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북부선 종착지 양양역

1. 증언 <강현면> 장용진(남.90 강현면 정암1리 202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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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027회 작성일 2021-03-02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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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증언  <강현면-6명>


▶ 장용진(남.90 강현면 정암1리 202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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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중인 장용진씨 모습


● 용호리 눈 고개에서 서행하는 기차에 몰래 올라탔다.

정암1리에서 태어나서 8·15해방이 되던 해에 소학교 6학년을 졸업했고 6·25사변 시고급중학교 2학년 2학기 때였는데 대부분 걸어서 학교를 다녔으나 때로는 기차가 용호리 눈 고개를 올라갈 때는 서행하므로 올라타서 매달리어 가다가 양양역 부근에서 서행하면 뛰어내렸다.

  객차는 3~5칸이고 화차가 10여 칸이었는데 화차에는 군수물자를 싣고 다녔고, 철길로 학교를 다니는 경우가 많았는데 소학교 4학년 때 물치천 철교를 건너던 사람이 기차를 만나 사망사고가 나기도 했다.

  낙산역 간판은 한문으로 써져 있었으며 역 이외에도 1층짜리 커다란 역장관사가 있었고, 2층으로 된 관사 3~4동과 마루보시(제재소), 도정공장, 목재와 명태 야적장, 마초가리 등이 있었다.


● 기차역 관사 앞에 심어놓은 땅감(토마토)을 훔쳐 먹었다.


  관사에는 30여명 정도의 사람들이 살았으며 앞의 텃밭에는 토마토 밭이 있었는데 우리는 땅감이라고 부르며 훔쳐 먹었으며 관사 처마에 귤껍질을 말리고 있었는데 처음 보는 신기한 것이었다. 매일 관사 앞길로 학교를 다녔는데 우리들은 “미사리 새끼들 나와라!” 하고 소리 지르고 도망가기도 했다.

  사촌 큰형님인 장용주와 김남필의 작은 아버님인 김은북 씨가 명태 야적장과 도정 공장을 동업으로 운영을 하시는 바람에 쌀과 쌀겨를 가져다 먹으며 풍족하게 살았고 명태는 원산에 가서 팔았다.

  이때 우리 아이들은 명태 야적장에 쌓아놓은 명태 눈알을 빼먹기도 하였다.


● 기차역 여관 숙박계는 경찰서에서 검사를 받았다.


  인공 때 학교 기숙사 생활을 하기도 하고 이모사촌 형부이신 양재춘 씨가 운영하는 양양역 앞의 여관에서 일을 도와주며 지내기도 했는데 손님들의 숙박계를 기장해서경찰서로 가지고 가서 신고하고 검사를 받았다.

  여관에는 기차 판매원들이 묶기도 했는데 가지고 온 좌판에는 빵, 엿, 평양밤, 과자, 사탕 등이 있어서 조금씩 감춰두고 먹다가 걸려서 곤혹을 치루기도 했다.


● 대포리 고개위에 간이역이 있었다.


  고급 중학생 시절 축구부에서 골키퍼를 했는데 원산행 기차를 타고 원산 제1여고에서 원산 고급중학교와 축구 경기를 해서 이기기도 했는데 당시 대포고개에 간이역이 있어서 잠시 쉬어갔던 기억이 난다. 6·25전쟁 시 7월에 군대 신체검사 받으러 주먹밥을 싸가지고 원산 제1여중으로 기차타고 갔었는데 신체검사에서 마당발이라고 불합격 판정을 받고 귀향을 하게 되었다.

  그때 우리는 사정을 해서 겨우 증명서를 받아서 내려오게 되었는데, 올라갈 때에는 기차를 타고 갔지만 내려올 때에는 기찻길이 폭격으로 끊어져서 걸어 내려오는 길에 원산에서 중공 군인이 폭격을 받아서 사망하는 것을 보았다.

  그때를 회상하면 당시 마당발이 나를 살렸으니 천만 다행으로 여기며 지금껏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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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역 관사위치를 증언하시는 장용진씨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