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북부선 종착지 양양역

2. 수기(手記) - 이종우 (남.87) 손양면 수여리 2020.9.22.

페이지 정보

조회 1,033회 작성일 2021-03-02 18:14

본문

2. 수기(手記) 

 

▶ 이종우 (남.87) 손양면 수여리 2020.9.22.


 

train_페이지_121_이미지_0002.jpg

양양문화원부설향토사연구소

이종우 고문


● 양양에 동해북부선 종착역인 양양역이 생겨 교통문화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양양사람들은 양양에 기차역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서울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주로 오색령을 넘어 인제를 경유 하였다 한다.

  내가 네 살 때(4세)의 일이다. 1937년 12월 1일 양양에 기차역이 생기면서 교통문화가 확 바뀌고 양양은 영동지방의 교통요지가 되었다.

  당시 나는 ‘뻥-!…’ 하는 기적소리 처음 들었고, 허연 연기를 내뿜으며 ‘칙칙폭폭 칙칙폭폭’ 소리 내며 달리는 시커먼 기차라는 것을 처음 보았으며, 기차를 처음 보았을 때 신기하다는 생각 없이 저런 것을 사람들이 타고 다니는구나. 그렇게만 생각했었다.

  영동사람들이 서울로 가기 위해서 양양역으로 모여드는 사람들로 붐비었다.

양양역 이남 강릉, 삼척, 울진사람들이 ‘동해상사, 버스를 이용하여 양양역에 도착하고는 기차를 타고 안변역을 거쳐 서울, 평양, 청진방면으로 여행하였다.

  양양에 기차역이 생기니 교통의 편리한 이점이 있는가 하면, 일제가 양양의 자원을 수탈할 목적의 나쁜 점도 있었다. 그 한 면이 양양광산의 철광석을 가져가기 위한 것이었으니 그것이 바로 양양광산 선광장까지 철로를 개설하고 철광석을 운반하는 기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양양광산의 선광장에서 양양역까지 삭도[가공삭도(架空索道):케이불카를 이르는 말이며 당시 양양지역에서는 속칭 ’솔개미차‘라고 했다.]로 철광석을 운반하였으니 우물 두레박처럼 생긴 솔개미차에 실은 광석을 화차에 직접 쏟아 붓거나 임시 저장고에 쏟아 부을 때 콰르르릉 하고 나는 소리가 우리 집(손 양면 수여리)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 양양역과 역전의 변하는 모습


  양양역사(襄陽驛舍)를 대충 그려볼 수는 있으나 다른 역사(驛舍)보다 규모가 컸으며, 양양역사에는 매표구(賣票口)가 3개였다. 내가 다녀본 양양지역 역 중에서 속초역은 2개, 다른 역은 1개였었다.

  당시 여객열차는 아침 9시경 출발하고 저녁 5시경 도착하였으니 1일 1회 왕복하는 편 이였다. 그러니 외지 여객들은 양양역전의 여관에서 최소한 1박을 하게 되었으니 여관 여인숙이 성업하게 되었다. 양양역전 여관 중에 ’진원섭‘씨 여관이 2층으로 제일 컸으며 진원섭씨 동생 ’진원복‘이 내 동기동창이었으므로 가끔 놀러 가기도 했다.

  진원복 친구와는 6·25 한국전쟁 중 헤어졌는데, 양양역사는 1950년 7월 23일 석양 무렵 미군의 함포사격으로 완전히 소실되어 그 형체는 찾을 길 없고 그로 인하여 양양에서는 기적소리가 끊기게 되었다.


● 양양역의 향수에 젖은 양양의 어른들이 생각난다.


  양양의 기차역 소재지는 양양읍 청곡리였으나 양양사람들은 통상 연창역(連昌驛)이라고 불렀다. 고려시대 이래 양양의 역로(驛路)에는 인구, 상운, 오색, 연창, 강선에 역 (驛)이 있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상운도 찰방(察訪:종6품 관직)이 16개 역을 관리하였었는데 연창역 내에 찰방이 근무하던 상운관(祥雲館)이라는 관청이 있었다. 세월은 바뀌었으나 연창역의 직능을 지우지 아니하고 그대로 따른 것으로 보이며 또 한 기차역이 연창리와의 거리 지척이니 연창역이라 불렀으리라 여겨진다.

  현재 연창리에 소재하고 있는 양양읍사무소로 가는 길에는 “관아길”라는 도로명주소가 있는데 이는 상운관이 소재하고 있었기에 붙여진 도로명이다.


  향수에 젖은 양양 어른들의 정서가 담긴 『巽陽面勝覽誌』(손양면승람지:1954년)의 내용 중 일부를 다음과 같이 추려 옮겨본다.


  연창리에서 남대천 건너 남쪽을 바라보면 고월산(古月山, 孤月山)이 마주하는데 고월산에 올라서면 동쪽은 망망한 만리 창해, 남쪽은 동면평야. 서쪽은 현산(峴山)이 대립하고, 북쪽은 낙산사를 바라보게 된다. 고월산에서 설악산을 바라보다가 굽어 오른쪽을 내려다보면 철교, 왼쪽을 내려다보면 남대천교[지금은 철교는 없어졌고, 남대천대교와 낙산대교가 신설되어 있음]는 동해안을 통하는 남대천교와 인도로 이용하는 철교 이 양 교량은 영동의 최대 가설로서, 이 고월산을 가운데 두고 아래로 위로 놓여 있고 바다와 같은 강물이 만폭의 비단을 펼쳐놓은 듯 아름답고 담박하여 소리 없이 흘러가니 마치 은하수에 다다라 오작교를 바라보는 듯 천경상계(天京上界)가 분명하다.

  춘화추월(春花秋月)에 가인제자(佳人弟子)들의 청사옥호(靑絲玉壺)와 금낭시절(錦囊詩節) 왕래부절(往來不絶)함은 용지불알(用之不謁)하고 취지무금(取之無禁)하는 천고풍월(千古風月)의 주인공으로서 천연적인 조건을 부여하였거니와 개인 가을 맑은 밤에 반륜고월(半輪孤月)의 밝은 그림자가 양양전경(襄陽全景)을 휩싸고 남대천 물을 따라 흘러가니

  “아미산월반륜추, 영입평강강수류” [(峨眉山月半輪秋, 影入平羌江水流) / 가을철 아미 산에 밝은 반달이 떴으니, 달그림자기 평강강에 잠겨 흐르네.]란 아미산에서 읊은 고시가 이 산의 야경을 그대로 그려놓은 것이 아닌가 한다.

  이와 같은 고요한 달밤에 풀자리에 주저앉아 꽃가지를 휘어잡고 한잔 술을 마시려니 연창역에서 떠나는 기적소리는 천객소인(遷客騷人)이 그 뉘기냐? 이정천리(離情千 里)의 향수를 자아내고 태평루(太平樓)에서 들려오는 은은한 퉁소 소리는 태평성대를 자랑할 쩨

  “수가옥적암비성, 산입춘풍만낙성”[(誰家玉笛暗飛聲, 散入春風滿洛城) / 누구의 옥피리 소리 고요히 날아드는데, 봄바람에 흩어져서 낙양성에 가득하구나.] ‘라고 한 고인의 시구는 낙성(洛城)이 아니고 양양성(襄陽城)이 아닌가 한다.’

  이 같은 어른들의 향수에 감흥 되어 나도 한 수 다음과 같이 읊어본다.


〈연창역의 기적소리〉

고요하고 달 밝은데

풀 자리에 주저앉아

꽃가지 휘어잡고

술 한 잔 마시련데

연창역 기적소린

이정향수 자아내네.

태평루의 높은 다락

퉁소 소리 은은하고

복사꽃 살구꽃이

양주성에 가득필째

연창역 기적소린

천객소인 불렀노라.


● 동해안에서 가장 긴 양양철교의 위를 뛰어보기도 했다.


  양양의 철교는 지금의 위치로 보면 북쪽은 동양농기계가 위치한 곳에서부터 송현리 양수장 옆 비아가 있는 곳까지 약간 굽은 상태로 교각은 21개가 설치되고 교각마다 갈 지(之)자 형태인 지그재그로 좌우에 1개씩의 대피 공간 철제구조물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교각과 교각 사이에는 철제빔이 얹어져 연결되었고 레일은 설치하지 않은 미완성의 철교였으나,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중앙으로 20㎝정도 너비의 송판 2장을 연이어 깔아 놓았으므로 양양시장으로 빨리 가려고 할 때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이 철교를 이용했으며 나도 이 다리를 여러 번 건너보았으며 호기심과 만용으로 달려 보기도 했다.

  일제가 말하는 소위 대동아전쟁(2차세계대전) 시기 일제는 철제의 고갈로 1944년경 철제빔을 철거해 갔다.

  8·15해방 후 북한에서는 상판 철제빔을 다시 설치하였으니 레일은 설치하지 않고 6·25 한국전쟁을 맞게 되었었다.

  6·25 한국전쟁 이전 1949년경 철교 밑으로 임시 철로를 설치하고 금강리 앞까지 레일만을 깔고 기관차만 1회 운행한 바 있다.

 

train_페이지_124_이미지_0001.jpg

남대천 교각 옛 사진


  군정 시기 수여리 마을에서는 그 레일 4가락을 뜯어 수여리 마을 앞 말기 다리로 이용했었다. 레일 1개를 8목도로 떠서 운반했었는데 나도 한몫했다. 그 후 1군사에서 철거 회수하여갔다.

물론 철교의 철제빔도 그 시기 철거했다.


● 철도부설을 위해 주민들이 노임을 받거나 인부로 동원되었다.


  철도부설 당시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동원되어 사역하였으며 흙이나 자갈을 운반시는 작은 레일을 깔고 밀차(밀구루마)를 활용했다고 하셨다.

  철로에 사용할 질 좋은 자갈은 양양 남대천 변(남문리, 서문리 앞)에서 채취하였는데 양양역 에서부터 서문리 앞까지 레일을 깔고 기관차로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질 좋은 자갈을 운반하여 갔다.

  나도 손양공립국민학교 3학년 때(10세)에 나에게 배당된 자갈 한 하꼬(한 상자때기)를 어렝이로 자갈을 춰서 임무를 수행한 바 있는데 어린 힘으로 한 상자 채우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 기차를 타고 수학여행 다녀오다.


  일제 강점기 양양지역에는 지금의 초등학교 격인 소위 ‘○○공립국민학교’가 각 면에 1개교씩 있었는데 6학년 졸업반에서는 대부분 기차를 타고 건봉사와 금강산에 수학여행을 다녀왔다. 건봉사로 갈 때는 대진역, 금강산으로 갈 때는 외금강역을 이용했 었다.

  손양공립국민학교 내 3년 선배인 이주명(李柱明)씨가 금강산에 수학여행 갔다가 사온 괴면암 사진엽서 1장 선물 받은 기억이 까마득하게 생각난다.


● 양양군 청년들이 일본군에 강제 징용되어 양양역에서 고향산천 이별하다.


  1944년 12월 8일 손양면에서 강재징용자 만20세의 청년 17명이 모두 당시 일가친척 마을 주민들이 그의 무운장구를 기원하기 위해 만들어준 “센닝하리[せんにんばり(千人 針)]”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일장(日章)이 표기된 어깨띠를 두르고 손양공립국민학교 교정에 집합하여 당시 손양면장의 일장 훈시를 듣고 일본 경찰의 엄호 하에 도보로 양양 현산공원 내에 있던 신사 앞 광장에 도착하니, 이미 양양군내 강제징용 청년 들이 짐작 200여명이 집결하여 있다.

  가족들도 환송객들도 모두 함께 신사에 참배, 환송대회를 끝으로 일본 헌병의 인솔 하에 군가를 부르며 양양역에 도착하였다.

  양양역에는 이미 일장기를 X자형으로 기관차 앞에 매달고 대기하고 있던 특별열차에 200여명의 만20세 양양의 청년들이 몸을 실었으니 이것으로 마지막 이별의 눈물바다를 이룬 그 장소에 나도 끼어 있었다.


● 8·15해방 후 ~ 1950년 기간의 목격과 체험담


⓵ 러시아군이 기차 편으로 양양에 입성하다.


  1945년 8.15해방이 되자 어느 날 러시아군(소련군)이 온다기에 구경하려 남대천을 건너 양양역으로 달려갔다. 양양역 광장에 가니 러시아군을 태운 기차는 도착하지 않았나 이미 많은 군중이 모여 있었는데 알고 보니 러시아군 양양 입성 환영대회 격이었다.

  나는 구경하러 갔으므로 군중 속에 들어가지 않고 기차가 들어오는 철로 가까이 다가가 섰는데, 잠시 후 러시아군을 태운 기차가 기적소리 울리며 들어왔다.

  차창으로 내다보는 러시아군은 모자는 내가 학교에서 수공(미술/공작)시간에 접어본종이배같이 생긴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얼굴 모양과 눈빛이 우리와는 달랐다. 처음보니 이상스러웠다. 신기한 것은 눈의 빛깔이 파래 보였으며, 기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니 키는 커 보였다.

  환영 군중들은 지휘자의 구령에 따라 만세도 불러댔다. 기차에서 내린 러시아군은 대오를 지어 도보로 당시 양양공립국민학교에 진주했다.


⓶ 러시아군은 기차 편으로 양양에서 철수하다.


  1948년 어느 날(날자 기억안남) 양양역에서 러시아군 환송대회가 열렸다. 양양면내 남녀 중고등 학생 전원도 참가했다. 보통 때의 기차는 양양역 내에 정차해서 승객을 태우고 출발하는데 그날 러시아군을 태울 특별열차의 객차는 여럿 이어져 기관차가 역내를 벗어난 청곡리 마을 앞에 당시 빙고(氷庫)가 있던 곳의 앞쪽에 서 있었으며 환송 행사가 끝나자 기적을 울리며 기차는 서서히 출발하였으며 우리는 손을 흔들어 환송하였다.


⓷ 양양의 남녀 고급중학교(고등학교에 해당) 학생들은 기차 편으로 통학하다.


  당시 양양군의 행정구역은 지금의 고성군 죽왕면까지였고 남녀 고급중학교는 양양에만 있었으므로 자가 통학이 불가능한 양양 이북지역의 학생들은 일주일에 한 번만 집에 다녀올 수 있었다.

  당일 통학이 불가능한 학생들은 일요일 아침 기차로 귀가했다가 그날 저녁 기차로 등교하게 된다. 학생들은 학교기숙사에 입사하였으며 일부 학생들은 통학이 가능한 거리의 친척 집이나 하숙집을 구하기도 하였다.


⓸ 양양중·고교 하계수영대회 속초 청초호에서 개최하다.


  1947년 8월 초순 전교생은 각자 도시락을 지참하고 양양역에 집합하여 기차를 타고 속초역에서 하차하여 반별로 대열을 지어 함께 교가를 부르기도 하면서 청초호 선착장에 도착하였다.

  선착장은 나무로 되어 있었고 물은 맑지 않고 연못의 물보다 심하게 흐린 그런 물에서 수영대회가 열렸다. 호수에 배를 띄워 결승·반환점으로 하고 선착장 가장자리가 곧 출발선이자 결승선으로 하였으며, 하루 수영대회 일정을 마치고 우리는 모두 오던 길을 되밟아 속초역에서 저녁 기차를 타고 양양역에 도착 귀가하였다.


⓹ 동해북부선 기차에 몸을 싣고 북쪽으로 기차가 달릴 때의 환상, 낭만, 고통을 경험하다.


  1946년 12월 바람도 세차게 부는 몹시 추운 날, 얇게 2중으로 언 남대천 물을 건너 5리가 넘는 날 버덩 길을 걸어 양양역에 도착하여 표를 끊고 출발시각이 되어 개찰구(改札口)를 통과하여 내가 오른 객차에는 객차 내에 나무 난로가 하나 있는데 (다른객차에는 물로 반죽한 무연탄 난로도 있었다.) 땔감은 생장작이라서 불을 피울 수 없이 꽁꽁 언 몸을 녹이지도 못하였으니 이를 고통이라 할까. 낭만이라 할까. 어찌 되었건 달리는 기차의 차창 밖의 설악산 풍광은 웅장하게 보이나 검은 색깔이 간성까지 이어지고, 간성을 지나니 산의 풍광은 오밀조밀하게 산색이 밝게 보였다. 그날따라 추위에 바람이 세게 분다.

  차창 넘어 번갈아 동해안 쪽도 바라보는데 발밑에선 레일 이음새를 철 바퀴가 넘어가는 딸깍딸깍 소리 이어지고 연신 기적소리 방방 울어대며 골을 지나고 산허리를 뚫고 달리는데 기관차의 화통에서 내뿜는 연기인가 증기인가 허연 연기가 마치 ‘한 폭의 기다란 하얀 비단 한 필을 끌고 달리는 것 같은데’, 골을 누비고 산허리를 휘어감으며 차례로 산을 넘어 푸른 동해의 새하얀 파도에 어우러져 잠기는 듯한 광경! 다시는 볼 수 없는 광경! 아! 참으로 낭만이었으며 이제는 그려 볼 수도 없는 환상이다. 앞으로 동해북부선이 다시 개설된다 하더라도 조물주인들 그러했던 환상적인 풍경을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다.

  몇 정거장을 지났는지 장전항(長箭港) 정어리 기름공장 옆을 지날 때는 이 허연 비단 필이 정어리 공장에 쌓아놓은 덕을 휘감아 끌고 가면 어쩌나? 순간 공연한 잡념도 가져봤다.

  통천역(通川驛)을 지나 고저역(庫底驛)에 이르러 기차는 잠시 정차하고, 기관차는 단신으로 추지령 무연탄탄광(楸池嶺無煙炭炭鑛)에 가서 무연탄을 화차에 가득 싣고 한참만에 돌아와서 객차를 이끌고 달린다. 동해북부선 열차는 상행할 때나 하행할 때나 기관차의 연료인 무연탄을 이곳 고저의 추지령탄광에서 무연탄을 가득 채우고 증기기관차는 달린다.


 

train_페이지_128_이미지_0001.jpg

고저역사 옛 모습


⓺ 외금강역을 관광하다.


  당시 북한에서는 중등학교 졸업반 학생 중에서 2,3명씩 선발된 학생을 전국수학경연대회(우리의 수학경시대회와 같은 격임.)에 출전시키는데, 제1회 수학경연대회가 1950년 5월 1일 외금강여자중학교에서 시행되었으므로 나로서는 외금강역을 관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었다. 지금 기억에 고급중학교에서는 전광식 선배가 선발되었었고, 초급중학교에서는 나를 비롯하여 이동형, 양호석, 윤우중, 이기태 등의 학우가 선발되어 참가하였었다.

 

 

train_페이지_128_이미지_0002.jpg

외금강역사 옛 모습


  양양역을 출발하여 외금강역에 도착할 때까지 몇 시간 동안 차창 밖은 내다보지도 않고 시간을 아껴 예상문제 학습에 시간 가는 것도 잊은 추억이 되살아난다.

  외금강역은 일제가 우리 한반도에 시설한 기차역 중에서 제일 아름답게 잘 지었다고 했다. 2층으로 된 역사의 외벽과 내벽 바닥은 모두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무늬 있는 대리석으로 치장하였다고 했다.


⓻ 양양의 농민들이 원산에 가서 고등어를 사다가 비료로 썼다.


  비료가 부족한 양양의 농민들은 아침 기차를 타고 북강원도 도청소재지인 원산, 원산항에 가서 무진장으로 나는 고등어를 몇 가마니씩 사서 저녁 기차에 싣고 돌아와 썩혀서 비료로 사용했었다.

  우리 어머니도 마을 어른들과 어울려 원산항에 가서 가마니에 넣은 고등어를 사서 그날로 돌아오셨다. 저녁 기차가 도착할 무렵 우리 아버지는 소에 질매를 메어가지고 가시고 나는 지게를 지고 양양역에 가서 어머니가 사오신 고등어 가마니를 화차에서 내려 소 등에 싣고 지게에 짊어지고 온 기억이 생생하게 남은 것을 되새겨 추억하니 부모님을 추모하는 눈물이 볼을 적신다.


⓼ 6·25 한국전쟁의 대동맥 역할의 종창역인 양양역


  1950년 5월 22일 등굣길에 양양시장의 한 벽보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코무니케’ 제하에 “1950년 6월 28일 남조선의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이시영을 체포한다.” 이런 내용의 포스터를 보고, 내 나름대로 남조선 수뇌부를 체포하려면 그전에 여러 가지 조치들이 있어야 할 것인데, 남침할 것인가? 유격대를 침투시킬 것인가? 여러 가지를 예견해보면서 종형인 이종범(李鍾範)과 아버지께 말씀드리면서 시국이 이상해질 것 같으니 조심하며 지켜보자고 하였는데, 그 후부터는 기차가 부정기적으로 운행되면서 양양역전 도로변 부지에는 군수 물자들이 야적되기 시작했으며, 기차에 실려온 여러 대의 대포는 당시 양양군내무서 광장(지금의 양양군의회 앞 광장. 일제 강점기에는 양양경찰서)에 임시 정치(定置)하기도 했다.

  급기야 6월 20일부터는 기차를 이용하여 인민군병력이 양양에 집결하고, 6월 21일에는 탱크 20대, 6월 23일에는 탱크 21대가 기차에 실려 와서 지축을 흔들며 남대천을 건너 월리 강변 아카시아 숲속에 잠시 머물렀다가 그날 밤중에 38선 지역으로 전진 배치되었었다.


⑨ 1950년 7월 23일 양양역은 미함대의 함포사격 타깃(과녁)이 되고 말았다.


  당시 양양의 도평지구는 일부는 옥토, 일부는 초원, 일부는 백사장이었다.

  대부분의 농가에서는 집집이 소를 한두 마리는 사육하고 풀이 무성한 도평들 초원으로 손양면 송현리 수여리 금강리 송전리 가평리, 양양면 연창리 송암리 청곡리의 농가에서는 주로 어린이들이 목동이 되어 오후에 소를 몰고 나아가 소의 배가 띵띵하게 부르도록 소에게 풀을 뜯게 하니, 남대천 도평들의 초원에는 누런 소들이 떼를 지어 한가로이 풀을 뜯는 정경은 참으로 평화스러운 전원의 풍치가 아닐 수 없었으며 이런 풍치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1950년 7월 23일 오후 5시경 약간 흐릿한 날씨였는데, 미 군함 2척이 손양면 여운포리 앞바다에 나타나 머물다시피 하면서 서서히 북상한다는 소식을 들은 나는 집 뒷동산에 올라 내 동생(종관)이 버덩에서 소먹이는 풍광을 건너다보고 있었다.

  그때 미군 정찰기 1대가 가평리 쪽에서 남대천 버덩 위를 지나 양양역 상공에 이르러 여러 번 배회하더니 다시 가평쪽으로 날아갔다가 잠시 후 되돌아온다.

  돌아온 미군 정찰기는 양양역 상공에 높이 떠서 큰 원을 그리며 한 바퀴 도는데, 양양역 내의 기관고(기관차를 넣어 두거나 수리하는 차고)에서 시꺼먼 불기둥에 섬광이 번쩍 치솟아 오르더니 몇 초지나 벼락 치는 듯 쾅! 소리에 이어, 바다에서도 쾅!쾅!쾅!쾅, 양양역에서는 벼락 치듯이 쾅!쾅!쾅!쾅! 헤아릴 수 없이 수십 개의 화염에 양양역은 물론 역전 부근에 야적해 놓은 폭약도 일제히 폭파되었으므로, 이로써 양양역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 같은 석양녘 날벼락에 도평 버덩에서의 소떼들도 놀라 이리저리 후닥닥 들뛰는 혼란의 순식간이 연출되었으니 소들은 주인(목동)과 같이 줄행랑으로 집을 찾아 돌아가는 한바탕 아비규환이라 할까 소동이 일어났다.

  바로 이날 저녁 양양고급중학교 3학년 졸업생 일동이 인민군에 입대하기 위하여 학교에 집합하였다가 양양역으로 가려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일어났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