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북부선 종착지 양양역

1. 증언 <양양읍> 김홍식 (남.83) 양양읍 연창리 202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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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076회 작성일 2021-03-02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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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증언  <양양읍>


▶김홍식 (남.83) 양양읍 연창리 202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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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중인 김홍식씨 모습


● 기차 나무의자 틈 사이에 빈대와 벼룩이 있었다.


  양양읍 성내리에 살았는데 8세 때에 해방을 맞이했고, 13세 때에 6·25사변을 맞이했다 양양역 앞에 작은집이 살고 있어서 철길을 이용하여 다녀오기도 했으며, 선로에 귀를 대고 소리를 듣고서 기차가 오는 것을 알았고, 역에서 선로를 뛰어다니며 친구들과 놀았다.

  양양역에서 기차를 타고 낙산사역 까지 가서 상복골 에 있는 외갓집에 다녀오기도 했는데 기차는 석탄을 때고 가기 때문에 화력이 세면 빨리 가고 약하면 천천히 갔다.

  기차는 2명씩 앉는 나무의자로 맞은편에 앉은 승객 쪽의 기차 창가로 향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나무의자 사이의 틈에 빈대와 벼룩이 많이 보였다.


● 솔개미차로 운반한 철광석을 기차가 싣고 갔다.


  청곡1리에 사는 이병열씨가 선로를 총괄하는 감독이었는데 키가 185cm에 통뼈라서 힘이 엄청나게 장사여서 역주변의 깡패들도 꼼짝 못하였으며, 길이가 12m나 되는 레일을 8명이 목도해서 옮기는 것을 혼자서 들어 옮기기도 했다.

  김선호라는 선로 반장이 있었으며, 또 다른 선로반장은 5~6명의 반원들에게 해방군이라고 불리는 소련 군인들이 부녀자를 겁탈하고 도둑질을 하니 조심하라고 얘기했는데 해방군을 모욕했다고 그날 밤 행방불명이 되었다.

  광산에서 오는 솔개미차가 감곡리 쪽에서 역으로 왔는데 바가지에 1톤 정도의 철광석을 싣고 와서 역의 조구통에 쏟아 놓으면 기차가 와서 싣고 갔다.

  감곡리에 조상 산소가 있어 청곡1리를 지나서 감곡리 산소를 가다보면 뒷산 언저리에 솔개미차 바가지가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것을 보기도 했다.


● 양양역이 함포사격을 받았다.


  1950년 7월 7일 오후 4~5시경에 가평리 앞바다에서 미국 군함이 양양다리와 양양역을 향해서 함포사격을 했는데 모두 부근의 다른 곳에 떨어졌고, 우리는 겁이나 군청 뒷산에 있는 정자각에 피신했다.

  양양역에서 기차를 타고 원산으로 훈련 받으러 갔던 큰형님(당시 19세)이 인민군대에서 1950년 7월 5일 일주일간 휴가를 나왔다가 이날 남대천으로 목욕하러 나갔는데 함포사격을 하므로 임천리 밤나무골 (현 코아루아파트 부근)로 가서 밤나무 밑에 피했는데 폭탄이 떨어져 가슴에 파편을 맞고 숨져서 그날을 확실히 기억한다.

  6·25사변 후 역이 파괴되고 그 자리에 국군 통신부대가 미제 천막을 치고 진주했는데 레일을 뜯어서 텐트 하단에 받쳐 고정시키는데 이용하였다.

  여자중학교 자리에서 375의무중대가 주둔했는데 가서 이발을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