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북부선 종착지 양양역

1. 증언 <양양읍> 이복희 (여, 94세 / 양양읍 연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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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143회 작성일 2021-03-02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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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증언  <양양읍>


▶ 이복희 (여, 94세 / 양양읍 연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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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중인 이복희씨 모습


● 남편(김규원)이 양양역 조역을 지냈다.


  내가 20살이 되던 해에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으로 시집오니 당시 내보다 2살 위인남편은 양양역에 차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가끔 기차 정거장에 나가보면 차장인 남편이 타고 온 기차가 정거장으로 들어서면 역 플랫폼에서 대기하고 있는 역장에게 행랑 같은 물건을 넘겨주고 다시 기차가 출발할 때에도 그 물건을 받아들고 출발하는 것을 본적이 있는데, 종착역인 양양역에 기차가 도착할 때에는 차장이 “가지고 계신 소지품을 잊지 마시고 안녕히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방송을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다가 내가 시집을 온 다음해에 남편이 원산으로 발령을 받고 원산역 사무실에 가서 근무를 하게 되었다.

  원산으로 이사를 갈 때에는 기차 화물칸 한 칸을 내주었지만 짐도 별로 없이 옷가지 몇 벌과 밥해먹을 그릇 그리고 반지코리를 싣고 갔다.

  원산에 근무할 때에는 사택이 없어서 원산 중앙 성산병원 뒤 입원실을 개조하여 생활하였는데 방이 일본식 다다미방이라서 밥을 해 먹을 때에는 장작이 필요했다.

  그러나 월급이 얼마 되지 않아 생활이 되지 않아 양양시댁에 다니며 쌀과 식품 등을 가져다 먹었다.

  원산에서 시댁인 양양으로 올 때에는 남편이 차장인 덕에 표 딱지(증서)를 내 보이면 무임승차를 하였다.

  그렇게 1년을 근무하다가 시험에 합격하여 조역이 되어 양양으로 발령을 받고 양양 역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사택은 아랫사람들이 살게 하고 혼자 계시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연창 본집에서 살았다.


● 아랫사람의 밀고로 함흥 형무소에 갇히다.


  해방이 되면서 양양역에 근무할 때 우리 남편은 북쪽 정치를 좋아하지 않아 내가 여성동맹회의에 나가는 것도 좋아하지 않아 자주 빠지는 일이 있었다. 그러던 중에 패엘(청곡리 윗마을)에 친동생처럼 가깝게 지내는 ○○○와 이승만과 김일성 이에 대해서 대화를 하는 때가 많았는데 은연중에 나는 이승만 정치가 더 좋은 것 같다고 말한 것을 ○○○이 내무서에 고발을 하여 감옥으로 갔다.

  당시 북쪽에서는 반동분자를 고발하면 한 계급씩 올라가는 것이 있었다. 후에 남편은 원산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죄목이 10가지이고 10년을 언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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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고 현장을 증언하는 이복희씨 모습


  시어머니는 며느리인 나도 면회를 가겠다고 했으나 너는 어린아이가 있으니 웬만큼 크면 면회를 가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시어머니는 함흥 기차 길 옆에 있는 형무소로 매달 면회를 갔는데 몸이 편찬은 남편은 시어머니에게 페니실린을 한 병 사달라고 하여 이남에 넘어다니는 사람들에게 2천원을 주고 부탁을 하였지만 구하지 못하였다. 내 나이가 23세가 되던 그해 10월 남편은 28세의 나이로 함흥 형무소에서 사망하자 시신이 기차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