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북부선 종착지 양양역

1. 증언 <강현면> 이상준(남.90세) 강현면 주청리 202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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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068회 작성일 2021-03-02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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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증언  <강현면-6명>


▶ 이상준(남.90세) 강현면 주청리 202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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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준씨 모습


● 장전 금강중학교에 기차를 타고 다니다.


  일제시대 낙산에 살면서 양양 소학교에 다녔는데 학교를 가려고 정암리에 있는 낙산사역까지 걸어서 다녔고, 가끔 낙산에서 기차를 타고 속초에 구경 다녔다.

  6학년 때 기차를 타고 4박5일 서울에 수학여행을 갔다. 여행비를 내지 못하는 친구들은 가지 못했다.

  양양역에서 저녁기차를 타고 갔는데 기차에서 자면서 서울에 도착하니 아침이었다. 우선 남산에 있는 일본 신사를 참배하게 했고 총독부, 화신 백화점, 또 다른 백화점등을 구경하고 창경원도 구경하였다.

  다음은 경인철도를 타고 인천으로 가는데 의자가 동해북부선보다 못했다. 인천에서는 월미도를 구경하는 등 선생님이 여러 곳을 골고루 구경을 잘 시켜 주었다.

  양양소학교를 졸업하고 기차를 타고 장전에 있는 금강중학교에 시험을 치러 갔다. 5년제 중학교인데 신입생을 65명을 뽑는데 일본 학생은 우선 1/3을 합격시키고 조선 학생을 뽑는데 입학시험을 치렀다.

  조선학생은 경쟁률이 엄청 높았는데 다행이 나 혼자 합격하여 기숙사에 들어가서 학교에 다니고 2주에 한번 씩 기차를 타고 집에 다녔는데 기차역 이름이 절(사찰)이름과 같은 곳은 낙산사역과 안변에 있는 석왕사역 뿐이었다.

  기숙사에 있으니까 반찬을 가지러 온다. 그 당시 강원도에는 중학교가 장전, 원주와 철원에만 있었고 강릉이나 춘천에는 농업학교, 상업학교가 있었다. 금강중학교에는 양양 학생은 3명뿐이었다.


● 기차역마다 일어나는 재미있는 일들이 많았다.


  그때는 강릉 사람들이 양양역에 와서 기차를 타고 서울, 원산, 만주, 간도로 가는 사람들이 타고 가기 때문에 승객이 많고 복잡했다. 승객들은 안변까지 와서는 여러 곳으로 노리까이(환승)하여 다른 지방으로 목적지를 찾아 갔다.

  기차가 가다가 다른 역에서는 잠간 머물지만 간성역, 고성역, 통천역에서는 오래 머물다 간다. 오래 머물면서 뜨거운 물을 공급받는다. 기차는 증기를 이용하여 가기 때문이다. 안변역에 도착하면 사과 장사를 하는 아주머니들이 창문에 사과 광주리를 들이대고 “사과 사요. 사과사요!”를 연발한다. 안변사과는 색깔도 곱고 맛도 아주 좋았다. 그래서 선물로 사과를 대나무 가구에 담아 팔기 때문에 사람들 마다 사과 가구(상자)를 들고 갔다.

  고성에 도착하면 빵 장사하는 아주머니들과 붉은 시루떡 장사를 하는 아주머니들이 다가온다. 승객들은 빵떡이나 시루떡을 사서 차에서 먹었다.

  화물칸에는 말린 명태와 목재를 많이 싣고 간다. 명태는 장전, 원산까지 가고, 목재도 장전과 원산 조선소에 하역하는데 인부가 4명씩 목도를 하여 내린다. 장전과 원산에 큰 조선소에서 양양에서 싣고 간 목재로 배를 만들었다. 조선소에서는 엄청 큰 군함을 만들고 있었고, 배의 색깔도 회색(국방색)을 칠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심화되면서 금강중학교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나기 시작하였다. 즉 학생들이 양양 남대천 철교를 철거하는데 중학생들이 동원된다는 것이다. 당시 양양 남대천 철교는 완전히 다 놓아 철교에 널판을 두 개를 놓아 사람들이 걸어 다니게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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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역사 개통식 현장 옛 모습


  그 엄청난 무게의 철교를 15세의 학생들이 어떻게 해체하느냐 하고 걱정들을 하고 있었는데 윗선에서 검토한바 중학생들은 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는지 취소되어 안도하였다.


● 북한 공화국 시대는 신분증이 없으면 기차를 타지 못했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어 기차가 일제강점시대와 같이 다녔다. 그런데 기차 방석이 푹신한 고급이었는데 어느 새 누가 방석카버를 뜯어 가서 딱딱한 나무판이 되어 엉덩이가 아팠다.

  일제강점시대에는 증명서 검사가 없이 그냥 기차에서 자유롭게 내렸는데 공화국시대에는 신분증 검사가 심하여 학생증이나 도민증이 없으면 기차를 타지 못했고 도착지에 가서도 나가지 못했다. 북쪽에 사는 사람들이 양양까지 기차로 와서 월남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은 양양에서 며칠 묵다가 안내원을 구하여 38선을 넘어 월남하거나 배편으로 38선을 넘었다. 우리 아버지도 월남하는 사람들을 소개하여 38선을 넘게 한 일을 보았다.

  막내 삼촌이 김일성을 좋지 않게 말한 게 누가 밀고하여 잡혀서 원산형무소에 갇혔다고 연락이 왔다. 집에서는 야단이 났고 미숫가루를 만들어 어머니와 기차를 타고 면회를 갔는데 미숫가루에 소금으로 간을 하여 만들었는데 소금을 넣었다고 받아주지 않아 그냥 가져왔다.

  옷도 죄수 색깔(푸른색)이어야 받아주었고 팬티도 죄수 색깔이어야 하는데 흰색 팬티는 허락이 안 되었다. 일제강점시대에는 형무소가 한 동 뿐이었는데 해방 후 공산주의가 정권을 잡으면서 죄수들을 시켜 형무소를 그 옆에 한 동 더 지었다.

  일반 범죄는 가볍게 벌을 주지만 김일성 가문에 대한 흉을 보면 엄하게 벌을 주었다. 그 후 삼촌은 아오지 탄광으로 보냈다고 하는데 생사를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