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31호

2019 양양문화원 언론홍보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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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023회 작성일 2020-02-04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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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문화원 정기총회
2019.01.31.(목) 강원일보 사회포토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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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문화원(원장:윤여준)은 30일 일출웨딩홀에서 2019년도 정기총회를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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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3·1 운동 100주년
'100년후에도 인정안돼'…양양만세 주도한 '이석범' 선생

2019.2.26 강원영동CBS - 전영래·유선희 기자


[지역에서도 들끓은 만세운동③] 이념떠나 '항일운동' 대의로 규합 버선에 독립선언서 숨겨 양양으로 가져와 양양서 6일 동안 12명 사망, 70여 명 부상 양양 만세운동은 지역에서 일어난 기미 독립만세운동 중 가장 치열했던 곳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 중심에 설초(雪樵) 이석범 선생이 있었다.


1919년 4월 양양지역에서 울려 펴진 만세운동을 기록한 국가보훈처의 '독립운동사'에서 원로 학자들도 "극단적이라는 공통성이 보수든 혁신이든 항일운동이라는 공동목표에 집약돼 치열한 3.1운동을 일으켰던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기미년(1919년) 3월 고종이 일본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풍문이 나돌며 민족감정이 격앙되고 있었다. 당시 양양지역 유림세력의 대표였던 이석범 선생은 61세의 나이로 유림 10여 명과 함께 고종 인산(因山)에 참례했다.


이석범 선생은 돌아오는 길에 서울의 만세운동을 직접 목격한 뒤, 삼엄한 검문검색 속에서 소변을 보는 척 하다 버선 속에 독립선언서를 몰래 숨기는 기지를 발휘해 무사히 귀향한다.
이후 동생 이국범과 두 아들, 그리고 임천리 문중의 이교완, 이교정을 비롯해 조국의 독립을 열망하는 지역유림, 양양보통학교 졸업생, 양양감리교회 신문화 세력 등과 함께 장날이었던 4월 4일 양양 만세운동을 모의 주도한다.


이 과정에서 비슷한 시기에 독립선언서를 몰래 들여 온 여성운동가 조화벽 지사, 양양감리교회 청년부 김필선 선생 등과 규합하면서 규모는 더욱 커졌다. 이들은 서로간 이념을 달리했지만, 항일운동이라는 대의 아래 뜻을 모았다.


하지만 만세운동 계획이 결코 순탄하지는 않았다. 만세운동을 위해 수일간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숨어서 만들 던 중 만세운동 하루 전인 4월 3일 당시 군수였던 이동혁 등에 발각된다. 결국 이석범 선생 등 주도자 22명은 대사를 하루 앞두고 체포됐으며, 인쇄기와 태극기 374매도 압수된다.


이 같은 소식이 전해지면서 당시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함홍기 열사를 포함한 군중들은 경찰서로 달려갔다. 경찰서 안에서 이석범선생 등의 석방을 요구하며 항의하던 함흥기 열사가 양팔이 잘린 채 숨지자 '양양 3·1 만세운동'은 그 어느곳보다 활활 타올랐다.


실제 양양지역은 임천리와 물치, 기사문 등 양양지역 6개면 82개 동리에서 남녀노소 6천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4~9일까지 6일 동안 이어졌다.
이 기간 12명의 사망자와 7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구금이나 수형자 172명,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태형을 받으면서 지역 만세운동 중 가장 격렬했던 곳으로 기록되고 있다.
만세 운동을 주도한 이석범 선생은 원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같은 해 11월 풀려났으며, 동생 이국범과 두 아들도 투옥돼 혹심한 고초를 겪었다.


이후 이석범 선생은 지난 1913년 '쌍문서숙'을 설립해 후진 양성과 항일 애국함양에 전념했다. 이어 일제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1926년 6월 10일 순종 국장에 참례하고, 1927년에는 월남 이상재 선생이 주도한 민족협동전선운동인 신간회 운동에 참여해 양양지회의 초대회장을 맡는 등 조국의 독립에 여생을 바쳤다.
이처럼 양양의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양양 유림의 대표 인물로 평생을 항일운동에 바쳤지만, 그의 공헌은 100년 지난 지금까지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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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범 선생. (사진=양양문화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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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군현북면기사문리에있는3·1운동유적비.(사진=양양문화원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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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운동 당시 이석범 선생이 주로 활동했던 양양군 임천리마을. (사진=유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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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범 선생의 동생 이국범 지사의 훈장증.


만세운동으로 당시 실형을 살았던 이석범 선생의 장남 이재훈과 동생 이국범에게는 지난 1990년과 2005년에 각각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하지만 만세운동 이후 구금은 됐지만 실형을 받지 않았다는 것과 만세운동 직전까지 도촌면장을 지냈던 이석범 선생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양양향토문화원 김양식 연구원은 "각종 기록과 증언 등이 만세운동을 주도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해 안타깝다"며 "지난해 8월 다시 독립유공자 신청을 한 만큼 이번에는 이석범 선생님의 항일정신과 헌신이 인정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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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 문화학교 개강
2019.03.05.(화) 강원도민일보- 최훈기자


양양문화원 문화학교 개강식이 4일 일출웨딩홀에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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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명의 피로 만들어진 만세고개…
양양만세 주도한 이석범·조화벽

2019.3.12. 동아일보 양양=김갑식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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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 만세운동의 요람이 됐던 양양 감리교회.
양양=김갑식 문화전문기자



‘…현북면사무소 일부 관리들의 만류로 옥신각신하다가 그 계획을 변경하여 기사문리 주재소를 공격키로 하고 약 천 명의 군중이 관고개(關峴) 길을 따라 넘어 선두는 이미 기사문리 주재소 앞에서 왜경들과 몸싸움을 벌이며 천지가 진동하는 만세를 연호하고 있었다. 이때 언덕 밑 계곡 숲 속에서 미리 잠복하고 있던 일제 수비대와 경찰이 무차별 발포하여 현장에서 9명이 피살되고 20여 명이 중경상을 당하였으니 그 참상은 천인이 공노할 만행이었다.’


7일 찾은 강원 양양군‘만세고개’한쪽에 서 있는 비에 적힌 글의 일부다. 양양군은 1919년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이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기 위해 시위의 현장 만세고개에 유적비를 세웠다. 태극기를 새긴 타원형의 주비(主碑)에는 만세를 부르는 주민들의 군상이 조각돼 있다. 왼쪽 비에는 만세고개 유래, 오른쪽 비에는 당시 상황과 희생된 애국지사들 이름이 새겨져 있다.



● 9명의 피로 만들어진 만세고개


이 시위는 양양군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다. 양양의 기미만세운동은 4월 4일 양양의 장날부터 결행돼 남녀노소 종파신분의 구별 없이 일심동체가 되어 진행됐고, 요원의 불길처럼 각 면으로 확산됐다. 4월 9일 현북면에서도 궐기대회가 끝난 후 양양읍 장마당에서 군중과 장꾼들이 합세해 만세운동을 벌일 계획이었다. 유학자 박원병 형제와 감리교회 청년 오세옥 이응렬 등이 손을 잡고 면내의 유지 임병익 오정현과 합세했고, 각 마을의 구장(이장)들이 큰 역할을 했다. 이날 각 마을 구장들이 인솔해 하광정리 면사무소에 모인 1000여 명의 시위대는 소리 높이 만세를 부르고 기사문리에 있는 주재소로 향했다. 일제는 현북면 일대의 치열했던 당시의 시위를 이렇게 기록했다. ‘4월 9일 양양군 현북면 기사문주재소를 습격한 폭민(暴民)은 면장을 협박하기를 심히 하여 면장은 부득이 일시 사무를 중지하고 피난 중이다.’


미리 시위 정보를 입수한 일제 경찰은 언덕에서 군중을 향해 총을 겨누다 일제히 발포했다. 사망자 9명, 부상자가 20여 명이 발생하고 시위 현장은 피바다가 됐다. 전원거 임병익 홍필삼 고대선 황응상 김석희 문종상 진원팔 이학봉 등이 희생됐다. 현재 만세고개에는 도로가 생기는 등 변화가 커 옛 흔적을 찾기 어렵다.
야트막한 오르막길의 느낌만 남아 있다.


양양군은 강원도뿐만 아니라 전국으로 범위를 넓혀도 규모나 내용에서 3·1운동이 전개된 지역 가운데 가장 치열했던 곳 중 하나로 꼽힌다. 양양 군에 따르면 4월 4일을 첫 시작으로 9일까지 6일 동안 1만 5000명이 넘게 시위에 참여했다. 당시 군 인구는 3만 6000명으로 추산된다. “시위 때 집집마다 한 사람은 나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만세운동의 열기가 뜨거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13명의 사망자, 5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체포자는 부지기수였다.


특히 4월 5일 대포항 만세시위에는 1000여 명이 모여 시위를 하자 경찰이 완전히 굴복하고 사죄했고, 군중은 다음날 양양읍에서 다시 모이기로 하고 해산했을 정도다. 또 4월 6일 시위대가 제지하는 군대를 밀어내고 읍내 경찰서로 몰려가자 경찰서장이 “일본은 물러갈 테니 만세만 부르고 돌아가 달라”고 애원해 군중이 만세시위만 벌이고 저녁 때 돌아가기도 했다.


● 유림의 이석범과 기독교(개신교)의 조화벽


양양은 동학농민운동 때 반(反)동학군이 결성될 정도로 유림 영향력이 강하고 보수적인 곳이엇다. 보수적인 이곳에 1906년 남궁억이 군수로 있으면서 현산학교를 설립했다. 이 학교는 학생수가 200명에 이를 정도로 급속히 발전했다. 신문화 바람과 함께 양양면 성내리와 강현면 물치리, 현북면 상광정리에 교회가 들어왔다. 그중 양양 감리교회는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는 등 큰 역할을 한 조화벽(1895~1975)의 아버지 조영순 전도사가 이끌던 교회로 많은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개화 바람이 커지자 반 동학군을 주도했던 이석범(1859~1932)은 쌍천학교를 세워 유교적 사상과 문화를 지키고자 했다. 이처럼 양양은 유교와 기독교 세력으로 나뉘었으나 나라를 되찾자는 대의에 하나로 뭉쳤다. 두 세력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했던 것이 현산학교와 쌍천학교, 양양보통학교의 초기 졸업생들이었다.


이석범은 고종 황제의 인산(因山·장례)에 참례하고 돌아올 때 독립선언서를 가져온 뒤 거사를 추진했다. 그는 아들 이능렬과 김영경 장세환 등 쌍천학교의 졸업생들에게 주요 임무를 맡겼다.
이석범은 문중의 큰 부자였던 이교완의 집을 본거지 삼아 최인식 등 30세 전후의 청장년층을 모았다.


3월 말경 조화벽은 개성에서 돌아올 때 독립선언서를 버선 속에 숨겨 들어왔다. 개성 호수돈여학교에 다니던 그는 기숙사생으로 구성된 비밀결사대원으로 활동하다 일제의 휴교 조치로 고향으로 향했다. 이 선언서는 면사무소에 근무하던 교회 청년 김필선에게 전해졌다. 김필선은 같은 양양보통학교 졸업생이자 교우(敎友)들인 김재구 김규용 김계호 등을 모았다. 이들은 면사무소 등사판을 이용해 독립선언서를 복사하고 교회 인근 상여 보관처에 숨어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러던 중 최인식과 연락이 닿아 합동으로 거사를 추진하게 됐다.


하지만 4월 3일 일본 관헌들이 급습해 태극기를 만들던 사람들과 총지휘자 이석범을 비롯한 22명을 체포했다. 체포를 피한 최인식 김필선 등은 거처를 옮겨 밤새 준비했고, 4월 4일 계획대로 큰 시위가 벌어졌다.


조화벽은 훗날 유관순 열사의 오빠인 유우석과 부부의 연을 맺었고, 항일 독립운동으로 구금과 석방을 되풀이한 남편의 옥바라지를 한다. 3·1 운동 6년 뒤 양양으로 돌아온 조화벽은 정명학원을 설립해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헌신한다. 이 학교는 일제 탄압으로 1944년 폐교되기 전까지 6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양양문화원 부설 이철수 향토사연구소장은“양양 만세운동을 주도한 유림과 기독교 세력은 정서적으로 물과 기름의 관계일 수도 있었지만, 국권회복을 위해 그 차이를 뛰어 넘어 하나로 뭉쳤다”라며 “청년 그룹이 두 세력을 연결하며 핵심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지도자 그룹이 대거 검거되면 운동이 지리멸렬해지기 쉽지만 양양의 만세운동은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 이 원장은 이에 대해 “양양은 지금의 서울보다 큰 면적이기 때문에 연락이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전 군에 걸쳐 만세운동이 격렬하게 벌어진 것은 유림을 앞세워 구장(리장)까지 가담시킨 치밀한 조직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 함홍기 열사, 서장에게 화로를 던지려다 순국


4월 4일은 양양 장날이었다. 양양읍에 들어오는 통로 5개를 따라 인근 각지에서 만세 군중과 장꾼들이 모여 들었다. 읍내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들에 나가 있던 농부들도 모여들었다. 점심 때에 이르러 만세 군중은 더욱 불어났고, 특히 경찰서와 군청주변은 물론 뒷산에도 군중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군중은 경찰서와 군청을 에워싸고 임천리에서 체포한 22명을 비롯한 감금자를 석방하고 일본 관헌은 자기 나라로 물러가라고 요구했다. 몇 사람은 경찰서에 들어가 경찰서장에게 항의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손양면 가평리 구장 함홍기는 일본 경찰서장에게 화로를 들어 던지려다 일본 경찰 두 명에게 양팔이 잘린 후 목을 찔려 죽었다. 그의 시신은 경찰서 내 복도에 가마니에 덮여 있다가 10여 일 뒤 가족에게 인계됐다. 마을 주민이 모인 뒤 장례를 치렀으나 일본 경찰은 동네 주민이 모여 울었다는 이유로 하관 직후 파헤치고 관을 깨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 양양의 만세운동에는 유림과 기독교 세력 뿐 아니라 천도교와 불교도 만세운동에 가세했다. 일제의 기록과 당시 증언 등에 따르면 4월 7일 오후 2시 반 천도교도를 중심으로 약 300명의 군중이 운동을 개시하여 양양읍내에 들어오자 일제 경찰은 주모자 4명을 체포했고, 시위대는 해산됐다. 낙산사 승려들도 이날 오후 7시 바라소리와 더불어 전 승려들이 등불을 들고 만세운동을 펼쳤다.


▼ 강원도 최초의 교회‘양양 감리교회’는… ▼


조화벽 지사가 활동한 곳으로 유명한 양양 감리교회는 기독교계에서 민족구국제단을 표방하는 대표적 교회다.


7일 방문한 이 교회 입구 표지석에는‘이곳은 1901년 10월 5일 하디 선교사가 설립한 교회로서 한국의 초대교회를 계승한 민족구국제단이며 1919년 양양 만세운동의 발상지입니다’라고 새겨 148 제31호 양양문화져있다.


설립 당시 이곳은 강원도 최초의 교회였다. 70㎡(20평) 남짓한 기와집으로 시작했다 여러 번 개축을 거쳐 2011년 지금의 6층 교회건물이 들어섰다. 내부에서는 이 교회가 겪어온 역사를 엿볼 수 있다. 1층에는 조화벽 기도실, 2층에는 3·1운동 당시 담임목사의 이름을 딴 김영학홀, 3층에는 본당인 하디 예배실이 있다.


황해도 금천군 출신의 김영학 목사(1877~1932)는 교인, 주민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4년이나 옥고를 치렀다.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문서에서는 그에 대해‘민족절대독립주의, 배일사상을 지닌 자’로 규정하고 있다. 1922년 출감한 그는 연해주 선교사역에 나서지만 1930년 러시아 공산당에 의해 반동분자로 체포됐다. 신앙을 버리라는 배교(背敎)를 거부하던 그는 1932년 시베리아에서 강제노동 중 사망했다.


송정근 목사(1895~1950)는 1926~1929년 담임 목사로 재직 중 사회주의자들을 비판하다 고난을 당하고, 친일 행위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목사직 정직 처분을 받기도 했다. 1945년 평양 남산현교회 담임 목사로 부임한 그는 공산당 반대에도 1946년 교파 연합의 3·1절 기념행사를 주도했고, 한국전쟁 와중에 공산군에 의해 순교했다.


이 교회 이재풍 장로는“본당 제대 앞에는 옛 교회당의 돌들을 가져다 놓았다”라며“교회가 신앙 뿐 아니라 구국을 위한 제단이 었음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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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문화제 6월 개막 확정
문화제위 총회서 일정·예산 확정
체육대회·민속 시연 등 행사 진행

2019.03.23.(토) 강원도민일보 - 최훈기자


양양군의 향토문화축제인 양양문화제가 6월 20일부터 22일까지 사흘 간 종합운동장 일원에서 개최된다.


문화제위원회는 지난 21일 문화원에서 정기총회를 열고 올 문화제 일정과 세부계획,예산안 등을 확정했다.


이날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5월 농번기와 5월 31일부터 6월 4일까지 열리는 제54회 강원도민체육대회 일정 등을 고려해 전년도와 같은 시기에 문화제를 진행하기로 의견을 모았다.이에따라 올
문화제는 6월 20일 개막식에 이어 21,22일에는 주민 결속과 화합을 위한 읍·면 대항 체육대회와 민속 시연 및 체험을 진행된다.
한편 양양문화제는 국태민안과 풍농풍어를 기원하는 지역대표 향토문화축제로 매년 바쁜 농사일이 마무리되는 6월에 개최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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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 3·1운동100주년기념양양만세운동재현
2019.4.4.(목) 강원일보-박기용 기자


【양양】양양군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4일 오전 10시 군청 앞 사거리에서 양양의 3·1만세운동 재현행사를 개최한다.


이번 행사는 영동지역에서 가장 치열했던 양양장터 3·1만세운동의 역사적 의의와 선열들의 호국 독립정신을 계승해 양양인의 애국·애향심을 높이기 위해 마련했다.


군청 앞 사거리를 중심으로 만세운동 재현 연극과 한풀이춤 등의 퍼포먼스를 펼친 후 행사 참여자 전원의 만세 삼창으로 마무리할 예정이다.


이날 오후 2시 양양군 문화복지회관에서는 8군단 군장병을 대상으로 군장병과 함께하는 바이올리니스트 박지혜의 콘서톡이 열린다. 윤여준 양양문화원장은“이번 100주년 행사를 통해 양양
기미독립만세운동으로 희생된 순국선열의 넋을 위로하고 양양군민으로서의 자긍심을 느끼며 나아가 나라사랑의 정신을 계승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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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시작된 양양지역 '3·1 만세운동'…
재현행사 개최

2019.04.04. 강원영동CBS - 유선희 기자


4일 오전 군청 앞 사거리에서 3·1 만세운동 재현 행사가 펼쳐졌다(사진=양양군청 제공)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강원 양양지역에서는 실제로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4일 재현 행사가 펼쳐졌다.


유족과 주민, 사회단체 등 천여명은 4일 오전 군청 앞 사거리에서 '양양의 3·1 만세운동'을 재현하고 '그날'의 함성을 되짚었다.


또 이들은 만세운동 재연 연극과 만세 삼창, 한풀이춤 등 퍼포먼스도 펼쳤다.


기미년(1919년) 4월 4일 양양 장날에 일어난 '양양 3·1 만세운동'은 전국 지방에서는 가장 극렬하게 일어난 독립운동으로, 남녀노소 관계없이 모두 1만 5천여 명이 참가해 6일 동안 계속됐다.


양양문화원 등 기록에 따르면 이 기간 12명의 사망자와 7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구금이나 수형자 172명,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태형을 받았다(CBS노컷뉴스 2월 22일, 25일, 26일, 28
일).


이번 행사는 만세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재발견하고, 선열들의 독립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마련됐다.


양양문화원 윤여준 원장은 "100주년 행사를 통해 순국선열의 넋을 기리고 애향심 정신을 계승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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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문화제 시가행진
2019.6.21.(금) 강원일보 포토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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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회 양양문화제의 시작을 알리는 대규모 시가행진이 20일 시내 일원에서 지역 주민과 학생, 각급 기관·사회단체, 군부대 등 7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취타대 농악대를 선두로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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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권 문화계 원로 고경재 전 양양문화원장 영면
지난 17일 87세 일기로…가평리 선산에 안장 / 오산리선사유적발굴·향토문화 창달 기여

2019.7.29. 설악신문 - 김주현 기자


설악권의 문화계 원로였던 고경재 전 양양문화원장이 지난 17일 8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오랫동안 숙환으로 자택에서 치료를 받던 고 전 원장은 이날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으며, 지난 19일 손양면 가평리 선산에 안장돼 영면에 들어갔다.
‘강원도 향토문화와 오산리선사유적’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거명되는 인물이 바로‘고경재 원장’이라고 할 정도로 향토문화의 산증인으로 불려왔다. 36년이란 긴 세월을 양양문화와 고락을 함께해 온 고인은 지난 2006년 6월 72세로 양양문화원장을 퇴임하고 자연인으로 돌아갔었다.
1933년생인 고 고경재 원장은 양양 손양면 송전리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양양고급중학교를 수료하고 1958년부터 1961년까지 서울신문사 기자로 활동하며 38선 분단지역이었던 양양군의 통일·문화에 많은 관심을 갖고 열정을 불태웠다.
문화적 소양과 열정이 남달랐고 항상 연구하고 공부하는 자세를 견지해온 고인은 1971년 양양문화원 창립의 실무업무를 도맡아 초대 사무국장에 취임했고 1987년까지 16년간 양양문화원의 기틀을 다지는데 노력해왔다.
고인이 사무국장으로 재직하던 시기(1965년부터)에 대한불교조계종 종찰인 진전사 3층석탑과 선림원지, 낙산사, 영혈사 등 불교문화 유적이 문화재로 등록됐고, 동아시아에서 최고 오래된 선사유적인 양양 손양면 오산리 선사유적(1977년)이 발굴돼 고고학계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양양문화원 사무국장을 마친 고인은 1987년 양양문화원장에 취임한 후 오산리 선사유적공원 조성과 진전사지 중창복원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업적을 꽃피우며 양양문화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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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리선사유적·불교문화 발굴 업적


동아시아 최고의 선사유적인 양양 손양면 오산리 선사유적 발굴은 고인이 고고학자인 서울대 임효재 교수와 함께 연구 및 조사해온 결과로, 오산리선사유적박물관 개관의 주춧돌을 놓았다.

당시 고인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국내는 물론 세계고고학사에 큰 획을 긋는 오산리선사유적지는 양양문화의 뿌리와 근간을 이루는 역사”라며 “선사인들의 유적을 통해 현대인들이 시공간을 초월해 아득한 우리 조상을 만나는 타임머신 같은 신비롭고 생생한 문화역사의 현장이 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고인의 예상대로 오산리선사유적박물관은 현재 전국 각지에서 선사시대를 체험하기 위한 학생들의 발걸음이 이어지며 수학여행지로 인기를 끌고 있다.
고인의 또 다른 업적 중 하나는 불교문화유적 발굴 및 홍보이다.
불교문화 전문가인 정영호 박사와 함께 1965년 진전사지 3층석탑을 시작으로 선림원지, 낙산사, 영혈사 등 지역에 산재한 불교유적을 찾아 널리 알려왔다.
선종의 효시인 도의국사가 창건한 선종의 본산인 진전사지를 발굴하고 복원하는 기초를 닦았다. 진전사는 현재 2차 발굴을 통해 우리나라 불교문화의 큰 축으로의 역할이 기대되고 있다.
또 3.1만세운동 등 충절의 고장인 양양군의 향토축제 활성화를 위해 현산문화제를 만들어 중심적으로 활동해 왔다. 현재는 양양문화제로 변경해 개최하고 있으며, 고치물제, 장군성황제, 양주방어사행차, 대포만포수군, 오산리 선사인 가장행렬 등 당시 고인의 치밀한 고증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고인은 양양군의 지명 유래를 알아보기 위해 중국 양양구 연구에도 열정을 보였고, 후배 문화인들과의 왕성한 교류에 나서 문화계에서도 귀감이 됐다.


“진정한 향토사학자이자 문화계 원로”
지난 2006년 양양문화원장 퇴임 후에도 자택에 머물며 저술활동을 했던 고인은 당시“문화는 생활의 연속이며, 주민들이 살아가는 진솔한 이야기가 모여 만들어진 역사적 산물이다. 거짓된 조장으로는 절대 생성되지 않는 것이 문화이고, 그렇기에 더욱 값지고 소중한 우리의 자화상”이라고 피력하며 향토문화의 소중함을 거듭 강조하기도 했다.
윤여준 양양문화원장은“고경재 원장님이야말로 우리지역이 배출하고 시대가 낳은 진정한 향토사학자이자, 문화계의 원로”라며 “고향 선산에서 편하게 영면하시기를 모든 지역 문화인들과 함께 기도 드린다”고 말했다.
80세가 넘어서도 20대 청년정신을 간직한 채, 저술활동에 몰입했던 고인은 영원히‘청년 고경재’로 기억되길 바라며, 지난 17일 자연의 섭리에 따라 자택에서 고이 눈을 감았고, 그토록 애정을 쏟았던 오산리선사유적지가 지척에 바라다 보이는 선산에 잠이 들었다.
한편, 유족들은 고인의 향토문화사랑 정신을 기려 소장해온 책과 자료 등을 평생 고인이 몸담았던 양양문화원에 기증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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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고경재 양양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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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국제선사문화심포지엄이 끝난 후 진전사를 찾은 고인(가운데). 오른쪽이 오산리선사유적지를 발굴한 임효재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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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전국 동구리 전통민요 경창대회
양양문화원 23~24일 개최 / 3개 부문 10개 팀 시상 / 통합대상 상금 3백만원

2019.08.12. 설악신문 - 김주현 기자


전국 소리꾼들의 등용문인 제9회 전국 동구리 전통민요 경창대회가 오는 23~24일 이틀간 양양문화복지회관 2층 대공연장에서 개최된다.
양양문화원(원장 윤여준)이 주최하고 양양군이 후원하는 동구리전통민요 경창대회는 지난 2017년 전국 대회로 격상돼 올해 3번째로 열린다.
올해 대회는 일반 단체부와 개인부, 학생부로 나눠 열린다. 단체부·개인부·학생부별로 최우수·우수·장려 각각 1팀씩 9팀과 통합 대상 1팀 등 총 10팀을 시상한다. 통합 대상은 300만원, 나머지 수상팀에게는 최소 30만원부터 150만원까지 상금이 수여된다.
참가부문은 농요와 어요, 노동요 등 전통민요(신민요 제외)로 공고일 기준 대한민국에 주민등록이 등재돼 있는 국민이면 누구나 참여 가능하다. 다만 대통령상 수상자와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 전년도 동구리 경창대회 통합대상 수상팀은 대회 취지를 고려해참가할 수 없다.
경연시간은 곡당 5~7분 이내이다. 고수 및 반주는 출전 측에서 준비해야 한다. 3~5인으로 구성된 심사위원회가 심사하며, 동점자가 발생할 경우에는 개인은 연장자순, 단체는 참가 인원이 많은 순으로 정한다.
양양 동구리 경창대회는 조선왕조실록 중 세조실록 권38의 세조대왕 강원도 순행일지 기록에서 유래됐다. 이 기록에 따르면 세조 12년(1466년) 세조가 강원도를 순행하기 위해 양양 낙산사를 지나 연곡리에 머무를 때, 왕이 직접 명하여 농가를 잘 부르는 이를 모아 장막 안에서 노래를 부르게 했는데, 그 중 양양관노 ‘동구리’의 실력이 가장 뛰어났다고 한다. 이에 세조는 동구리가 관노임에도 불구하고 악공의 예로 어가를 따르도록 했다. 양양군은 이에 주목해 지난 2001년부터 동구리 전통민요 경창대회를 열고 있다.
도 단위 대회로 개최하기 시작한 2011년부터 지난해까지 262개 팀, 1,022명의 소리꾼이 참가했고, 두 번째 전국대회로 치러진 지난해에는 역대 대회 가운데 가장 많은 53개팀, 138명의 소리꾼이 참가해 동구리 전통민요 경창대회의 위상을 드높였다.
윤여준 양양문화원장은“올해 대회도 전국 소리꾼들의 수준 높은 등용문으로 열릴 것으로 기대된다”며“동구리 경창대회가 인재발굴과 함께 전통문화콘텐츠로 자리매김 하도록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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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동구리 전통민요 경창대회가 오는 23일부터 양양에서 막이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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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23일부터 제9회 전국 동구리 전통민요경창대회
2019.08.22 업코리아 - 김정호 기자


일반부 단체 13팀, 일반부 개인 43팀, 학생부 6팀 등 62개 팀 참여 오는 23일부터 24일까지 이틀간 양양군 문화복지회관에서‘제9회 전국 동구리 전통민요 경창대회’가 개최된다‘. 동구리 경창대회’는 관노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노래 실력으로 조선 세조로부터‘악공의 예’로 대우받은 양양지역의 소리꾼 동구리를 기리고, 우리 음악을 보전·전승하기 위해 지난 2001년부터 개최해온 민요 경창대회이다.그동안 양양문화원이 주관하는 지역행사로 개최해오다 지난 2011년부터 도 단위 대회로 격상했으며, 타 지역 경창대회와는 다르게 역사적 사실에 근거했다는 것을 고려해 2017년부터는 전국 단위로 확대 운영하고 있다. 이번 경창대회에서는 일반부 단체와 소리꾼이 참여해 농요와 노동요, 어요 등 전통민요를 통해 일반부 단체 13팀, 일반부 개인 43명, 학생부 6팀 등 전국 62개 단체가 실력을 겨룬다. 23일 예선과 24일 본선을 통해 통합대상 1팀과 일반부 단체 최우수·우수·장려팀 3팀, 일반부 개인 최우수·우수·장려팀 3팀, 학생부 최우수·우수·장려팀 3팀 등 총 10팀을 시상할 예정이다. 24일 본선 경연에서는 전년도 우승자인 송종석, 여울소리민요단, 한가람풍물패, 심사위원, 국악인 김소희, 이능경, 문도희 등이 초청공연을 펼친다. 또 경연에 앞서 세조대왕의 행차를 복원·재현하는 행사를 거행하는 등 이색적인 볼거리를 제공해 동구리 전통민요경창대회의 역사적 유래를 알려 나가기로 했다. 윤여준 양양문화원장은“대중적 명창보다는 전국 곳곳에 산재한 진정한 소리꾼을 발굴하는 행사로 동구리 경창대회를 진행한다”며, “이번 경창대회를 통해 국악 인재를 발굴하고, 지역의 문화콘텐츠로 확대·발전시켜나가겠다”고 말했다. 한편, 동구리 경창대회는 지난 18년 동안 우리 조상들의 생활감정이 담긴 농가·어가·노동요 등 민족의 소리를 보존·전승하는 데 일조해 왔다. 특히 도 단위 대회로 개최하기 시작한 2011년부터 지난해까지는 262개 단체, 1,022명의 소리꾼이 참가하는 등 민요의 저변 확대에 크게 기여해 왔다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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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에 피워낸 항일정신, 100년후 민주주의를 꽃피우다
[되살려보는 100년전 3·1운동]

2019.09.18. 강원도민일보 - 김여진, 김진형 기자


지난 3월 도청사 전면에는 안중근 의사가 쓴‘대한독립’태극기를 중심으로 도출신독립운동가 10명의 초상이 대형 현수막으로 걸렸다.권인규·류인
석·남궁억·윤희순·이소응·박용만·민긍호·조화벽·이강훈·최양옥.이들 모습이 ‘100년의 함성,평화와 번영으로’라는 문구와 함께 등장,감동을 선사
했지만‘이름조차 처음 듣는다’는 도민들의 반응들도 적지 않았다.3·1절 100주년이 되어서도 잊혀진 이름들…‘20세기 마지막 독립운동가’로 불리는 철원 출신 이강훈 지사,버선목에 독립선언
서를 숨겨와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양양 만세운동의 불씨를 지핀 양양 출신 조화벽 지사의 이름을 다시 소환해 그 결기를 되살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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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3년 3월 17일 거행된 육삼정 의거로 백정기 의사와 함께 체포돼 중국 상하이 일본 영사관 감옥에 투옥된 이강훈 지사.(사진 왼쪽)



■ 독립운동사 기록에 일생을 바치다
청뢰 이강훈 지사

김좌진 장군과 항일투쟁 활동 1933년 천황사절단 암살 모의 해방후 윤봉길 의사 유해 송환“통일돼야 진정한 독립”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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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강훈 지사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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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강훈 지사 영결식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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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년 2월 18일 원산공원 환영민중대회에서 연설하는 이강훈 지사



지난 2003년 100세를 일기로 별세한 청뢰 이강훈 지사는 3·1운동부터 김좌진 장군과의 항일투쟁,4·19혁명,광복회를 거치면서 굵직한 현대사의 한 가운데에 있었고,눈감을 때까지 자신의
안위보다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을 걱정했다.


1903년 김화에서 종2품 참판 이기원의 아들로 태어난 이강훈지사는 1919년 16세에 고향에서 일어난 3·1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이듬해 북간도를 통해 상하이로 망명,임시정부 총리실에서 사
무직으로 1년간 일했다.1924년 북간도 사범학교를 졸업한 이 지사는 백두산 근방의 신창학교 교사로 후진양성에 전념하다 만주 일대에서 김좌진 장군이 벌였던 항일투쟁 활동에 참여했다.


이후 1929년 한족총연합회에 가입,동북만에서 활약한데 이어 해림에서 북만민립중학기성회를 개최해 민립중학 설립에 참여하는 등 교포 청소년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운동을 벌였다.


1930년 김좌진 장군이 암살당하자 상하이로 건너간 이 선생은 ‘재중국 조선 아나키스트연맹’을 개편한‘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담,이들의 행동단체인‘흑색공포단’을 결성했다.


1933년 3월 17일에는 백정기 의사 등과 일본 천황의 사절 아리요시를 암살하기로 모의했다.백범 김구 선생이 제공한 도시락형폭탄을 휴대하고 백정기 의사와 함께 거사현장에 도착한 이 선생
은 미리 준비하고 있던 일본 경찰들에 의해 체포된 후 그해 7월 일본 나가사키 형무소로 압송돼 15년형을 언도받았다.


같이 의거를 도모했던 백정기 의사가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옥사하고 이 지사는 일본이 패망한 후인 1945년 10월이 돼서야 출옥할 수 있었다.이 선생은 일본에 거주하며 김구 선생과 연락해 윤
봉길,이봉창,백정기 선생의 유골을 1946년 5월 국내로 송환해 효창공원에 안장하기도 했다.


광복 이후 재일한국거류민단 부단장으로 일하다 1960년 귀국해 한국사회당 총무위원으로 활동한 이 지사는 1961년 백범김구선생시해 진상규명투쟁위원회 부위원장을 맡는 등 민주화활동을
하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3년간 옥고를 치른 후 다시 일본으로 떠났다.


1967년 재귀국한 이 지사는 독립운동사 기록에 일생을 바쳤다.1979년까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조사실장,연구실장,편찬실장 등을 역임하며 10권에 달하는‘독립운동사’와 20권
이 넘는‘독립운동사 사료집’을 편찬했으며‘해외독립운동사’,’항일독립운동사’‘, 무장독립운동사’‘, 대한민국임시정부사’등을 집필했다.이같은 공을 기려 정부는 지난 1977년 건국훈장 독립
장을 서훈했다.또한 이 선생은 1988년부터 5년간 제10·11대 광복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고령에도 왕성하게 활동했다.이 선생은 광복회장 시절“통일이 안되고서는 독립이라고 할 수 없다.조국
과 민족을 위해 희생하신 분들의 뜻을 이어받는 것이 제2의 독립운동”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임병순 철원 향토사연구소장은 이 지사가 업적에 비해 조명받지 못한 이유에 대해“김화군이 남북으로 갈려 철원군으로 합병되면서 주민들의 관심이 다소 소홀했었다”며“철원읍의 박용만 선생
과 비교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분인만큼 이강훈 지사 선양사업은 꼭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강조했다.



■ 목숨 걸고 들여온 독립선언서(조화벽 지사)


양양 조화벽 지사
-10대때 독립선언서 양양에 전파
-1925년 유관순 오빠와 결혼해
-개성·원산서 항일운동 본격 투신
-1975년 별세·1990년 건국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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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벽 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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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유우석 지사 (유관순 열사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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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벽 지사와 가족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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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8년 3월 22일 양양정명학원 1회 졸업식의 모습.사진의 둘째줄 맨왼편 한복차림이 조화벽 지사다.



양양은 강원도내에서도 가장 마지막까지 3·1운동이 뜨겁게 이어졌던 곳이다.가장 오랜기간 치열하게 일어났으며 신교육을 받은 청년세대와 보수적 지역사회가 결합,조직적으로 진행돼 그 강
도 측면에서도 다른 지역을 압도한다.이곳 3·1운동의 불씨를 지핀 인물이 바로 10대 당시 독립선언서를 목숨걸고 비밀리에 들여온 조화벽 지사다.그는 사회참여에 눈을 뜨기 시작한 당대 여
성들을 대표하는 여성운동가인 동시에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노동운동가였고,애국계몽에 투신한 교육가였다.


1895년 양양 남문리의 개신교 집안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난 조화벽 지사는 원산성경학교와 루씨여학교를 거쳐 개성 최초의 여성교육기관 호수돈여학교 비밀결사대에서부터 활동했다.개성 만세
운동에 참여한 그는 조선총독부가 학생들의 3·1운동 참여를 막기 위해 휴교령을 내리자 양양으로 향했다.고향에도 시국상황을 알려야 한다는 일념이었다.일본군 감시를 피해 독립선언서를 숨
긴 곳은 버선목 솜 사이.경원열차와 뱃길로 대포항에 도착한 그는 경찰에 끌려갔지만 독립선언서가 발견되지 않아 그대로 고향에 갈 수 있었다.


이를 시작으로 피어난 양양 만세운동은 유교와 기독교 등 각 조직을 합치는 계기가 됐다.양양의 군중속에서 사촌동생 조연벽,친구 김정숙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일본군의 검거가 시작
되자 농촌 아낙으로 위장하고 한계령을 넘어 양구로 피신해 누에고치를 치기도 했다.이후 다시 개성으로 가서 호수돈여학교를 졸업한 그는 공주 영명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유관순 열사의 어
린 동생들을 돌보며 유관순 일가와 연을 맺었다.이미 유관순은 이화학당 진학하기 전인 어릴 적 양양으로 시집 간 고모 집에 놀라갔을 때 조 지사를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배화여학교로 발령
받을때 부모를 잃은 유 열사 동생 인석·관석형제와 함께 경성행 기차에 오르기도 했다.이렇게 오랜기간 이어진 조 지사와 유 열사 가족과의 인연은 유 열사가 숨진 후인 1925년 오빠 유우석과
개성에서 결혼하면서 더욱 깊어졌다.교사 급여 일부를 상해 임시정부 자금으로 지원하는 등 항일운동에도 본격 투신한다.아들을 얻은 후 시동생들과 함께 양양으로 거처를 옮겨 양양을 유관순
가족에게 제2의 고향으로 만들어주기도 했다.


원산 거주 당시에는 선박노동자를 위한 해원상구회 부회장을 맡고,노동자 거주비 인하를 촉구하는 등 노동권익 옹호에 앞장섰고,1932년 고향으로 돌아온 후 아동교육시설 정명학원에 나서는
등 교육사업에 집중했다.광복 이후 유관순 전기가 영화화,국민적 존경을 받자 남편과 함께 기뻐하기도 했다.남편과 아들 셋을 모두 앞세워 보낸 후 1975년 별세할 때까지 며느리 김정애씨와 지
낸 그는 1990년이 되어서야 남편 함께 사후건국훈장을 받고 애족장에 추서됐다.며느리 김정애도 3·1운동 여성동지회장으로 활동하며 시부모의 유지를 이어갔다.양양감리교회에는 지금도 조화
벽의 기도실이 남아있다.


이철수 양양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은“조 지사 이외에도 유림대 표로 양양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이석범 선생을 비롯한 지역 독립운동가들이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이 선생의 경우 유공자 신청을
했는데도 제외된 상황”이라면서“지난달 양양 3·1만세운동사를 발간하는 과정에서도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고 말했다.


도내 한 문화원 관계자는“도 출신 독립운동가들이 전국 단위 독립운동에 미친 중대한 역할과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연구성과나 자료 등이 부족하다”며“정부나 중앙단위 기관 등에서도 정확히
고증,선양할 수 있도록 지역 향토사 측면에서 먼저 집중 연구하고 그 위상에 맞는 대우를 받도록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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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준 문화원장 등 지역원로 3명 삭발
“부동의 결정 철회 때까지 투쟁하겠다”

2019.10.14. 설악신문 - 김주현 기자


윤여준 양양문화장을 비롯한 지역원로 3명은 이날 오전 11시 50분 남대천 고수부지에 마련된 단상에 올라 삭발하며 환경부의 잘못된 부동의 결정을 즉각 철회하라며 식발식을 가졌다.
윤여준 양양문화원장은“정명 600년의 무궁한 역사를 지닌 우리 양양군민들은 물론 강원도민들을 무시하는 환경부의 부동의 결정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 환경부는 즉각 해체하고 조명래
장관은 주민들에게 무릎 꿇고 사죄해야 한다. 부동의 결정을 철회할 때까지 싸워나가겠다”고 말했다.


이날 삭발한 전용우 양양군노인회장도“우리 노인들을 기만하고 약속을 뒤엎은 정부를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 우리 노인들도 부동의 철회와 오색케이블카 정상 추진을 위해 모든 사력을 다해
투쟁하겠다”고 밝혔다. 윤여준 양양문화원장을 비롯한 지역원로 3명이 삭발하며 오색케이블카 정상 추진을 촉구하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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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안권 문화원장협“오색케이블카 부동의 철회 촉구”
2019.10.18.(금) 강원도민일보 김진형기자


강원도동해안권문화원장협의회(회장 주기창)가 17일 고성에 모여 환경부의 설악산 오색케이블카 부동의 결정 철회를 촉구했다.지난 7월 창립된 강원도동해안권문화원장협의회는 이날 류종수 도문화원연합회장과 주기창 고성문화원장,김계남 속초문화원장,윤여준 양양문화원장,최돈설 강릉문화원장,오종식 동해문화원장,김대화 삼척문화원장 등 동해안권 6개 문화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첫 회의를 개최,결의문을 채택했다.이들은“오색케이블카 설치 사업이 환경부가 요구한 보완점을 여러 해 걸쳐 진행,결과물을 제출했는데도 환경단체들의 입장만 받아들인 것은 매우 부적절하며 부동의를 반드시 철회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김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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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 농협 취약농가 주거환경 봉사
2019.11.20.(수) 강원도민일보 최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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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H농협 양양군지부(지부장 고영배)와 속초준법지원센터(소장 최승학),양양문화원(원장 윤여준)은 19일 현북면 한 농가에서 도배, 장판교체 등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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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문화원 문화학교 작품전시회
2019.12.04.(수) 강원도민일보 - 최훈기자


양양문화원(원장 윤여준)은 3일 문화원과 일출예식장에서 문화학교 수료식과 작품전시회를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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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양문화원(원장 윤여준)은 3일 문화원과 일출예식장에서 문화학교 수료식과 작품전시회를 개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