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증언 <양양읍> 이복희 (여, 94세 / 양양읍 연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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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증언 <양양읍>
▶ 이복희 (여, 94세 / 양양읍 연창리)
구술중인 이복희씨 모습
● 남편(김규원)이 양양역 조역을 지냈다.
내가 20살이 되던 해에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으로 시집오니 당시 내보다 2살 위인남편은 양양역에 차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가끔 기차 정거장에 나가보면 차장인 남편이 타고 온 기차가 정거장으로 들어서면 역 플랫폼에서 대기하고 있는 역장에게 행랑 같은 물건을 넘겨주고 다시 기차가 출발할 때에도 그 물건을 받아들고 출발하는 것을 본적이 있는데, 종착역인 양양역에 기차가 도착할 때에는 차장이 “가지고 계신 소지품을 잊지 마시고 안녕히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방송을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다가 내가 시집을 온 다음해에 남편이 원산으로 발령을 받고 원산역 사무실에 가서 근무를 하게 되었다.
원산으로 이사를 갈 때에는 기차 화물칸 한 칸을 내주었지만 짐도 별로 없이 옷가지 몇 벌과 밥해먹을 그릇 그리고 반지코리를 싣고 갔다.
원산에 근무할 때에는 사택이 없어서 원산 중앙 성산병원 뒤 입원실을 개조하여 생활하였는데 방이 일본식 다다미방이라서 밥을 해 먹을 때에는 장작이 필요했다.
그러나 월급이 얼마 되지 않아 생활이 되지 않아 양양시댁에 다니며 쌀과 식품 등을 가져다 먹었다.
원산에서 시댁인 양양으로 올 때에는 남편이 차장인 덕에 표 딱지(증서)를 내 보이면 무임승차를 하였다.
그렇게 1년을 근무하다가 시험에 합격하여 조역이 되어 양양으로 발령을 받고 양양 역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사택은 아랫사람들이 살게 하고 혼자 계시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연창 본집에서 살았다.
● 아랫사람의 밀고로 함흥 형무소에 갇히다.
해방이 되면서 양양역에 근무할 때 우리 남편은 북쪽 정치를 좋아하지 않아 내가 여성동맹회의에 나가는 것도 좋아하지 않아 자주 빠지는 일이 있었다. 그러던 중에 패엘(청곡리 윗마을)에 친동생처럼 가깝게 지내는 ○○○와 이승만과 김일성 이에 대해서 대화를 하는 때가 많았는데 은연중에 나는 이승만 정치가 더 좋은 것 같다고 말한 것을 ○○○이 내무서에 고발을 하여 감옥으로 갔다.
당시 북쪽에서는 반동분자를 고발하면 한 계급씩 올라가는 것이 있었다. 후에 남편은 원산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죄목이 10가지이고 10년을 언도 받았다.
기관고 현장을 증언하는 이복희씨 모습
시어머니는 며느리인 나도 면회를 가겠다고 했으나 너는 어린아이가 있으니 웬만큼 크면 면회를 가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시어머니는 함흥 기차 길 옆에 있는 형무소로 매달 면회를 갔는데 몸이 편찬은 남편은 시어머니에게 페니실린을 한 병 사달라고 하여 이남에 넘어다니는 사람들에게 2천원을 주고 부탁을 하였지만 구하지 못하였다. 내 나이가 23세가 되던 그해 10월 남편은 28세의 나이로 함흥 형무소에서 사망하자 시신이 기차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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