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31호

8월 - 양양 3·1만세운동과 현산학교

페이지 정보

조회 987회 작성일 2020-02-05 17:59

본문

8월 - 양양 3·1만세운동과 현산학교



양양지방은 한반도 동해안 중심에 위치하면서, 양양의 진산인 설악산에서 남대천이 동해로 접하는 농촌지역으로, 동해를 접하고 있으나 어업이 발달하지 못하고 농업에 주력하여 농촌 중심으로 계 문화와 두레가 발
전하였다.
그러나 80%가 산악지대로 생활은 넉넉하지 못했으나 산수(山水)가 수려하여 풍요로운 마음으로 공동체를 이루면서, 나라에 변고가 생기면 애국 충정하는 충절의 고장으로, 기원전 예국(濊國) 때부터 문화와 예술, 가
무를 즐기면서 살아왔다.



일경의무차별총살로반일감정악화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국권을 빼앗기자 일제의 강압으로 농민들은 핍박으로 시달렸다.
1908년 6월 17일 한낮에 손양면 송전리 쌍호에 오리사냥을 나온 일본 순사가 집에서 베를 짜는 송전리 고씨 부인을 희롱하므로 마을 서당 훈장인 고익주가 분개하여 일본 순사를 꾸짖었다.
일본 순사는 소지한 총으로 그 자리에서 무참히 사살하였으며, 또한 이를 목격한 고혁주와 고광하도 항의하자 역시 차례로 사살하여 조용했던 마을에서 갑자기 3명이 숨지는 치욕적인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양양 농민들은 반일감정이 점차 높아져 갔으며 그 분노가 3·1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61).jpg


<남궁 억 선생 동상>




강원도최초의사립현산학교가설립되다


남궁억(南宮檍)은 1905년 12월 26일 양양군수로 임명받고 1906년 2월에 부임하였다. 이것이 양양에 일찍이 신문화 교육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남궁억은 근대의 대표적인 개화파 지식인으로 독립협회와 황성신문을 통하여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위해서는 민중의 자각과 교육을 통한 역량을 길러야 한다고 강조한 인물이었다.
남궁억은 부임하자 학교를 세우기 위해 기부금을 모으기로 하였다. 하지만 유교를 숭상하는 대부분의 지방 유림들은 비협조적 일수 밖에 없었다. 남궁억 군수는 국권 회복과 민족 부강을 위해서는 반드시 교육의 필요성을 호소하며, 본인의 사재(私財)와 문중을 설득하여 기부금을 모으니, 결국 유림에서도 1만량의 기금을 출연했고 이를 기본금으로 현산학교를 세웠다.
1906년 9월 8일 현산학교가 인가되었고, 1910년 4월 1일 양양공립보통학교로, 1951년 9월 1일 양양국민학교로, 1996년 3월 1일 양양초등학교로 그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100년이 넘는 역사를 계승한 영동지역의 초등교육의 산실인 것이다.
이렇게 강원도 최초의 사립학교인 현산학교를 세우고 학생을 모집하였으나 입학을 지원하는 학생이 없어 호별 방문을 통해 설득해 보았고, 자녀가 있는 집마다 의무적으로 한 명씩 학교에 강제로 보내도록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점차 고성과 강릉, 삼척 등 각 지역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모여들어 약 200여 명의 학생을 모집하게 되었고, 학제는 3학년 과정으로 학생들의 나이는 17~8세까지 상투를 튼 학생도 있었다.
남궁억 군수는 학생들에게 직접 영어와 음악을 가르쳤고 산수, 역사, 일어, 체조, 국문과 한문도 가르쳤다. 수업료는 없었고 공책과 연필을 무상으로 공급하였다.
국권갱생(國權更生)의 길은 오직 교육 밖에 없다며, 민족주의 정신을 함양시키는데 교육의 목표를 두고 구국교육을 실시하여 후일 양양 3·1만세운동의 큰 원동력이 되었다.


(62).jpg


<옛 현산학교 터>



현산학교출신들이만세운동의주역이되다.


양양 3·1만세운동 당시 남궁억 군수가 설립한 현산학교에서 신문화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각 마을 구장을 맡고 있었으며 또한 지역 유지로서 활동하고 하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3·1만세운동은 각 마을 마다 급속도로 조직화 되어 만세운동을 주도할 수 있었다.
유림 대표이며 3·1만세운동의 주모자인 이석범 선생은 양양보통학교(전 현산학교) 1회 졸업생인 최인식(崔寅植)을 계획에 참여시켜, 유림이 접근하기 힘든 청장년층과 농민, 종교인 그리고 각 마을 구장들과 신속히 연결되었다.


(64).jpg


<옛 현산학교 터 만세운동 재현>



같은 시기에 양양감리교회에서는 3월 하순 조화벽이 가지고온 독립선언서를 당시 교회 청년지도자이며 양양보통학교(전현산학교) 8회 졸업생인 김필선에게 전달되었다.
당시 양양보통학교 출신인 최인식, 김필선, 김계호, 김주호 등은 선후배 관계로 서로 연결되어 유림 세력, 감리교 세력과 그리고 민족의 독립을 열망하는 농민 세력과 서로 일치되어 연합 세력이 빠르게 형성되었다.
또한 양양 3·1만세운동에서 가장 장열(壯熱)하게 순국한 손양면 가평리 구장 함홍기(咸鴻基)는 양양보통학교(전 현산학교) 출신으로 양양면의 동창들과 각 마을 구장들과도 인맥이 폭 넓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렇게 양양 3·1만세운동은 남궁억 군수가 설립한 현산학교 졸업생들이 주도적으로 유림, 종교인, 농민들과 연합하여, 1919년 4월 4일부터 4월 9일까지 연인원 1만 5천여 명이 참여하여, 전국 지방에서는 그 유래가 없는 가장 극렬하고 조직적인 만세운동으로 기록되고 있다.


(63).jpg

<현산학교 졸업증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