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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증언 <강현면> 추종삼 (남.81) 강현면 둔전리 202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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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010회 작성일 2021-03-02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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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증언  <강현면-6명>


▶ 추종삼 (남.81) 강현면 둔전리 202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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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중인 추종삼씨 모습


● 나는 동전으로 반지를 만들고, 어머니는 시멘트 포대로 공책을 만들어 주셨다.


  1945년 8월15일 해방 후 3·8 이북이었던 우리 동네 강현면 둔전리는 인공(人共)치하에 속해 있어서 나는 당시 회룡인민학교에 다녔다.

  그때는 지금처럼 공책을 따로 팔지 않은 시절이라 우리가 직접 백노지(두루마리종이) 사서 종이를 잘라 공책을 만들어 써야 하므로 가끔 학교가 끝나면 연필이나 백노지를 사러 물치 소비조합(문방구점)에 가곤 했었다.

  학용품을 사러 물치로 내려오면 또 한 가지 할일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기차를 구경하러 철길을 나서게 되는데,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철길에 귀를 대고 조용히 들어보면 아주 멀리서도 오는 기차소리가 철로를 타고 들려온다.

  그 소리는 기차가 가까이 오면 올수록 더 크게 들리게 되는데, 그때 철도 레일 위에 대못이나, 일본 동전을 몇 개를 드문드문 놓으면 기차가 지나가고 나면 대못과 동전이 얇게 펴지면서 늘어난다.

  그때는 어린 마음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일을 해낸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 와서 얇게 펴진 대못은 갈아서 칼을 만들고 그 칼로 얇게 늘어난 동전 속을 계속 깎아서 파내고 나서 동그란 모양이 만들어 지고 난 후 사포(砂布) 같은 것으로 문지르고 나면 실반지가 만들어지게 된다.

  그 당시에는 반지가 희귀하였던 시절이라 그 반지가 상당히 인기가 있었던 물건이 어서 친척집 여자들에게 주면 잘 대해 주었고 특히 당숙모가 척산에서 시집을 왔는데 실반지를 만들어 드렸더니 아주 좋아하셨으며 후에 시멘트 포대 종이를 모았다가 주어서 어머니가 공책을 만들어 주어서 어렵게 생활하던 그때 기억이 생생하게 난다.


● 낙산사역이 폭격으로 전소되었다.


  6·25 한국전쟁 전에 동네 인민위원장이 집집마다 말이나 소가 먹을 수 있는 꼴을 몇 십 관씩 베어서 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이는 전쟁 때 인민군 기마병들이 타고 다니는 말에게 먹일 마초가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둔전계곡의 학소암으로 가는 길에 풀을 베어 널어놓았는데 비를 맞아서 검게 말랐다고 받지 않아 다시 베어서 파랗게 말려 가져가니 저울로 달아서 기차역 옆에 쌓아 놓았는데, 이때 각 마을에서 갔다 바친 마초 가리가 학교 건물만큼이나 높이 쌓아져 있었다.

  그러나 그 산더미 같은 마초 가리는 6·25 전쟁이 터지고 난 후 7~8월쯤인가 우리 동네 방공호에서 내려다보니 미국 비행기가 연필처럼 생긴 폭탄을 떨어뜨리자 불이 확 붙더니 연기가 하늘을 덮었고 마초 가리에 붙은 불은 낙산사역 전체를 태워버리고 말았다.

  그때 어린마음이었지만 마초를 두 번씩이나 갔다 바친 생각을 하면 속이 다 후련했다. 그러나 전쟁 중이었지만 동네 사람들이나 인민군들은 하늘에서 공격하는 비행기 보다는 보이지 않는 바다에서 쏘아대는 군함의 함포사격을 더 무서워했다.


● 잊혀져 간 낙산사역 이별노래 가사의 첫 머리를 소개한다.


  기차정거장은 만남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이별의 장소이기도 하다. 누가 작사 작곡했는지는 모르나 정든 이를 낙산사역에서 보내면서 헤어져야하는 슬픔을 노래한 낙사사역 이별가로 불리어 졌는데, 

  그 가사의 첫 머리를 소개하면 “ 떠나는 낙산사 역이다. 언제 다시 오려나 ” 인데 그 당시 정든 님을 떠나보내며 애틋한 마음을 담은 노래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애창되고 있었지만, 이 노래의 전체가사를 아는 이가 몇 해 전에 돌아가셔서 아쉽게도 찾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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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역 옛 플랫폼 흔적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