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북부선 종착지 양양역

1. 증언 <강현면> 손인호(남.82) 강현면 강선리 2020.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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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072회 작성일 2021-03-02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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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증언  <강현면-6명>


▶ 손인호(남.82) 강현면 강선리 2020.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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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중인 손인호씨 모습


● 강물이 불어나면 설악산 상류에서 통 나무로 뗏목을 만들어 옮겼다.


  강선리 토박이로서 왜정시기 일곱 살 때 소학교 1학년 이었는데 해방이 되고 조금있더라니 인공정치가 시작되자마자 바로 8월에 2학년으로 진급했다.

  왜정시기 소학교 때에는 일본말을 조금 배우다 말고 해방이 된 후 처음으로 ‘가갸거겨’를 배웠고 구구법을 모르는 학생들은 나머지공부를 시켰다.

  그 시절에는 장마철에 홍수가 나서 물치천에 강물이 불어나면 둔전리, 석교리 등강 상류 지역에서 나무를 베어 하천을 이용해 물 나무라고해서 통나무로 뗏목을 만들어 떠내려 보내 강선리 앞에서 꼬챙이로 찍어서 건져 올려 낙산사역으로 가지고 가서 기차에 싣고 북으로 들어가는 것을 종종 보았다.

  왜정 때에는 주로 설악산 피골 과 장재터 쪽에서 우차꾼들이 원목나무를 싣고 정암리 낙산사 역 목재하치장에 산적해놓으면 나중에 기차가 나무를 싣고 원산 쪽으로 들어갔는데, 아주 큰 원목을 화차위로 상차를 할 때에는 여러 명의 목도꾼이 나무를 옮겼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서부터 물치천에 물이 자주 범람하다보니 왜정시대에 강현면 전체 동네마다 인부를 동원해 강선에 제방을 쌓으려고 학구띠기를 했는데 그때는 모두등짐으로 일을 했다고 한다.


● 안변 사과 맛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우리 집안에는 나보다 14살 위인 큰댁 건호 형님은 왜정 때 대포소학교 졸업한 후 ○○에 있는 철도학교 졸업한 다음 함흥철도국으로 들어가 원산, 평강, 평양, 신의주 그리고 경원선 등의 노선에 차장 하시다가 나중에 평강 어느 산골의 작은 동네에서 역장을 지냈다고 한다.

  그 형님께서는 3년 전 90세 나이로 돌아가셨는데 군정 때인가 양양에서 술을 좋아하시는 이춘재씨 하고 동해일보 기자를 같이 하셨다.

  기차 승무원들의 가족은 요금이 무료이므로 어머니가 큰댁어머니와 미역, 오징어 등을 가지고 갈마역에 가서 장사를 하시다가 내려오시곤 하였는데, 그때에는 주로 조그마한 밤과 사과를 사가지고 왔는데 그 작은 밤도 맛이 있었지만 특히 안변사과는 엄청 맛이 있어 지금도 그 맛을 잊지 못한다.

  당시 나는 나보다 두 살 많은 사촌인 남호형님과 저녁 9시에 도착하는 기차시간에 맞추어 역에 마중 나갔던 기억이 나는데 그때는 어린 시절이라 사과를 받아먹는 재미로 나갔다.

  그때 어머니와 큰 어머니께서는 원산 밑에 있는 갈마역에 가서 장사를 하시다가 다 못 팔면 본역(원산)에 가서 장사를 하시고 내려오시곤 하였는데, 당시 낙산역에서 갈마역까지 기차요금은 북한 돈으로 81원인 것을 지금도 분명히 기억한다.


● 속초역까지 공짜로 기차를 타고 갔다가 올 때에는 걸어서 내려왔다.


  나는 가끔 큰댁 남호형님과 차장하는 건호형님의 이름을 팔아 속초역까지 공짜로 기차를 타고 갔다가 속초역에서는 건호 형님의 이름을 팔수 없어서 1시간 이상 걸려서 걸어서 돌아오기도 했는데, 그때는 어린마음에 기차를 타는 재미가 있어 걸어 올 때에는 힘이 든다는 것도 모르고 일단을 기차를 타고 본 것이다.

  그리고 6·25가 나기 전해에는 어머니 몰래 추석날 떡을 싸 가지고 기차를 타고 천진에서 선생을 하고 계시는 정호 형님 있어서 그 밑의 동생인 남호 형님과 함께 갔다가 돌아올 때에는 기차를 타고 내려온 기억이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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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역사 옛 모습


● 어머니와 큰 어머님이 낙산역으로 가서 학도병으로 차출되어가는 정호 형님과 이별을 했다.


  큰댁 정호 형님은 선생을 하시다가 그만두고 원산 제1고등학교를 다니다가 6·25가나던 해인 7월인가 2학년 때 학년말 시험을 보러 갔다가 시험을 보려던 그 학생들 전원이 몽땅 학도병으로 차출되어서 원산에서 기차로 내려간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와 큰어머니는 낙산역에서 정호형님을 보았다고 한다.

  그때 정호형님 외에 모든 학생들은 전부 학생복을 입은 채였다고는 말을 전해 들었 으며, 그 후 형님하고는 영영 이별을 하고 마는 슬픈 기억이 있는데 아마도 정호형님은 낙동강 전투에서 전사하였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 낙산사역 인근에 있는 도정공장 옆에 차단기가 있었다.


  강선리 사는 이상훈씨는 일정 때 서울에 가서 중학교를 다닌 후 정암리 낙산사역에서 한또카를 타고 다니면서 철로를 점검 및 정비 보수일을 하는 고구꾼 또는 고꾼이라 했는데 이 고구꾼들도 왜정 때부터 일본사람들이 사용하던 관사에 묶기도 하였다.

  그리고 낙산역의 기차선로는 양양역과 속초역을 오가는 원 철도선 옆으로 화물을 실을 수 있는 철로레일선이 별도로 있었다.

  원산 쪽에서 기차가 내려오면 정암리 끝 부분인 물치 쪽에서 깃발을 든 사람이 깃발을 흔들며 수신호를 하였으며, 역 부근의 도정공장(정미소) 부근에는 기차 차단기가 있었고 왜정 때는 잘 모르지만 인공 때에는 오학현씨라는 분이 정미소를 운영했다.


● 쌍 가달 비행기가 빙글 빙글 돌다가 역 구내 마초가리를 포격했다.


  6·25가 나던 해 추석 전 어느 날 같은 마을에 살던 친구 황돈태와 함께 당시 지금의 장산리 군부대 아래에 있었던 중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오는 하교 길에 쌍 가달 비행기가 빙글 빙글 돌다가 당시 낙산사 역사 인근 관사 옆에 쌓아두었던 가마니와 마초가리를 공습하는 것을 보았는데, 천지를 진동하는 폭발소리와 합께 불기둥이 솟아오르면서 마초가리가 타고 있었다.

  이때 나는 황돈태와 개울건너 아카시아 나무숲으로 뛰어들어 얼굴이 긁혀가면서 숨었는데 이때 역에 쌓아 두었던 마초가리와 가마니 모두가 폭격에 맞아 소각 되었지만 당시 역사 대합실은 화를 면했었다.

  그 무렵 바다에서 군함이 물치천의 철교를 폭파하기 위하여 함포사격을 가했으며 그 중 한발이 강선리 김성배 집 부엌에 떨어졌는데 다행히 불발탄이어서 무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