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31호

16세기 명작 “호송설(護松說)”의 감동 / 이규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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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57회 작성일 20-02-06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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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교육]



제2차 향토문화교육(12월 5일)

16세기 명작 “호송설(護松說)”의 감동


강릉원주대학교|이규대 명예교수



1569년은 선조 임금이 왕위에 오른 지 2년이 되는 해이다. 이 해 어느 날 강릉지방의 양반가에서는 솔향(松香)이 짙게 배어나는 차상(茶床)을 앞에 놓고 두 사람이 만나고 있었다. 한사람은 이곳 성산면(城山面) 금산리(金山里) 양반가의 주인인 임경당(臨鏡堂) 김열(金說)이고, 또 한사람은 이 집을 방문한 율곡(栗谷) 이이(李珥)였다.
주위에서는 이 양반가를 임경댁(臨鏡宅)이라 불렀다. 주인의 호(號)가 임경당이었고 별채의 당호(堂號)가 또한 임경당이었다. 임경댁은 남향으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전형이었다. 뒷산인 정산(鼎山)에는 선대(先代) 분들이 식목한 소나무 숲이 울창하였고 집 앞에는 남대천이 흘렀다. 여기에 보(洑)를 설치하고 농수를 확보하여 문전옥답을 일구어 경제력도 갖추었다. 집주인은 강릉을 관향(貫鄕)으로 세거해 온 이 지역의 거성(巨姓)으로 학문에 정진하여 강릉처사(江陵處士)로 명망을 얻고 있었다.
율곡이 젊은 경세가(經世家)로서 명망을 얻고 있었다면 임경당은 향리(鄕里)에서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뜻을 두었던 처사로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비록 삶의 방식은 다를 수 있었지만, 이들은 자기의 자리에서 보다 인간적인 삶을 모색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율곡은 경세가로서 사회개혁을 강력하게 추구했고, 임경당은 향리에서 풍속을 교정하여 향풍(鄕風)을 진작(振作)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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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시 성산면 정산(鼎山) 아래 터 잡은 임경당>



이들의 개혁적 성향은 이른바 4대사화(四大士禍)를 경험하면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무오(戊午)·갑자(甲子)·기묘(己卯)·을사사화(乙巳士禍), 이 4차례에 걸친 정치적 사건으로 말미암아 너무도 많은 젊은 선비들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엄청난 희생을 치른 직후 그에 대한 반성과 재발방지를 위한 대안을 마련하려는 후폭풍이 몰아쳤고, 율곡 이이와 임경당 김열은 이러한 기류 속에서 자신들의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이 수차례의 커다란 정변(政變)을 격고 조선 사회에서는 이른바‘사림정치(士林政治)’가 구현되었고, 그것은 희생에 따른 정치적 대안으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사림정치의 본질은 도덕성과 명분론에 입각하여 공론을 형성하고 그것을 정치의 동력으로 삼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정치 주체인 사림(士林)들에게는 철저한 자기 수양에 기초한 도덕성 즉‘수기치인(修己治人)’이 요구되고 있었다.
이무렵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율곡 이이를 중심으로 조선 성리학(性理學)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고, 이로부터 학문하는 방법이 새롭게 모색되고 인간의 본성(本性)·심성(心性)을 다시 천착(穿鑿)하려는 풍토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른바 이기론(理氣論)과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을 둘러싼 논쟁이 그것이다.
이로부터 사림정치의 논리적·이론적 기반이 구축되고, 그것은 일차적으로 구습(舊習)을 타파하는 것으로 출발하여 인간의 본성과 심성(心性)에 대한 이해를 통해 보다 근원적인 해결책을 모색해 가는 있었다. 이러한 성향에서 처사와 경세가의 삶은 둘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처한 생활환경 속에서 그 주변으로부터 개혁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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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시 성산면 상(上) 임경당>



소나무 그늘이 짙게 드리워진 여름날 율곡이 임경당을 방문하였다. 이 무렵 율곡은 외교관으로 중국을 다녀왔다.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를 다녀 온 것이다. 그리고 국가사업인 실록(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다가 사직하고 향리(鄕里)인 강릉 오죽헌(烏竹軒)에 돌아와 잠시 머물고 있었다. 이번에 향리를 찾은 것은 이곳에 계시는 외할머니의 병환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간병하면서 위로하고자 하는 뜻에서 내린 결단이었다. 외할머니와 도타웠던 정리(情理)와 외손자 율곡의 지극한 효성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율곡의 사직(辭職)을 두고 정가(政街)에서는 설왕설래하고 있었다. 근친도 아닌 외할머니의 간병을 위해 사직한다는 것은 직무를 소홀히 하는 처사라는 것이다. 율곡에 대한 비난은 급기야 파직을 소청하는 지경으로까지 치닫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간쟁(諫諍)에도 불구하고 선조(宣祖) 임금은 비록 외할머니라 하더라도 정리가 도타우면 가능한 일이고, 효행에 관계된 일이라 파직할 것이 아니라는 뜻을 견지하였으니, 군신(君臣) 간에 두터운 믿음이 흐르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당시 율곡은 33세였고 임경당은 63세였으니, 이들의 만남은 잠시 고향을 찾은 율곡이 오랜만에 향리의 어른을 찾아뵙는 형식이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모두 강릉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성장하였다. 연치(年齒)로 보아 임경당은 출충한 문재(文才)를 타고난 율곡의 어린 시절을 익히 보아 왔을 터이고, 율곡은 성장하면서 학문과 인격을 갖추고 향리에서 명망을 얻고 있었던 임경당을 찾아뵙고 가르침도 받았을 법하다. 후세 사람들은 학문과 덕망으로 일가를 이룬 이들의 만남을“도의지교(道義之交)”라는 말로 기록하고 있다.
60대의 임경당이 30대의 율곡에게 던진 화두는 소나무였다. 물론 명나라를 다녀 온 여행담과 실록편찬 이야기도 중요한 화두였겠지만, 이 자리에서 율곡은 집주인인 임경당의 요청으로‘호송설’을 지었다. 이‘호송설’은 535자로 현재 가로 105cm, 세로 50.5cm의 목판으로 판각되어 가문의 보배로서 별채인 임경당에 게시되어 있다. 근년에는 송림이 우거진 강릉고등학교 교정에 그 원문과 번안문을 새긴 석비(石碑)가 세워졌고, 이제는 강릉 시정 당국으로부터“솔향강릉”이라는 도시 브랜드가 창출되면서 율곡이 지은‘호송설’은 다시 주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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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당에 게시된 호송설>



임경당 김열은 집 주위의 소나무를 바라보노라면 그것을 식목한 선조(先祖)들이 생각나고 사모하는 정이 생긴다고 하였다. 그리고 후손들도 당신의 이 같은 마음을 가져주기를 간절히 바라노라고 하였다. 임경당의 이 마음이 어찌 한갓 초목으로서 소나무를 보존하려는 뜻이었겠는가? 한 줄기의 소나무 가지에서도 선조들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효성을 자손들에게 일깨워 주고, 그 효성을 근본으로 삼아 백세토록 가업이 전승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이었다. 출사(出仕)를 접고 향리(鄕里)에 머무는 처사(處士)로서의 삶을 살아 온 임경당이었고 더욱이 63세의 연치였으니 이 같은 심정은 더욱 절실했을 것도 같다. 이런 심정으로 임경당은 자손 대대로 교훈으로 삼을 수 있는 몇 마디 말씀을 남겨주기를 율곡에게 부탁하고 있었다.
주인으로부터 뜻밖의 요청을 받은 율곡은 겸양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몇 마디 말이 어찌 도움이 되겠습니까? 부친의 뜻이 아들에게 전해지고 아들은 다시 그 뜻을 자손에게 전한다면 그 뜻은 반드시 백세토록 잊혀 지지 않을 것입니다. 말로써 가르치는 것은 몸으로써 가르치는 것만 못하고, 글로써 전하는 것은 마음으로써 전하는 것만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이렇듯 율곡이 사양하는 자세를 보이자 임경당은“보통 사람의 성품이란 경계하여 주면 양심이 일어나고 경계하여 주지 못하면 어두워지게 되나니, 나는 보통 사람을 계발시켜 어둡지 않게 하려는 것일 뿐이요.”라는 말로 글을 지어 주기를 재차 요청하였다.
아주 짧은 대화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누가 옳고 그르냐의 차원을 넘어서는 두 사람의 삶의 자세가 배어나고 있다. 중앙 조정에 출사(出仕)하여 구습(舊習)을 타파하고 국가 경영의 새로운 틀을 모색하려는 경세가(經世家)로서 율곡의 원칙론적 입장과 고향에 은둔하면서 향리(鄕里) 서민들의 생활 자세를 일깨우려는데 뜻을 두었던 처사(處士)로서 임경당의 실용적 입장이 대비될 수 있으며, 또한 30대 율곡의 강렬하고 직설적인 입장과 60대 임경당의 자애롭고 온유한 입장으로 대비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율곡은 임경당의 경륜과 인품에 감동하면서‘호송설’을 짓는 것으로 화답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심에 그분이 보시던 서책을 차마 읽지 못하는 것은 그분의 손때가 묻어 있기 때문이오, 어머니가 돌아가심에 그분이 손수 쓰시던 그릇을 감히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그분의 입김이 남아 있기 때문인데, 하물며 드리워져 있는 소나무는 선대에서 손수 심은 것이 아니던가? 비와 이슬을 머금고 생장하였고 서리와 눈으로 다져져 튼실하게 되었으니, 잠깐만 눈길이 스쳐도 감회를 일으켜 어버이 생각이 불현듯 나고, 비록 한 가지 한 잎의 작은 것이라도 상처나 해를 입지 않을까 삼가고 두려워하며 전전긍긍할 터인데 어찌 가지나 줄기를 범할 수 있겠는가? 진실로 짐승의 마음을 갖지 않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경계할 줄 알 것입니다.”라고 하여 늘 후손들을 염려하는 집주인의 걱정을 위로하고 있다.
그리고‘호송설’의 말미에서 율곡은 임경당의 처사적 삶에서 느낀 바가 매우 지대하였음을 강조하면서 후손들에게 경계하는 말을 남기고 있다. “선조들이 고생과 노력을 쌓아서 한 세대 30년을 기약하고서야 가업(家業)을 이루어지는 것인데, 자손이 불초(不肖)하면 가업이 무너지는데 한 해를 기다릴 것도 없다. 이 소나무를 북돋아 심은 지 수 십년을 기다려서야 비로소 큰 나무로 성장하였는데 도끼로 벤다면 하루아침에 다 없어질 것이니, 이 어찌 가업을 이루기는 어렵고 파괴하기는 쉬운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니겠는가!”
선조의 체취가 배어나는 소나무이다. ‘호송설’에 담아내려는 정신이 어찌 한갓 소나무에 머물겠는가! 소나무를 돌보는 것이 조상을 돌보는 것일 테고, 소나무를 올곧게 키워가는 것은 선조가 일구어 놓은 가업을 올곧게 승계하여 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호송설’은 선조를 사모하고 후손을 염려하면서 일구어 낸 삶의 방식을 인간 만사에서 제일의 가치로 규정하고, 이 방식을 삶의 지표로 삼아 가업을 계승하고 그 파급 효과를 일으켜 마을의 풍속을 진작하여 살맛나는 세상을 일구어 가려는 시대정신을 담고 있다.
이렇듯 1569년의 여름, 별채 임경당에서는 60대 처사와 30대 경세가의 만남으로 당대 최고의 삶의 가치를 함축적으로 담아내는‘호송설’이 잉태되고 있었다. ‘호송설’을 남기고 임경당을 돌아 나오는 율곡은 정산(鼎山)의 소나무를 바라보며 처사와 경세가의 삶이 둘일 수 없음을 생각하였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