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31호

7월 - 양양 3·1만세 운동과 종교계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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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064회 작성일 2020-02-05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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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 양양 3·1만세 운동과 종교계 활동



1919년 3·1만세운동 당시 양양군은 7개면으로, 상업의 중심지는 양양면 양양장터와 강현면 물치장터였다. 동해안을 따라 만들어진 도로는 교통수단으로 발달하지 못했고, 영서지방과의 교류는 오색령이나 구룡령 산길을 도보로 넘어 다녔다.
그러나 양양의 문호인 대포항에서 뱃길로 원산항을 거쳐 경원선 철도를 이용하여 경성(서울)으로 쉽게 오갔다. 또한 러시아 연해주까지도 연결되어 있어 대포항은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에 인근 마을에 있는 물치장터는 상업으로 크게 번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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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양양장터>



유교중심의유림사회가주도하다


당시 양양은 보수적인 경향이 강한 유림중심의 사회였다.
고려조부터 향교를 중심으로 한 유학의 고장으로, 유림들은 씨족과 집성촌을 이루며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중 대표적으로 임천리 함평이씨와 광주노씨, 손양면 수여리 전주이씨, 조산리 강릉최씨, 현남면 한양조씨 등이었다.
양양 3·1만세운동은 1919년 3월 말에 유림의 대표인 이석범(李錫範) 선생이 향리 10여 명과 함께 고종황제 인산(因山)에 참여 후 독립선언서를 몰래 숨겨 오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종교인, 양양보통학교 출신의 마을 구장들과 농민들을 규합하여 4월 4일부터 9일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조직적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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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물치장터>



기독교인이독립운동에참여하다


1901년 10월 5일 하디 선교사가 강원도에서는 최초로 양양면 성내리 17번지에 성내리교회(양양감리교회)를 설립한 후, 1908년 경 전도부인 백설화에 의해 양양면 조산리에 조산교회를 설립, 1910년 경에는 충청도에서 안순학이 강현면 물치리로 이사 오면서 물치교회를 설립하였으며, 또한 현북면 기사문리에서 태어난 이풍운 목사도 1910년 4월 5일 세례를 받고 현북면 상광정리에 광정교회를 설립하였다.
또 한편으로 양양감리교회 조영순 전도사의 딸 조화벽(趙和璧)은 1919년 3월 3일 개성 호수돈여학교 재학중에 비밀결사대원으로 어윤희, 권애라 등과 함께 개성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만세운동이 확산되자 3월 5일 휴교령이 내려졌고, 조화벽은 독립선언서를 버선목에 숨기고 경원선 열차로 원산을 거쳐 배편으로 고향인 양양 대포항으로 들어왔다.
대포항에 도착하자 일경은 소지물을 전부 압수하고 조사하였지만 가방 속에 숨겨온 독립선언서는 발각되지 않았다. 조화벽은 청년지도자인 김필선에게 독립선언서를 인계하고, 당시 유림의 지도자인 이석범 선생과 연결되어 만세운동을 함께 계획하였다.
그리고 양양교회 김영학 목사는 1918년부터 1922년까지 시무하면서 조산교회, 물치교회, 광정교회를 순행하며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또한 만세운동에 모인 군중들에게 일장연설을 하다가 일경에게 잡혀가 무수한 매를 맞고 서대문 감옥에서 6개월 간 복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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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양양감리교회>



민족대표만해한용운스님낙산사에기거하다


양양은 통일신라시대 이후 불국정토(佛國淨土)의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삼국시대 신라가 강성해 지면서 양양을 중심으로 불교의 성지로서 면모를 갖추었고 많은 사찰과 문화유적이 전해 오고 있다. 기미년 3·1독립만세운동 당시 양양의 신흥사에 원적을 둔 만해 한용운(萬海韓龍雲) 스님이 낙산사에 주소를 두고 기거하고 있었다.
그는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公約三章)을 기초하였고, 자주 독립을 위해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는 죽음을 무릅쓴 각오로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에 일경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르고 출옥 후에도 굴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4월 7일 만해 한용운의 민족정신에 감응된 낙산사 스님들은 저녁 술시정각(戌時正刻:오후 8시 정각)에 범종을 울리는 것을 신호로 고각에서는 법고소리를 계속 울렸다. 이에 모두 오봉산 정상에 올라 바라소리를 울리면서 횃불을 들고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에 이르도록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다시 절로 내려와서는 법당에서 자정까지 대한독립을 염원하는 불공을 올렸고, 각 면에서는 산위에서 봉화를 올려 전군민이 봉화를 바라보며 조선독립을 염원하는 만세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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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낙산사 의상대>



최재우가창시한동학사상이전파되다


양양의 천도교는 1860년 최재우(崔在宇)가 창시한 동학사상이 2대 교주인 최시영에 의해 전파되었다.
1869년에 김경서, 최혜근이 경상도 영양군 일월산에 있던 최시형에게 다녀온 그해 3월부터 1870년 10월까지 양양 산중에 은거하면서 포교하였다. 그 후 1908년 4월경에는 천도교 회당 1개소가 세워졌으며, 교구장 및 교역자 2명과 신도 213명으로 창립하였다.
만세운동 첫날인 4월 4일 오후에 경찰서장실에서 함홍기와 함께 뛰어 들어가 화로를 던지려던 간리의 권병연도 일경의 칼에 목을 맞아 쓰러졌는데, 당시 신분이 확실치 않던 권병연 외에도 서면 상평리 박춘실, 도천면 논산리 손계원, 서면 조개리 지석화는 모두 의병이나 천도교인으로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4월 6일 조개리 지석화는 상평리 김학구의 장례식에 먹을 음식 100여 명분을 준비하여 걸어서 왔다가 일경에 체포되자, 다음날 4월 7일 이에 격분한 천도교인들과 양양면 만세군중 300여 명이 합세하여 양양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만세를 크게 불렀다.



<당시일경이강원도장관의전화보고문은다음과같다.>


「양양군 7일 오후 2시 반 천도교도(七日午後二時半天道敎徒)를 중심(中心)으로 약 3백명(約三百名)의 군중(群衆)이 운동(運動)을 개시(開始)하여 양양읍내(襄陽邑內)에 압기(押奇)하여 부수모자 4명(付首謀者四名)을 체포(逮捕)하여 해산(解散)시켰다.”」라고 보고하고 있다.
위와 같이 양양 3·1만세운동은 유림 대표 이석범 선생과 기독교인 조화벽과 김영학 목사와 애국 독립사상을 가진 권병연과 지석화 같은 의병 출신이나 천도교인, 그리고 불교계의 거장 만해 한용운 스님 등 종교계의 걸출한 독립 운동가들이 목숨을 바친 구국운동으로 전국에서는 유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