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북부선 종착지 양양역

1. 증언 <서면> 이달형 (남.85) 서면 서선리 202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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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041회 작성일 2021-03-02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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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증언  <서면-2명>


▶ 이달형 (남.85) 서면 서선리 202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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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중인 이달형씨 모습


● 마을 앞 철도부지가 개인소유의 논이었다.


  8·15 해방되기 전 일제가 양양광업소를 개설하면서 광산일대의 부지일부와, 마을앞 철도길 부지가 서선리 주민의 개인소유 논이었는데, 이를 강제로 빼앗은 대신 광산에 일자리를 주었다.

  대부분 힘든 노동일은 시키지 않고 고급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측량기사, 소학교 졸업한 사람은 시추 반에 넣어 주었는데 이때 우리 부친도 논을 빼앗기고 시추 반에 들어가서 일을 하였다.


● 서선리 탑동골짜기에는 사택들이 즐비했다.


  일제가 광산에서 철을 한창 채굴할 무렵 광산지역 인구가 3만 여명이나 되었으며 탑동에도 5,000여명이 살았는데 이들은 탑동 골짜기 흘러내려오는 계곡 물줄기 옆으로 지어진 여러 곳의 사택에서 광업소 종사자 가족들과 함께 집단생활을 하며 살았다.

  이 사택들은 거마리 단지골에서 한 아름이 넘는 소나무들을 베어 지었는데, 그 나무들이 얼마나 무거웠던지 우차에 한 토막씩 싣고 탑동으로 옮겨 각재 및 판자를 캐어서 사택을 지었다.


● 탑동광산은 땅에서 직접 철광석을 채굴한다하여 노천굴(露天掘)이라 했다.


  당시 탑동에는 철광석이 흔해서 노천에서 흙만 걷어내고 발파를 해서 쉽게 철광석을 캐낼 수 있었는데, 이는 광산에서 갱도를 만들지 않고 땅에서 직접 철광석을 채굴 한다하여 노천굴이라고 한다.

  탑동에서 채굴한 철광석은 선광장(당시는 철광석을 선별하지 않음) 앞으로 옮겨져 철로 레일 위에 있는 20량 정도의 화차에 미리 실어놓으면 기관차가 와서 매달고 운행했는데 하루 1~2번씩 양양역을 거쳐 원산 쪽으로 싣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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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리 양양광업소 입구 터널 옛 모습


● 변전소 설치와 목탄차가 2대나 있었다.

  당시 외솔배기에서 서선리 쪽의 공터에 경찰서와 변전소가 들어섰는데 여기에서 광산과 양양으로 나누어서 전기를 보냈으며 이 전기는 영월에서 들어와 수동을 거처 들어 왔다.

  당시 양양광산 사람들은 주로 미나미골 입구에 있었던 시장을 이용했는데 이 때 탑동을 오가는 자동차는 숯불을 피워서 다니는 차 2대가 운행했는데 그나마 1대가 망가져서 1대가 겨우 운행했는데 이 목탄차가 힘이 없다보니 약간 높은 고지대에서도 빌빌거리며 겨우 올라가곤 했다.


● 서선리 철길의 안경다리 성토공사는 전라도 보급대원들이 했다.


  서선리 안경다리 공사는 전라도 사람들로 구성된 보급대원들이 철길 성토 공사를 했는데, 이때 보급대원들은 새벽부터 우리 동네에 있는 함바집에서 밥을 먹고 4명이 1조가 되어서 산을 깎아내 흙을 파서 손수레로 운반하여 상자에 넣고 다졌으며 일본말로 야리끼리[야리키루:완수하다] 라고 해서 일을 부지런히 하고 끝마치고 나면 바로 퇴근하였다.

  안경다리 터널공사 시 콘크리트를 타설하려고 판자로 거푸집을 만들어 놓은 것을 몰래 뜯어 책상을 만들어 사용하다가 발각되어서 학교에서 벌을 서기도 했다.

  안경다리 높이는 30여m나 되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다보니 구조물 자체에 균열이 생기고 행인이나 차량이 통행할 때 안경 굴 위에서 시멘트 조각이 떨어지는 일이 발생하여 철거하게 되었다.


● 기차를 타고 속초 중앙시장역, 간성역, 통천역을 거쳐서 장전을 갔다 왔다.


  당시 장전에는 이모할머니가 살았는데 이모부는 장전에서 큰 배를 몇 척을 가지고 있는 선주라 아주 부자로 살았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광업소 사무실에서 표를 사서 기차에 올라 양양역, 속초 중앙시장역, 간성역, 통천역을 거쳐서 장전에 갔다 온 적이 있다.

  그리고 집안의 이도형씨가 농사일을 하다가 급성맹장염에 걸려서 기차를 타고 원산의 큰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고 와서 살았는데, 그때는 맹장염이 걸려도 고치지도 못하는 그런 시절이었다.


● 서선리 마을은 광산이 들어오기 전에는 양양에서 제일 부자 동네였다.


  일제강점기 양양에 광산이 들어오기 전에는 우리 서선리 마을이 양양에서는 제일부자동네였다. 이 시기에는 서선리 이씨 문중의 종중의 땅이 서선리와 장승리를 비롯하여 감곡리까지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어서 해마다 도지(賭地)를 500섬씩 받을 정도로 부자였으며 양양에서 농악을 제일 처음으로 시작한 마을로 기억한다.

  그러나 양양에 광산이 들어오고부터 우리 마을은 서선리와 장승리에 소유하고 있었던 논 밭 전지를 일본 사람들에게 다 빼앗기고 나니 제일 못사는 동네가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