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31호

[향토사료] 중국 전승 양양팔경가의 전파와 정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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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360회 작성일 2020-02-10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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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료]


중국 전승 양양팔경가의 전파와 정착



양양팔경가는 양양에서 전승된 신민요다.
이 민요는 발 없는 말처럼 흔적 없이 국경도 넘고 사상이나 이념을 초월하여 멀리 중국 땅 조선족 사회에 존재하고 있다. 1930년대 양양에서 불린 양양팔경가는 설악산 사진과 함께 현재 중국조선족 각종 민요집에 수록되어 있으며 특히 아래의 중국조선족 5학년 의무교육조선족 학교 음악교과서 하권(연변교육출판사 간행)에 실릴 정도로 조선족사회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노래가 중국 동북지역 뿐만 아니라 러시아 연해주와 중앙아시아까지 어떻게 퍼졌을까하는 궁금증이 남는다.
이 노래는 북한에서 불리다가 1970년대 가사만 개사되고, 곡조는 여전히 북녘땅에 남아 불리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필자가 만난 연변조선족작곡가에 의하면“양양팔경가는 곡조가 아름답고 가사가 단순하여 부르기쉬워 연변조선족까지 전파되고 초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된 것이 아닌가”라고 추정하였다.
양양팔경가의 존재성이나 강인한 전파력은 그것이 단순히 부르기 쉽다는 이유만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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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팔경가에 등장하는 팔경(八景)은 이른바 아름다운 8가지의 경치를 칭하는 것이나, 그 상징성은 우주의 삼라만상인 삼원(三元)과 오행(五行)을 합친 도교적 의미를 내포한 것으로 분석된다. 사방팔방(四方八方)의 용례와 같이 팔경문화는 시적(詩的) 자아를 중심으로 천지수(天地水) 삼원사상과 동서남북 중앙의 오행에 산재한 경관을 노래한 것들이다.
이를 중국의 소상팔경에서 유입된 것으로도 해석하나 한국인 나름의 팔경사상에 입각하여 자아의 관찰적 시점을 설정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강원도에는 그 유명한 관동팔경이 전해오고 있으나 그것은 여덟 가지의 어떤 대상을 한정하여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설정한 시점이나 관찰자의 시적해석에 따라 다름을 알 수 있다. 일례로 양양팔경가에는 관동팔경 가운데 양양 의상대와 고성 청간정이 들어 있는데 속초 청초호도 한때는 관동팔경에 들었다.
한편으로 지역에서는 여덟 가지의 빼어난 경관을 설정함으로써 경관에 대한 자긍심과 역사성, 향토성을 널리 알리고 자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결국 팔경은 단지 지역에 산재한 여덟 가지의 정태적(靜態的) 대상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여과된 시적자아의 동태적, 정서적, 감흥적 상황을 오감(五感)으로 수용하여 풀이한 것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실제로 귀로 듣는 빗소리나 종소리, 눈으로 보는 저녁노을 등의 자연현상이나 고깃배의 불빛이나 저녁 밥 짓는 연기 등 생활풍습, 아침 해와 저녁달 등 천제우주관이 들어간 것이 이를 방증한다.
따라서 양양팔경가는 양양지역의 빼어난 경관가운데 우수성을 담보하고 향토성을 선양할 대상을 선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컨대 과거 고성지역까지 양양지역에 속하였던 관계로 낙산사, 설악산 뿐 아니라 동해안, 하조대, 의상대, 청간정, 운봉산이 고루 가사에 적용되고 있음이 그러하다.
따라서 현재의 시점에서 지역선양의 필수적 과제로 양양팔경가의 역사성과 가창성을 계승하고 그것이 지닌 향토애를 선양하여 누구나 함께 양양팔경가를 구가함으로써 자연 사랑과 향토애를 견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양양팔경가는 1930년대에 처음 제작되어 불린 것으로 분석된다. 이 노래는 양양에서 불리던 것으로 일제강점기의 강압을 피해 중국 연변지구나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한 양양사람들에 의해 불려 졌으며, 1973년 월북작가인 조명암에 의해 개작되었다.
양양팔경가는 중국쪽의 조선족, 러시아쪽에 이주한 연해주의 고려인들에게도 비슷한 시기에 전파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1937년 스탈린에 의해 17만 명의 연해주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면서 카자흐스탄 등지에서 고려인과 함께 양양팔경가도 전파된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조선족 이주 역사를 보면 제1기(1846~1909)는 생계목적의 농민이주가 대부분이었다. 대부분으로 쪽박을 차고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들어와 맨손이나 호미, 뿔 도끼로 풀뿌리를 캐면서 헐벗은 땅을 개간하던 시기다.
제2기(1910~1931)는 항일목적의 애국지사들이 이주한 시기로 학교를 건립하고 반일교육을 하는 등 무려 6만 여명이 중국으로 집단이주하였다.
제3기(1931~1945)는 일제에 의한 강제 이주기로 집단부락을 형성하고 강제노동을 하는 등 200만 명의 한국인들이 중국땅으로 월경하여 조선족 사회를 형성하였다. 양양출신들 가운데 대부분이 3기 무렵에 연변지구로 집단 이주하여 양양 마을 뿐 아니라 강원도 마을, 원주촌, 고성촌 등을 형성했다고 분석된다. 이에 따라 양양팔경가의 중국전파기도 1930년대 초에서부터 해방 이전까지 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양양지역에서 이 노래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가창하는 분은 이종우 전 교장선생님이다. 이 교장 선생님은 1947년 당시 양양초급중학교 2학년 때 학교 합창부 클럽활동에 참여하면서 작사자 최용대 교장과 작곡자 김태선 선생님에게 직접 배우고‘양양팔경가’를 보급하는 일에 참여했었다고 증언하였다. 지난 2009년 10월 필자가 직접 듣고 녹음한 이종우 전 교장선생님이 부른 양양팔경가는 다음과 같다.
지난 2011년 연변 조선족자치주에 있는 연변대학에서 만난 전화자 교수(음악전공)도 두 살 때 양양에서 이 곳으로 이주했는데, 어려서 어머니에게 들었다며 양양팔경가 가사를 적어주었다.



[자료1]


양양팔경가
(최용대 작사, 김태선 작곡)


1절 : 산 좋고 물 맑은 양양이라네. 우리- 자랑은 팔경이로다.
앞뜰엔 동해안 뒤뜰엔 설악산. 해안을 끼고 도는 낙산사로다
에헤- 좋구 좋다. 팔경이로구나.


2절 : 놀기 좋고 물색(物色) 맑은 양양이라네. 우리-
자랑은 팔경이로다.
남으로 하조대, 북으로 운용산 청간정을 바라보는 의상대로다.
에헤- 좋구 좋다. 팔경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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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양양지역에서는‘양양팔경가’에 대한 각계 논의가 있어서 소중한 향토사 발굴사업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필자가 그동안 수집한 몇 가지 자료를 소개하고자 한다.
엄경선 기자가『설악신문』(2009년 4월 27일, 제904호)에 기고한‘80년 전 우리지역의 풍류와 풍광’에 의하면 이 팔경가는 북한과 연변조선족, 러시아를 거쳐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사이에
서도 불렸다.
북한 측 자료에 의하면 양양팔경가는 1930년대 작곡된 신민요로서 1970년대 초까지 북한에서도 원가사로 불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1973년 월북 작가 조명암(趙鳴岩, 일명 趙靈出, 1913~1993)에 의해 북한체제를 찬양하는 가사로 개사되고 제목도‘명승가’로 바꾸었다.
조영출은 고성 건봉사 봉명학교 출신 시인으로 1948년 월북하였으며‘꿈꾸는 백마강’, ‘신라의 달밤’, ‘목포는 항구’등 일제 강점기에 많은 대중가요를 작사했다.
2004년 북한 조선문학예술총동맹 기관지『조선예술』8월호는 이와 관련된 기사가 실렸는데“민요 명승가는 신민요 양양팔경가를 개작해 만든 노래”라고 언급하면서“광복 전에 창작된 양양팔경가는 1970년대 초까지 원전 그대로 불리다가 1973년 작가 조령출이 가사를 개작하고 제목도 명승가로 고쳤다”고 밝혔다.
또한“양양팔경가는 협소한 울타리를 뛰어 넘어 우리 조국은 어디 가나 살기 좋은 명승지라는 사상을 확고히 세운 데 기초해 그것을 구체적인 대상과 밀접한 연관 속에서 사회주의 조국의 현실을 예찬한 명승가로 개작됐다”고 하였다.
“명승가는 시대적 미감에 맞게 재 창조돼 우리 조국의 아름다움을 긍지 높게 노래한 것으로 우리 인민들의 사상 속에 널리 불리고 있는 귀중한 민요유산”이라고 덧붙였다.
2009년 북한 노래방에서 불리는 계몽기 가요 인기 순위에도 명승가가 9위에 올랐다고 한다.
1위는 김영춘이 부른 홍도야 울지마라, 2위는 김정구의 눈물젖은 두만강이 차지했고, 10위는 고복수의 타향살이였다.
따라서 지난 1973년 개작된 양양팔경가인 명승가의 인기가 여전한 것으로 분석된다.
양양팔경가가 중국 조선족 사회에 전파된 정확한 경로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북한과 교류가 빈번했던 중국 연변 조선족자치주의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이를 수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한편으로 연변지구에 양양주민 집거 마을이었던 조양촌의 주민들이 고향에 대한 향수를 느끼면서 이 노래를 부른 것이 전 연변지구에 전파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양양팔경가는 1981년에 출간된『중국조선족민요집』에 수록된 것을 비롯하여 2009년 중국조선족 5학년 음악교과서에‘조선민요’로 수록되어 있으며 양양지역에는 현산문화, 양주지 등에 소개되어 있다.
『현산문화』제1집(양양문화원, 1989, 144쪽)에는 최용대 작사, 김범소 작곡, 최만섭 노래로 소개하였는데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자료2]


산좋고 물맑은 양양이라네
살기좋고 물색좋은 양양이라네
우리 자랑은 팔경이로다
우리 자랑은 팔경이로다


앞에는 동해안 뒤에는 설악산
남에는 하조대 북에는 운봉산
해안을 끼고 도는 낙산사로다
청간정 바라보는 의상대로다
(후렴) 에헤에 좋구좋다 팔경이로구나


『양주지』(양양군, 1990, 577쪽)에 수록된 양양팔경가 가사는 작사 최용대, 작곡 김범소로 되어 있으며 가사는 위의『현산문화』에 소개된 내용과 다소 차이가 있고 그 순서도 바뀌었다.
작사자 최용대는 1925년 양양신청년동맹을 시작으로 양양청년동맹과 신간회 양양지회를 이끈 대중운동가였다. 그는 동아일보 기자 출신으로 삼척에서 영동기자단이 주최하는 시사강연 연사로 나서기도 했으며 1937년부터 2년 동안 동아일보 양양지국장을 맡기도 했고 초등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이종우 전 교장선생님이 전하는 이야기로는 당시 이 학교에 근무하던 속초 출신 시인 황금찬 선생이 양양팔경가를 작사했으나, 당시 교장이었던 최용대 선생 이름으로 대신 소개되었다고도 하는데, 정확한 것인지는 황금찬 시인에게 확인하지 못하였다.
또한 [자료1]과 [자료2]에는 작곡자가 김태선과 김범소로 달리 나오고 있으며 [자료2]에는 이 노래를 부른 가수가 최만섭으로 기록되어 있다. 작사자는 동일하나 작곡자가 김태선, 김범소로 다르게 기재된 이유나 가수 최만섭에 대한 별도의 고찰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자료3]


산좋고 물맑은 양양이라네
우리자랑은 팔경이라네
앞에는 동해안 뒤에는 설악산
해안을 끼고 도는 낙산사로다
(후렴) 에헤에 좋구 좋다 팔경이로구나


살기좋고 물색좋은 양양이라네
우리자랑은 팔경이라네
남에는 하조대 북에는 운봉산
청간정 바라보는 의상대로다


『중국조선족민요집』에 수록된 양양팔경가 가사는 다음과 같다. 이 민요집에 수록된 민요는 195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중국 조선족이 살던 연변일대, 길림, 요령, 흑룡강 등 3성의 집거마을에서 수집한 것으로 [자료4]는 김태갑·조성일의『민요연구』(연변인민출판사, 1981, 146쪽)에 수록된 것이고 [자료5]는 중국음악가협회 연변분회『민요곡집』(연변인민출판사, 1982, 404쪽)에 수록되어 있다. 후자에는 악보가 들어 있다. ( )안은 필자가 바른 표기로 고친 것이다.



[자료4]


산좋고 물맑은 양양이로구나
우리 자랑인 팔경이로구나
앞뜰엔 동해안 뒤(뒷)뜰엔 설악산
해안을 끼고도는 약(낙)산사로다


산좋고 물맑은 양양이로구나
우리 자랑인 팔경이로구나
남으로 화주대(하조대) 북으로 운봉산
청가(간)정 바라보니 의상대로다
에헤야 좋구좋다 팔경이로구나



[자료5]


산좋고 물좋은 양양이로구나
우리 자랑인 팔경이로구나
앞뜰엔 동해안 뒤뜰엔 설악산
해안물 찌고(끼고) 드는(도는) 락산사로다
에헤야 좋구좋다 팔경이로구나


위에 나오는 하조대, 운봉산은 1930년대 당시 양양군 행정구역이 속초시와 고성군 토성면까지 포함되어 양양 하조대, 고성 청간정과 운봉산 지명이 수록되었다. 1930년대 북한에서 불렸던 개작하기 전의 양양팔경가 가사는 다음과 같다.



[자료6]


산좋고 물좋은 양양이로구나
우리 자랑인 팔경이로구나
앞뜰엔 동해안 뒤뜰엔 설악산
해안을 끼고도는 락산사로다(1절)
에헤야 좋구 좋다 팔경이로구나(후렴)


산좋고 물좋은 양양이로구나
우리 자랑인 팔경이로구나
남으로 화주대 북으로 운봄산
청간정 바라보니 의상대로다(2절)


이상의 전승 양양팔경가에는 반드시 후렴이 들어가 있는데“에헤야 좋구 좋다 팔경이로구나”라고 하였다.
1970년대 북한에서 조명암(조영출)에 의해 개작된 후의‘명승가’를 참고로 보면 1절에는 동해안, 백사장, 해당화가 들어가 있으며 2절에는 서해안이 지상낙원임을 강조하고 3절에는“산천이 좋아서 명승이라더냐, 살기 좋으니 낙원이다”라고 개작하여 북한사회를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명승가는 1절을 빼면 양양팔경가와 전혀 달라진 사회주의 조국의 현실을 예찬한 명승가로 개작, 체제선정용으로 바뀌었다고 하겠다. ‘명승가’전체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명승가]


산좋고 물맑은 이 강산이로구나
우리 자랑인 동해안이로다
앞에는 백사장 해당화 피구요
뒤에는 푸른 숲에 백학이 난다네
에헤야 좋구 좋다 명승이로구나(1절)


산좋고 물좋은 이 강산이로구나
우리 자랑인 서해안이로다
봄이면 과수원 사과꽃 피구요
가을엔 황금파도 출렁인다네
에헤야 좋구 좋다 지상락원일세(2절)


산천이 좋아서 명승이라더냐
살기 좋으니 락원이로다
하늘은 사시절 맑기도 하구요
밤에는 달과 별이 보석을 뿌린 듯
에헤야 좋구 좋다 금수강산일세(3절)


중국에 사는 조선족 아동들도‘양양팔경가’를 불렀는데 이것이 의무교육 조선족학교교과서 음악 5학년 하권(연변교육출판사, 2006, 39쪽)에 작사자, 작곡자, 가수가 밝혀지지 않은 채 조선민요로 수록되기에 이르렀다. 중국 조선족민간음악집에도 악보가 수록되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에는 강원도 이주민들이 집단적으로 살고 있는 강원촌, 조양촌(조선 양양), 고성촌 등이 있는데 이들에 의해 강원도 민속과 민요가 전승되고 있다.
양양팔경가는 북한, 조선족뿐 아니라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재소 한인인 고려인들에 의해서도 불렸다. 김병학 채록편저, 『재소고려인의 노래를 찾아서』(화남, 2007) 258쪽에는 카자흐스탄의 고려인들이 부른 양양팔경가가 수록되어 있다. 가창은 1~2절, 필사본 1~3절로 되어 있다. 양양팔경가와 개작된 명승가가 함께 수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지역적 특수성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재소 고려인의 양양팔경가는 다음과 같다.



[자료7]


(1절)
산좋고 물좋은 양양이로구나
우리 자랑인 팔경이로구나
앞뜰엔 동해안 뒤뜰엔 설악산
해안을 끼고도는 낙산사로다
(후렴) 에헤야 좋구 좋다 팔경이로구나


(2절)
산좋고 물좋은 이 강산이로구나
우리 자랑인 동해안이로다
앞에는 백사장 해당화 피구요
뒤에는 푸른 숲에 백학이 난다네


(3절)
산좋고 물좋은 서해안이로다
우리자랑인 서해안이로다
봄이면 과수원 사과꽃 피구요
가을엔 황금파도 출렁인다네
(* 낙산사로다 : 필사본과 녹음테이프에는‘약산사로다’로 나와 있다, 채록자 주)



상기의 고려인들이 부른 양양팔경가는 1절이 대동소이하고 2절은 많은 차이를 보인다. 3절은 필사본에만 수록된 것으로 후에 개작된 명승가를 더 보탠 것이다. 각 자료에 수록된 2절을 차례로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자료4]에는 2절이 누락되어 있어 양양과 관련된 팔경가는 아래와 같이 전체 5편이 된다고 하겠다.


앞에는 동해안 뒤에는 설악산
남에는 하조대 북에는 운봉산
해안을 끼고 도는 낙산사로다
청간정 바라보는 의상대로다
(후렴) 에헤에 좋구좋다 팔경이로구나(자료1)


살기좋고 물색좋은 양양이라네
우리자랑은 팔경이라네
남에는 하조대 북에는 운봉산
청간정 바라보는 의상대로다(자료2)


산좋고 물맑은 양양이로구나
우리 자랑인 팔경이로구나
남으로 화주대(하조대) 북으로 운봉산
청가(간)정 바라보니 의상대로다
에헤야 좋구좋다 팔경이로구나(자료3)


산좋고 물좋은 양양이로구나
우리 자랑인 팔경이로구나
남으로 화주대 북으로 운봉산
청간정 바라보니 의상대로다(자료5)


산좋고 물좋은 이 강산이로구나
우리 자랑인 동해안이로다
앞에는 백사장 해당화 피구요
뒤에는 푸른 숲에 백학이 난다네(자료6)


상기 5편의 민요 각 편에서 볼 수 있듯이 2절 가사는 남쪽 양양의 하조대와 의상대, 북쪽 고성의 운봉산과 청간정이 팔경에 들어 있다. 그러나 [자료6]은 백사장, 해당화, 푸른 숲, 백학 등 다른 내용으로 되어 있어 러시아 한인들에 의해 부분적으로 창작과 개작이 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73년 북한에서는 양양팔경가를‘명당가’로 개작했듯이 민요의 특성상 다양한 각 편이 나올 수 있다고 볼 때, 양양팔경가의 본래적 원형은 북한, 연변조선족, 연해주 고려인들에 의해 지속되었다고 하겠다. 끝으로 조선족 초등학교에 실린 양양팔경가 내용을 전재하고자 한다. 여기에 수록된 내용은『민요곡집』에 실린 가사와 동일하므로 민요곡집을 전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산좋고 물-맑은 양-양이로구나
우리 자랑인 팔-경이로구나
앞뜰엔 동해안 뒤뜰엔 설-악-산
해안물- 찌고도는 락-산-사로다
에헤야-좋구 좋다
팔경이로구-나


중국연변조선족자치주에는 이른바 양양마을로 전하고 있는 안도현 영경향 조양촌은 조선 양양출신들이 많다하여 불린 이 마을은 민족의 영산 백두산으로 가는 길에 위치하고 있는데 옹기종기 모여 있던 초가집들이 지난해 수해로 거의 떠내려가 버렸다. 도로가 끊겨 임시로 길을 내어 다니고 있지만, 그나마 남아 있던 조선족들조차 이제는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의 가난을 피해서 오로지 살기 위해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며 찾아온 중국의 연변지구와 러시아 연해주는 이른바 재중동포인 조선족과 재소동포인 고려인의 고향과도 같았다. 이들은 고향 양양을 그리워하며 양양팔경가를 부르고, 이를 따라 부르면서 언젠가 고향으로 다시 돌아갈 날을 기다렸다.
중국땅이나 러시아 어디든지 강원도 사람이 많이 살던 곳에서는 아라리가 늘 불렸고, 특히 양양출신들은 양양팔경가를 즐겨 불렀다고 전한다. 1931년부터 45년까지 일제의 강제이주정책으로 중국땅에 옮겨 앉은 조선족들은 헐벗고 굶주림 속에서도 고향땅을 그리워하면서 한가닥 희망을 잃지 않고 쉼없이 개간하여 문전옥답에는 벼농사를 짓고 산비탈에는 사과배를 심으면서 강인한 민족성을 발휘하였다.
또한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로 인해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떠난 17여 만명의 고려인들도 가난과 추위의 고통에서 푸른 바다 동해안과 산자수명한 양양땅을 그리워하며 이 노래를 불렀다. 그들은 고통과 통한의 역사적 희생자이지만 그들은 기적과 감동의 역사를 창조하였다. 중국조선족들은 1966년 5월부터 1976년 10월까지 중국에 불어 닥친 문화대혁명 10년 동안 양양팔경가를 제대로 부를 수 없다가 1970년대에 들어와 비로소 중국조선족 민요집에 수록되어 우리들에게 알려지는 등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위에서 분석한 바와 같이 양양팔경가는 1930년대에 제작되어 불렸으며 한민족이주사와 맞물려 북한땅, 중국땅, 러시아땅으로 흘러갔다.
일제강점기의 중국연변지구로 집단이주한 양양사람들에 의해 중국 조선족사회에서 불렸으며, 북한에서는 청년기에 강원도 고성 건봉사에 머물렀던 월북 작사가 조명암(조영출)에 의해 1973년에는 북한체제선정용 노래로 개작되었다.
양양팔경가는 중국의 조선족, 러시아에 이주한 연해주의 고려인들에게도 1930년대 집단이주와 함께 전파된 것으로 추정되며 1937년 스탈린에 의해 17만 명의 연해주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면서 카자흐스탄 등지에서 고려인과 함께 전파된 것으로 생각된다.
1930년대에 소리의 고장 양양에서 창작된 신민요 양양팔경가는 일제강점기 동안에 중국으로 건너간 양양출신들에 의해 중국조선족 사회에 구전 되었으며, 이 시기 러시아로 이주한 고려인들도 부르다가 1937년 이후에는 중앙아시아까지 퍼져나간 것으로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양양팔경가는 팔경의 경관을 노래한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고향을 그리워한 해외동포들의 망향가로 불리고, 신민요조의 애향가로 그 국제적 생명력을 이어나간 것은 문화전파사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평가된다.
한편으로 80여년이 넘는 양양팔경가의 역사성과 국경을 넘어 간단(間斷)없이 이어진 역사를 재평가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