후 만세를 외치며 시위하였고, 도천면 군중을 경찰주재소가 있는 대포리로 모여 만세시위를 하였다. 오후에는 강현면민이 대포리 주재소로 가서 이미 모여 있던 도천면민과 합세하여 계속 시위하니 이에경 찰이 완전히 굴복하여 사죄하자 군중은 다음날 양양읍으로 가서 운동을 펴기로 하고 해산하였다. 6일 도천면과 강현면의 주민은 삼베에 도시락을 싸서 망태에 넣어 걸머메고 양양읍에 모여 손양면의 군중과 합세하였다. 만세군중은 기세가 더욱 올라갔으나 경찰서장이 일본은 물러갈터이니 만세만 부르고 돌아가 달라고 애원하여 결국 무력은 쓰지 않고 만세시위만을 펴고 저녁때 해산하였다.그는 이때 체포되어1919년 4월 21일 함흥지방법원 강릉지청에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 참고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2권 161∽619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14집 977면



○ 박명원(朴明元)


양양군 도천면 논산리 사람이다. 그는 당시 구장으로서 김주철‧황명찬‧고을주 등 다른 구장들과 함께 1919년 4월 8일의 논산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들은 집집마다 한 명씩 동원한 농민과 어린이들을 이끌고 대포리 주재소로 가려고 하였으나 부월리 앞에서 면사무소의 회계서기 김우규가 만류하여 그 곳에서 만세시위를 하고 돌아갔다. 그는 이 일로 태형 90대를 맞는 고초를 겪었다.


◆ 참고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2권619면



○ 박성문(朴成文)


양양군 사람이다. 그는 1919년4월4일 양양읍 장날을 기하여 양양면, 서면, 손양면민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이 운동은3월말 경 조화벽을 통해서 교회청년 김필선에게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자 김필선을 비롯한 교회의 청년들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만세시위였다. 4일 각 마을의 주민은 책임자의 인솔아래 양양읍으로 들어가는 5개의 중요한 통로를 따라 양양장터로 모여들었는데, 이들은 집을 떠날 때는 장꾼으로 떠나서 장터에가는 도중 또는 장터에도 착하여 만세군중으로 변하였다.
만세군중은 옥양목으로 만든 큰 태극기를 앞세우고 행진하며 거리마다 독립선언서를 뿌리고 울분에 찬 독립만세를 계속 소리높이 외쳤다. 만세시위는 하루 종일 계속되었는데 군중의 일부는 돌아가기도 하고 새로이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또 한 식구끼리 교대로 참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날이 어두워지자 낮에는 쫓겨 숨어있던 경찰이 총을 쏘기 시작하였다.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사망하고 부상당하였다. 그는 체포되어 1919년 4월 28일 함흥지방법원 강릉지청에서 태평 90대를 선고받고 고통을 치렀다.


◆ 참고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2권 614~616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집 979면



○ 박순범(朴淳範)


양양군사람이다. 그는1919년4월 5, 6일 이틀 동안 도천면과 강현면의 주민이 연합하여 일으킨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강현면과 도천면의 만세운동은 이국범과 이능렬이 추진했는데, 그들은 4월 5일 강현면 물치 장날에만 세운동을 일으키기로 하고 각 마을에 책임자를 두어 태극기를 만들며 주민을 동원하도록 하였다. 4월 5일 오전에는 강현면의 군중은 물치 장터에 모여 강현면 사무소와 정터에서 큰 태극기를 높이 세우고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후 만세를 외치며 시위하였고, 도천면 군중을 경찰주재소가 있는 대포리로 모여 만세시위를 하였다. 오후에는 강현면민이 대포리 주재소로 가서 이미 모여 있던 도천면민과 합세하여 계속 시위하니 이에경 찰이 완전히 굴복하여 사죄하자 군중은 다음날 양양읍으로 가서 운동을 펴기로 하고 해산하였다. 6일 도천면과 강현면의 주민은 삼베에 도시락을 싸서 망태에 넣어 걸머메고 양양읍에 모여 손양면의 군중과 합세하였다. 만세군중은 기세가 더욱 올라갔으나 경찰서장이 일본은 물러갈터이니 만세만 부르고 돌아가 달라고 애원하여 결국 무력은 쓰지 않고 만세시위만을 펴고 저녁때 해산하였다.그는 이때 체포되어1919년 4월 21일 함흥지방법원 강릉지청에서 징역 8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 참고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2권 614∽616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14집. 979면



○ 박왕근(朴旺根)


양양군 사람이다. 그는1919년4월4일 양양읍 장날을 기하여 일어난 양양면, 서면, 손양면민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이 운동은3월 말경 조화벽을 통해서 교회 청년 김필선에게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자 김필선을 비롯한 교회의 청년들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만세시위였다. 4일 각 마을의 주민은 책임자의 인솔아래 양양읍으로 들어가는 5개의 중요한 통로를 따라 양양 장터로 모여들었는데,이들은 집을 떠날 때는 장꾼으로 떠나서 장터에가 는 도중 또는 장터에 도착하여 만세군중으로 변하였다. 만세군중은 옥양목으로 만든 큰 태극기를 앞세우고 행진하며 거리마다 독립선언서를 뿌리고 울분에 찬 독립만세를 계속 소리높이 외쳤다. 만세시위는 하루 종일 계속되었는데, 군중의 일부는 돌아가기도 하고 새로이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또 한 식구끼리 교대로 참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날이 어두워지자 낮에는 쫓겨 숨어있던 경찰이 총을 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사망하고 부상당하였다. 그는 체포되어 1919년4월28일 함흥지방법원 강릉지청에서 태형90을 선고받고 고통을 치렀다.


◆ 참고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2권 614∽616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14집 979면



○ 박용규(朴容圭)


양양군 현북면 원일전리 사람이다. 1919년 4월 7일 박규병 ‧ 이성윤과 함께 원일전리, 장리, 도리의 주민3백여 명을 모아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다. 7일아침 주민을 인솔하여 태극기를 앞세우고 서면 용천리와 양양면 임천리로 행진하며 만세를 부르고 양양읍으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남대천을 사이에 두고 군대와 경찰이 완강히 저지하므로 들어가지 못하고 경찰을 향하여 감금 자를 석방하라고 외치며 만세시위를 하였다. 1919년 4월 21일 함흥 지방법원 강릉지청에서 징역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 참고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2권 623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집 977면



○ 박용기(朴容琦)


양양군 현북면 원일전리 사람이다.현북면에서는1919년 4월 7일과 9일에독 립만세운동이 있었다. 7일의 운동은 9일로 계획되어 있던 현북면 전체의 만세운동이 미리 발각됨으로 인해 박규병 ‧ 박용규‧ 이성윤 등이 협의하여 부근의 원일전리, 장리, 도리의 주민만을 모아 300여명이 만세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그는 소위‘기사문 운동’이라고 하는4월9일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운동은 양양군내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던 운동으로서 기독교인과 유학자 그리고 각 마을의 구장들이 삼위일체가 되어 전개한 대규모의 운동이었다. 그는 원일전리의 구장으로서 태극기를 만드는 등 만세운동을 추진하는데 큰 힘을 발휘하였다. 만세운동은 계획대로 추진되어 4월 9일 하광정리 면사무소에 모인 1천여 명의 군중은 소리 높여 만세를 부르고 기사문리에 있는 주재소로 향하였다. 군중은 길가의 가로수 받침대를 뽑아 들고 혹은 장작, 돌 등을 들고 하광정리에서 1km정도 떨어져 있는 주재소에이르러 ‘대한제국 만세’를 일제히 외쳤다. 이 때 미리 와서 군중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던 일제의 군인과 경찰이 발포하기 시작하여9명이 사망하고20여명이 부상당하였다.


◆ 참고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2권624면



○ 박의병(朴義秉)


양양군 서면 용천리 사람이다. 그는1919년 4월 4일 양양읍 장날을 기하여 일어난 양양면, 서면 손양면민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운동은 3월말 경 조화벽을 통해서 교회 청년 김필선에게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어 김필선을 비롯한 교회의 청년들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만세시위였다. 4일 각 마을의 주민은 책임자의 인솔아래 양양읍으로 들어가는5개의 중요한 통로를 따라 양양 장터로 모여들었는데, 이들은 집을떠날 때는 장꾼으로 떠나서 장터에가는 도중 또는 장터에 도착하여 만세군중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