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 3.1만세 운동사

(1) 양양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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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199회 작성일 2019-11-05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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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면 4월 3일은4월4일부터9일까지 독립 만세 운동을 위해 면과 마을 책임자는 철저하게 준비하였다.
양양면은 최인식이 주도가 되어 감곡리, 거마리, 임천리, 청곡리, 서문리, 남문리, 사천리 등지의 청년층을 대표로 뽑아 연락책으로 삼았다.특히 감곡리 이상온은 정손리, 청곡리, 감곡리, 강현면 금풍리, 사교리, 방축리, 적은리, 물갑리, 둔전리, 간곡리 등지를 다니며 군중을 동원하고,집에서 태극기 제작을 책임졌다.
감리교인으로 면사무소 급사였던 김필선은 면사무소의 등사기로 종이와 옥양목에다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등사했다. 김필선 외에도 김주호, 김계호, 김재구, 이원도, 이원희, 김두선, 이두형, 김규용은 성내리 뒷산 곳집(상여보관소)에서 태극기를 만들며 4월 4일 장날 만세운동을 준비하였고,임천리는 이현철,김형진, 이건충 각자 집에서 태극기를 만들었다.


4월3일 오후에성 내리 곳집에서 태극기를 만들던 청년 동지들은 1919년 4월 4일 양양장터의 독립만세운동 준비 마무리를 위해 임천리 이교완과 이교정 등의 집으로 옮겼다. 김필선, 김재구, 최인식 등은 옥양목으로 대형태극기를 만들고, 등사기로 태극기 문양을 백지에복 사하여 태극기를 수기로 만들었다.


최인식은 자리를 옮겨 뜻을 같이하는 김규용(金奎容)과 함께 임천리 이교정(李敎貞)의 집에 서 다시 태극기를 만들고 있던 중, 군속 심윤택이 눈치 채고 군수 이동혁(李東赫)이 일경들과 임천리 현장을 급습하였다.태극기 374매 및 제작도구인 등사기 등을 빼앗기고, 이석범 선생을 비롯한22명이붙잡혀 일경에연행되 었다.


양양군수 이동혁은 독립만세운동을 봉쇄하고자 4월 4일 양양 장을 철시하도록 명령하였다.


강원도장관(江原道長官)이 조선 총독부의 내무부장관에게 보낸 전화보고문은 다음과 같다.


“본일(本日)양양군(襄陽郡)에서 10~13명의 청년 집합(靑年集合)하여 태극기3백70매(三百七十枚)를 제(製)하고 있음을 발견(發見)압수(押收)하다.명일(明日)의 시일(市日)을 이용(利用)하여 사(事)를 양(揚)코져 한 계획(計劃)임과 여(如)하여 내(內) 유력(有力)한 면장(面長)도 가(加)하고 있는지 의심(疑心)있기로 경찰(警察)과 협의(協議)경계(警戒)중(中)”9)


이와 같이 사전에임천리 계획의 일부가 발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청년 동지 김계호, 최인식, 이원도 등 책임자들은 일경의 포위망을 벗어나 만세운동의 준비를 예정대로 강행하였다.


일단 나머지 인쇄물을 가지고 거마리 김종태의 집으로 본부를 옮기고, 다음 날의 만세운동을 위해 거마리 곳집(상여보관소)으로 옮겨 계속 태극기를 밤새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임천리에서도 최항식 등에의해서 계속 준비되었으며,마침내3‧1만세운동 당일까지 필요한 준비를 차질 없이 마칠 수 있었다. 성내리 뒷산의 곳집과, 감곡리의 이상온의 집에서 태극기를 만들었고, 마을마다 책임자가 있었기 때문에 일4 양 양장날 만세운동의 실행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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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Ⅱ,712-7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