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북부선 종착지 양양역

1. 증언 <서면> 이순형(남.86) 서면 서선리 202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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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078회 작성일 2021-03-02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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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증언  <서면-2명>


▶ 이순형(남.86) 서면 서선리 202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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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중인 이순형씨 모습


● 양양광산의 기차 개통식 구경을 하였다.


  나는 서선리에서 출생하여 상평소학교를 다녔는데 2학년 때 인가 하교 길에 기관차가 기적소리를 울리면서 시운전 하는 것을 구경하였다.

  그 기관차 앞부분에는 만국기를 달고 객차를 한 3~4개 달고 운행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양양에서 장승리 광산까지 기차철로 개통식을 한 것이라고 후에 알았는데 그때가 1942년 8~9월쯤으로 기억된다.

  기차 개통식 후 부터 광산에서 양양으로 내려가는 기차는 철광석을 실은 화차가 7~8량, 그리고 그 뒤에 객차 2량을 달고 다녔는데 객차에는 주로 광업소 종사원들의가족과 가끔 광산주변에 사는 주민들을 싣고 다녔다.

  당시 광업소 일대에는 일본인들을 포함해 약 5000여명의 종사원들이 있었는데 탑동골짜기에도 수많은 사택들이 들어섰다.

  선광장에는 5~6개의 슈트가 있었는데 그 슈트 밑에 화차를 대놓고 철광석을 화차에 쏟아 부었고, 기차 앞부분인 기관차는 지금 광산 굴에서 조금 더 내려와서 후진으로 올라갔는데 이때 사람들이 직접 회전대 손잡이를 잡고 돌려서 기관차를 돌렸으며, 양양에서 광산까지의 기차운행 횟수는 하루에 한 두 번 씩 운행한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양양광산은 밤이 되면 복선으로 설치되었던 철로 변 주위에는 항상 불을 환하게 밝혔으며, 고군(역무원)들이 수신호용으로 커다란 간드레(candle)를 흔들며 빨간불과 파란불을 번쩍거리며 사고방지를 위하여 주변경계를 삼엄하게 했다.


● 어머니 손을 잡고 기차로 장전까지 다녀왔다.


  내가 상평소학교에 다니기 전에 어머니하고 장전에 살고계시는 막내 외조부님 집에 기차를 한번 타고 다녀온 적이 있는데, 그때는 아주 어릴 때라 그저 기차를 타는 것이 재미있을 뿐이었지 별다른 기억은 생각나지 않는데, 다만 당시 양양역의 역장이시던 이모부가 하얀 사기로 만든 고급 주전자를 주신 것은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이모부(김인경)께서는 6·25가 난 후에 철원으로 가셨는데 아마도 전근을 가신 것으로 생각된다.


● 솔개미차 탑승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8·15 해방이 되기 전인 1940년대 초에 기차가 철광석을 싣고 다니기 전부터 철광석을 싣고 다녔는데, 솔개미차의 탑은 한 아름정도의 검은 기름칠은 한 나무로 세웠고 탑의 높이는 지대가 높거나 낮은 지역에 따라 10~20m정도의 높이로 세웠다.

  탑과의 거리는 지형에 따라 50m에서 많게는 약 70~80m 간격으로 세웠으며, 로프에 매달려 가는 솔개미차와의 서로간의 거리는 약 50여m 간격으로 운행되었다.

  솔개미차 바가지에는 호박돌 정도를 철광석을 싣고 주야간 운반을 하였으며 솔개미 차가 돌아가는 소리가 떨거덕 떨거덕 거리며 소음이 요란하게 났으며, 삭도시설에 고장이 나서 세워두지 않는 한 계속 돌아갔다.

  솔개미차의 운행속도는 조금 느린 편이어서 나보다 고학년 형들은 솔개미차 탑 위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솔개미차 바가지를 타고 그 다음 탑에 가서 내리는 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삭도 탑에 올라가 솔개미차 시설을 정기적으로 점검하거나 수리 할 때에는 솔개미차를 돌아가지 않고 정지를 하는데 점검원 이던 청곡리에 사는 사람이 고장 난 부분을 수리하다가 서선리 아래 대밭에 떨어졌지만 죽지는 않았다고 했다.


● 서선리에는 안경다리가 있었다.


  양양에서 올라오는 기차는 우리 마을 앞을 지나게 되는데 안경다리 부근이 경사가 심한 탓에 겨울에 눈이 오거나 또는 비가 올 때에 철로가 미끄러워 헛바퀴를 도는 소리가 아주 요란하게 들렸다.

  이 안경다리공사는 철근대신 광산에서 사용하다가 다 닳고 못쓰게 된 8번선 와이어를 사용하였으며 주로 전라도사람들로 구성된 보급대원들이 와서 믹서기를 이용하여 콘크리트들 타설했는데, 이때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를 포함한 동네사람들은 개울에 있는 자갈을 주어 속칭 학꾸띠기를 해서 돈을 조금씩 벌기도 하였다.

  토목공사 시 노면의 중간 속 부분이 되는 곳에는 흙을 채워 넣었는데 속이 계속 벌어지려고 해서 동바리로 만든 거푸집 비슷한 것을 양쪽으로 3~5개씩 세워서 넘어지지 않게 마무리를 했다.

  이 안경다리 공사에 동원된 보급대원들은 서선리 마을에 있는 함바집 에서 식사를 하였는데 그때에는 주로 미루나무로 만든 숟가락을 사용하였는데, 그 함바집은 현재 서선리에서 화일리로 가는 갈라진 길 공터에 있었다.

  당시 공사현장 부근에 야적한 시멘트가 미처 사용하지 못해 굳어서 나굴었을 정도로 이 안경다리 공사를 시공하는 데는 몇 년이 잘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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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된 서선리 안경다리 옛 사진


  예전에 콘크리트타설 공사를 할 때 철근 대용으로 왕대나무를 찢어서 쓰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 안경다리는 2002년 루사 태풍 이후에 철거하였다.


● 우리 마을에 전기불이 들어왔다.


  당시 양양광산에서 사용하던 전기는 영월에서부터 들어온 송전탑이 수동리 뒷산에서 범부리 앞 후천을 건너 큰 뱀골 을 거처 장승리와 서선리 삼거리 부근에 있는 변전소에서 전압을 조정한 후 다시 광산으로 공급되었다.

  그때 양양읍내에는 호롱불을 켜고 살았어도 서선리 마을은 광산이 이웃에 있는 동네인 덕택으로 전기불이 들어오는 집이 있었다.

  인공 때에는 저녁을 먹은 후에도 동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가마니를 만들었는데, 당시에는 광업소 소장을 광장이라고 불렀는데 이북사람이었던 그는 가끔 서선리 마을로 내려와 가마니를 치는데 어울려 직접 바디질을 하곤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