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 3.1만세 운동사

(1) 양양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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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117회 작성일 2019-11-04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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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인과 양양면 만세군중 300여명이합세하여 양양장터에서 만세를 불렀다. 양양의 천도교는 1869년에 김경서(金慶瑞),최혜근(崔惠根)이 경상도 영양군 일월산에있는 최시형(崔時亨)에 게 다녀왔다.최시형은 그해3월부터1870년 10월까지 양양 산중에 은거하면서 포교하였는데 동학에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김덕중의 집에 잠시 머물다가 인제 귀둔리로 떠났다. 그 후 1908년 4월경에천도 교 회당 1개소에 교구장 및
교역자2명과 신도213명으로 창립하였다.


당시에신 분이 확실 치 않는 손양면 간리 권병연, 서면 상평리 박춘실, 도천면 논산리 손계원은 엿장수나 술장사를 하면서 살았고, 서면 조개리 구룡령 산기슭에사는 지석화도 양양 만세운동에적 극적으로 참여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의병이나 천도교인으로 유추된다고 하겠다.


당시의 강원도장관의 전화보고문은 다음과 같다.


“양양군7일 오후 2시 반 천도교도(七日午後二時半天道敎徒)를 중심(中心)으로 약 3백명(約三百名)의 군중(群衆)이 운동(運動)을 개시(開始)하여 양양읍내(襄陽邑內)에 압기(押奇)하여 부수모자 4명(付首謀者四名)을 체포(逮捕)하여해산(解散)시켰다.”13)


4월6일 서면 조개리 지석화는 상평리 김학구의 장례식에 먹을 음식100여 명분을 준비하여 걸어서 왔다가 일경에체 포되자 다음날 7일에는 천도교인들이 양양장터에 모여 거세게 항거하면서 만세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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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Ⅱ,7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