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북부선 종착지 양양역

2. 수기(手記) - 김찬수(남.81) 당시 강현면 중복리. 2020.10.26

페이지 정보

조회 1,065회 작성일 2021-03-01 15:06

본문

2. 수기(手記) 

 

▶ 김찬수(남.81) 당시 강현면 중복리. 현 춘천시 동내면 거두리 1125-1. 2020.10.26

 

train_페이지_130_이미지_0002.jpg

수필가 김찬수


내고향 낙산사역(洛山寺驛)


낙산사역(洛山寺驛)은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정암리에 소재한 기차 역(驛)이다.

그리운 내 고향 양양(襄陽)에 있는 역(驛) 이름이다.

 

train_페이지_131_이미지_0001.jpg

 

 

역에서 서쪽을 올려다보면 바로 눈앞에 웅장한 설악산 대청봉이 남북으로 길게 우 뚝하고 다시 뒤로 돌아서서 동쪽을 내다보면 동해바다가 왼편 북쪽 밧독재(외옹치:外 瓮峙)앞 먼 바다로부터 오른편 남쪽 낙산사 꼭대기 위로 펼쳐지는 넓고도 넓은 푸른 바다와 아득한 저 멀리 수평선은 가히 천하 제일가는 고장에 서서 바라 볼 수 있는 느낌을 갖게 되는 곳이다.


내가 1945년 해방 되던 해 이른 봄 할머니와 어머니 손에 이끌려 한살 아래 남동생 과 같이 함경북도 종성에서 기차를 타고 고향엘 와서 내린 역이다.

그때 다섯 살인 나는 기차를 처음 타 보았다.


빠~앙! 하는 경적소리와 칙 칙 폭폭 하며 미끄러지며 달릴 때에 내는 소리를 들으 며 청진 함흥 원산 안변 통천에서 부터 왼편으로 푸른 바다, 동해가 내다보이는 낭만의 기차여행 이었다고 훗날 그저 짐작이 갔을 뿐이리라.


다섯살 박이 네살 박이가 무슨 낭만을 알았겠느냐 마는 해금강을 지날 땐 어른들이 법석을 떨며 저기를 보라고 손가락질을 할 때 나도 같이 차창 밖으로 해금강의 여기 저기 기묘한 바위산을 신기하게 내다보았던 기억이 떠오르는 듯도 하다.


고향에 와서 할머니와 어머니는 친척 잔치 집일을 거들며 며칠을 보냈다.

그 며칠 머무르는 사이에 나의 가정에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 듯 한 슬픈 일이 벌어 졌다.

나와 내 동생이 유행병인 홍역에 걸린 것이다.

네 살 박이 내 남동생은 홍역을 앓다가 고향에서 세상을 떠나 차가운 땅에 묻혔고 나 도 열이 펄펄 나며 앓아 어머니와 할머니는 급한 김에 나를 안고 큰 병원이 있는 원 산으로 정신없이 떠났다.

이때의 초조함을 어머니는 평생 잊지 못하셨다.


원산역을 향해 달리는 기차 안에서 고향에 묻힌 네 살 박이가 가지 말라고 울며 어 머니 뒷 치맛자락을 붙들 듯 했었고 열이 펄펄 다섯 살 박이는 어서 원산 병원으로

달려가자고 늘어져 있고....

내 어머니는 그때의 어찌 할 바를 모르던 초조함을 만년을 마치실 때 까지 울음으로 회고 하셨다.

마음이 급해 달리는 기차 안에서도 앉아서 열이 펄펄 나는 나를 안고 기차와 함께 달렸다고 훗날 어른들은 회상 했다.

 

 

train_페이지_132_이미지_0001.jpg

원사역사 옛 모습


당시 원산에는 구세병원과 고려병원이 있었다. 아버지가 객지생활하며 지내셨던 옛 추억의 객지살이 집 팔용 아저씨 댁의 할아버지 가 저렇게 사경을 헤매는 애를 데리고 종성까지 간다니 말이 되느냐며 고맙게도 당신 집에 머무르며 애를 살린 후에 떠나라 하였다.

나는 구세병원에 9일 동안 입원치료 중 신약 페니실린을 맞고 신기하게도 살아나 6·25전쟁 전 후에는 소년 시절을 고향에서, 그 후 이산가족 상봉으로 거제도와 부산에 서 피난생활을 겪고, 이후 서울을 거쳐 지금은 춘천에서 지내고 있다.


종성(鍾城)에서 원산 구세병원으로 급히 오신 아버지 따라 우리 가족은 다시 아버지 근무지 종성의 우리 집으로 왔다.


한 다섯 달 쯤 뒤에 우리나라는 일제치하에서 '8.15 해방' 을 맞았고 그해 9월에 내 여동생이 부령에서 출생했다. 해방둥이 귀여운 여동생이다.

해방을 맞은 그해 늦가을,

아버지는 우리 가족을 이끌고 고향 길에 올랐다.

우리 가족이 타고 가는 기차 길 종착역은 낙산사역이다.

그 다음엔 동해북부선 최남단 종착 양양역(襄陽驛)이 있다.


아버지가 가재도구를 다 정리하고 우리 집 전 재산이라 할 큰 가방이 달랑 귀향여 행 보따리였다.

어머니는 갓 출생한 여동생을 안고 할머니는 다섯 살인 나를 업고 아버지는 묵직한 가방을 들고 열차 기차 통 맨 앞 칸에 몸을 실었다.


기차가 덕원 역에서 머무를 때였다.

열차를 갈아 탈 때로 기억된다.

우리 일행이 플랫폼에 기다릴 때 갑자기 로스케(소련군 병사)가 벼락같이 나타나 아버 지 가방을 들치기 했다.

화들짝 놀란 아버지가 쏜살같이 달아나는 로스케를 뒤 쫓아 갔는데 한참 지나도 오시지 않자 무녀 독남 아버지만 바라보며 이제껏 살아오신 할머니가 통곡을 하며 “아범이 돌아오지 않으니 필시 로스케가 총질을 한 모양이다. 내가 무슨 낙으로 살 랴!” 하며 플랫폼 아래의 기차바퀴 밑으로 떨어져 죽겠다고 큰소리로 엉엉 울며 애절 하게 절규했다.

할머니 등에 업힌 나도 무서운 분위기에 그만 울음을 터트렸다.

한참 뒤 아버지가 어께가 축 쳐져 맥나간 모습으로 빈손 되어 돌아왔다.

우리 집 전 재산을 잃었다.


낙산사역에 도착 한 우리 가족은 지친 몸으로 옛 조상님의 터전 복골(강현면 중복리)을 향해 걸었다.

이때를 할머니가 회상했다.

“그리운 고향을 찾은 길이라지만 오리가 되는 길이 십리도 더 먼 길이라 느껴졌다.” 고향에 돌아온 우리가족은 일가 아저씨 댁 반 재집(반은 기와가 덮인 초가집) 뒷방에 여장을 풀었다.

고향에 돌아온 우리 가족이지만 금의환향 한 것도 아니고 그때부터 인공치하에서 감 시를 받으며 모진 시련을 겪고 1950년 2월까지 5년 남짓 고통세월 속에서 살았다.

할머니가 들려준 그 옛날 아버지 이야기이시다.


1922년 봄 아버지가 여섯 살 되시던 해 부터 복골에서 천자문을 배웠다.

훈장은 영서지방 인제출신의 선비 유학자 정기빈 선생이었다.

당시 유학자들은 보통 서당이란 교육시설에서 훈장자격으로 후학을 가르쳤는데 서 당 밖의 또 한편에서는 유학자 선비들이 이 동네 저 동네를 전전하며 동리의 어린이 들을 모아놓고 한문 공부를 시켰다.

요즈음으로 말하자면 흔한 영어 수학 보따리 장사 즉, 사설 과외선생(훈장) 이다.


여덟 살에 대포소학교를 졸업하고 열일곱 살이 되던 해 아버지의 권유로 원산으로 유학길에 올라 5년 뒤에 판임관 시험에 합격하고, 함경북도 웅진(지금의 청진) 면소 에 근무하다가 부면장을 지내기도 했다.

1945년 해방이 되어 귀향한 아버지는 인공치하에서 아야진 소재 오호중학교에서 교 사로 잠시 재직했으나 일제 때 '판임관' 시험에 합격 한 사실로 인해 친일분자로 지목 받아 파면되었다.


고통의 세월이라 했지만 점점 성장하는 나는 철부지 어린 시절을 어른들 귀염 속에 서 한동네 위아래 나이 벌 친구들과 어울려 동심 속에 철없이 지냈다.

어찌 보면 어른들은 공포와 두려움속의 삶이었지만 나는 소꿉친구들과 어울려 신나게 지낸, 행복의 고향에 살았다고도 생각이 된다.


1948년 4월 나는 강현면 인공 체제 회룡인민학교에 입학했다.

그해 여름 나는 할머니를 따라 기차를 타고 나의 생명의 은인 원산 팔용 아저씨의 부친 댁에 여행을 갔다.

다시 동해북부선 최남단 종점 양양역(襄陽驛)에서 출발한 기차를 낙산사역에서 타고 먼 길 기차 여행을 한 것이다.

대포역을 지나 속초역 그리고 점점 멀리 해안을 따라 금강산, 해금강을 지날 땐 절경의 풍경을 신기한 듯 바라본 추억이 뚜렷했다.

통천 역을 지날 땐 그해 짜 맞추기식 한글 실력을 겨우 뽐내며 복잡한 역 이름을 긴 가민가하며 어물어물 읽기도 했다.

“통천”!

원산에 도착해서 나는 할머니와 생명의 은인 집에 도착했다.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은인 댁의 팔용 할아버지께 큰절을 드리다가 그만 할아버지 무릎 앞에 어찔하여 고꾸라졌다.

절을 받으시던 할아버지가 “얘가 기차 멀미를 하는군! 어서 안방에 쉬게 해라” 하셨 다. 자상한 할아버지 이셨다.

사실 나는 철이 들어 갈 때 오랜만의 기차 여행 이였기에 할아버지 앞에서 무릎을 꿇 는 순간,

기차가 역에 도착 할 때마다 ‘덜컹’ 소리를 내며 멈출 때라든지 출발 할 때 또 ‘덜 컹’ 소리 내며 달려 갈 때 느낌을 큰절 인사를 드리면서 순간적으로 연상하다가 어찔 해서 앞으로 고꾸라졌던 것이다.

며칠 머무른 여행이었지만 커다란 석유탱크가 많이 있은 것도 보고 동해 제일의 절 경 이라는 항구도시 원산항도, 명사십리도 구경하고 원산 여행을 마치 뒤 고향 낙산 사 역에 되돌아 왔다.


이해,

지금 수도생활을 하는 내 둘째 여동생이 태어났다.

나의 9남매 형제 중 유일하게 고향 양양에서 태어난 여동생이다.


1949년 6·25 전 해 여름 나는 동네 조개잡이 가는 형들과 아재들을 따라 정암리 낙 산사역을 지나 역 앞 해변 가엘 간적이 있다.

가는 길에 우리들은 강현천과 역전 사이 하얀 모래사장 양 여가리(‘언저리’의 강원 도방언)에 가득히 피어있는 해당화 붉은 꽃과 열구(해당화 열매)를 마구 따 먹었다. 해당화 꽃은 아름다웠다.

우리 어린 시절 눈에도 가장 예쁜, 활짝 웃음 짓는 색깔로 강변 모래사장과 기차역 둑에 길고도 넓게 가득했다.

나는 그때의 고향 역 주변 놀이터와 해당화 꽃을 아직도 잊어버릴 수가 없다.


한여름 웅장한 설악산 대청봉은 강현천(둔전리와 송암산 밑 복골에서 합수 돼 바다로 내리는 작은 강)을 인자로이 내려다보는 듯 하고 넓고 푸른 동해 앞바다는 강물 아~! 어서 와 내 품에 안기 거라 하는 파도치는 손짓 이야기 느낌을 자아내는 고장이 바로 강현천을 안은 낙산사역, 강선리, 짐미(장산리) 버덩(벌판)이다.


1949년 초가을 우리 동네 아저씨들과 형들이 마른 소먹이 풀을 한 짐 가득히 지고 거의 매일 이다시피 낙산사역 넓은 마당에 모아다 놓았다.

소 등짝에 가득 짐 지워 날라 산더미 같이 쌓아 올렸다.

강현면 여기저기 고을마다 이 일에 열중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듬해 6월 25일 김일성의 인공정부가 남조선을 해방 시킨다며 불 법으로 새벽 기습 남침 할 때 우마차로 군 장비를 끄는 소와 말의 사료용 풀, 마초 (馬草)라 했다.


1950년 1월 초순 아버지는 할머니와 약속을 하고 어머니와 두 어린 딸을 데리고 아 무도 모르게 객지 연고지인 원산 팔용 아저씨 댁으로 피신을 하였다.

고향에는 할머니와 나만을 남겨두고 아버지는 속초 역에서 어머니는 두 딸의 손을 잡 고 낙산사역에서 출발했다.

속초 역에서 모두 만나기로 약속했다.

아버지는 그해 가을에 할머니와 나를 원산으로 부르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서럽게도 할머니와 나는 낙산사역으로 가 동해북부선기차를 타고 그립고 신기한 원산 행 여행 도 못해 보고 6월 25일 터진 전쟁으로 난데없이, 안타깝고 통분하게도 우리민족의 비 애, 이산가족이 되고 말았다.


1950년 6월 25일 내가 인민학교 3학년 되던 해 나는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개울마 을 냇가에서 멱 감고(물놀이) 놀았다.

그날은 좀 흐린 날이었다.

이튿날 학교엘 가서 조용히 공부했다.

다음다음 날인가 해서 담임 여선생님이 칠판에 한반도 지도를 그리고 38 선을 주욱 긋더니만 아래로 향해 백묵으로 화살 표시를 하며 조선민주주의 인민군이 이렇게 남 조선을 해방시키려 진격하고 있다며 모두들 박수를 치라고 해서 우리들은 전쟁과 해 방이 뭔지도 모르고 모두 따라서 박수를 쳤다.


6·25가 나고 두어 달이 되어가는 7월 20일 께 넘어서 우리들은 윗 개울 지소(닥나무 종이용, 한지 만드는 곳)있는 데에서 마침 낙산사역 께를 내려다보는데 동해바다 상공 에서 커다란 비행기 두 대가 낙산사역 상공에서 시꺼멓고 커다란 물건을 연달아 떨어 드렸는데 조금 있다가 구름같이 허연 연기가 역 상공으로 풀석 하고 일더니만 이어서 천지가 뒤흔들리는 천둥소리를 내었다. 대청봉 아랫산, 송암산도 크게 흔들리는 느낌이 났다.

두 대의 비행기는 다시 바다로 사라졌다.

뒤에 알았는데 B-29라 했다.

남쪽으로 내려 갈 전쟁용 군수물자가 폭격 된 것이고 이로 인해 그 아름다운, 우리 고장 모두가 자랑했던 낙산사역이 폭격을 맞아 눈 깜짝 할 사이에 그만 슬프게도 흔 적도 없는 잿더미로 변 했던 것이다.


6·25 발발 이듬해 초 1951년 1월 4일,

아버지는 가족과 함께 원산에서 미국 상선을 타고 월남하였다.

최종 도착지는 거제도 장승포항이다.

아버지는 4만 명이 운집한 파난 민을 대상으로 통영교육청 관할 하청중학교 연초분 교(河靑中學校 延草分校)를 설립하고 교장임무를 시작으로 이 후 부산 청구, 혜화, 서 울 혜화, 보성고등학교에서 교직 수행 중 한학과 역사학 국어학 연구에 일생을 바쳤 다 할 수 있다.


소시 적 양양군 강현면 중복리 촌구석 서당에서 열심히 수학한 한문 실력이 장차 우리나라 고전번역, 한학, 국학계에 큰 출발점 되었다.

1954년 부산에서부터 시작해 1987년 서울에서 작고하실 때 까지 고전번역과 국학연구 발표와 사학연구에 몰두하였고, 특히 1984년 문교부에 승인을 받고 서울 성북동 집에 설악정사(雪嶽精舍)란 한문서당을 개설 국내 대학교에서 한학을 정진하는 대학교수들 을 상대로 한학지도 강술을 하였다.


이 후 우리나라 최초 현대문 완역본 삼국사기, 고려사와 가장 난해하고 어렵다고 하는 다산 정약용의 한자용어 해설집 아언각비, 속동숙병감,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 해동명장전, 동국병감 등과 검인정 고교 한문교과서, 한자사전 최초 신 부수일람표(고 교한문교과서에 수록)등 38책(64권)의 번역서와 저술서를 출간하였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문화계 학술논문을 발표하였다.


특히 『삼국사기』와 『고려사』 현대문 최초 완역 출판을 시발점으로 우리나라 학계에 왕성한 고전번역 연구 붐에 시동을 거는 계기를 마련한 국학계의 최고 선구자라 칭해 도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학자, 교육자라고 교육계, 학계 각인들이 평해 온다.


며칠 전, 2020년 10월 24일 나는 고향역 낙산사역 자리를 찾아가 보았다.

강현면 경관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수려한데 옛 철둑 위엔 여기 저기 듬성듬성 가옥들만 즐비하게 들어차 있고 있어야 할 낙산사역 그 자리엔 코레일 연수원 건물만 덩그러니 우뚝해 있었다.

여기서 내 가족의 마음과 꿈의 발길이 담긴 동해북부선 양양 낙산사역 이야기를 끝 을 맺는다.

코레일 건물외양은 새로워 보기는 좋았지만 낙산사역의 자리 옛 모습과 서정적 낭만 은 그 어디에서도 전혀 찾아 볼 길이 없었다.

 

train_페이지_138_이미지_0001.jpg

현 코레일 연수원 옛 낙산사 역 터

 

2020. 10. 26. 시인, 수필가, 화곡 김찬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