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북부선 종착지 양양역

1. 증언 <양양읍> 전한기(남.85) 양양읍 송암리 202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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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041회 작성일 2021-03-02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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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증언  <양양읍>


▶ 전한기(남.85) 양양읍 송암리 202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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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중인 전한기, 김광용씨 모습


● 정거장에 가서 기관차 앞대가리를 돌려주는 것이 재미있었다.


  송암리 255-3 번지 현재의 집 자리에서 태어나서 지금 까지 살고 있으며. 10살 때인

소학교 3학년에 해방을 맞이하였고 16살 때 6·25 사변을 겪었다.

  소학교에 다닐 무렵에는 양양역에 가서 자주 놀았는데 멀리서 기차가 오는 소리가 나면 기차 바퀴가 지나다니는 레일위에 못을 얹어 놓아 기차가 지나간 후에 납작해진 못으로 칼을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당시 뱀째산 밑에 양양역에서 관리하는 쓰레기장을 뒤져서 초코렛이나 사탕을 주워 먹기도 했으며, 현재 한양석재 부근에 설치되어있었던 속칭 데부르라는 곳에서 어른들이 손잡이로 기관차를 돌리면 재미삼아 그 손잡이를 같이 잡고 기관차 앞대가리를 돌려주기도 했다.

  그리고 강현면 물치에 이모가 살고 있어서 정암리 낙산사역까지 기차를 타고 다녀오기도 했다.


● 거마리에 있는 캄캄한 굴을 빠져 나올 때는 무서웠다.


  역전으로 놀러가서 친구또래들 2~3명이 역에 철로를 점검하러 다니는 기술자들이 타고 다니는 속칭 한또카를 몰래 타고 임천까지 손으로 힘들게 지기고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는 경사 있어서 쉽게 내려오기도 했다.

  또한 광산으로 철을 실으러 가는 화차를 몰래 광산 까지 타고 갔다가 내려올 때에는 마침 우리 동네에 사는 전우기씨를 찾아가서 사정 얘기를 하고 철광석을 실은 화차 위에 앉아서 내려올 수 있었는데 거마리에 캄캄한 굴을 빠져 나올 때는 무섭고 겁이 나서 혼났던 기억이 난다.

 철광석을 싣는 화차는 5~6칸 이었으며 하루 2번 다녔다.


● 남대천 자갈을 운반했던 철로레일 길을 자갈선이라 불렀다.


  우리 마을에서 역전으로 내려가는 길(당시 철로)에서 남대천 쪽으로 대각선으로 난 조그만 길이 하나가 있다.

  당시 이 길은 일제가 남대천의 자갈(골재)을 채취하기 위하여 남대천 버덩까지 철도 레일을 깔아 남대천에서 채집한 자갈을 이 선로를 이용하여 사람의 힘으로 구루마(손수레)로 실어 날랐다 하여 이 길을 자갈선이라 불러지고 있다.

  그리고 마을 가운데로 난 철도는 남대천 철교와 연결되었는데 이 철로로 기관차가 시운전삼아 수 회 다녔던 기억이 난다.


● 원산으로 가서 고춧가루 장사로 돈을 벌어 논을 샀다.


  역 구내에는 이 지역에 사는 아주머니들이 원산에 다니며 보따리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특히 우리 동네 아주머니들 중 오창근씨 모친인 박향란씨와 전광운씨 부인은 동업으로 주로 고춧가루 장사를 많이 했는데 이분들은 장사를 하시면서 돈을 많이 벌어서 논을 사기도 했다.

  왜정시대에는 지금의 송암리 토담골식당 자리에 일본인 배급소가 있어서 배급을 타러 다녔는데 당시 마을마다 농사지은 쌀을 비롯한 곡식 일체를 일제가 모두 공출로 거두어드리고 주민들은 이 배급소에서 줄을 서서 배급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 역 대합실 큰 대로길 건너에 양양여관과 함흥여관이 있었다.


  송암리 기차정거장은 당시 동해북부선 기차 종점이라 역전 대합실과 광장주변에는 연일 많은 인파가 북적거렸으며 상가도 많이 들어서 있었고 역 주변에는 약 200여 호가 살았다.

  현 7번국도 건너에는 양양여관과 함흥여관이 있었고 옆에 경찰주제소가 있었으며 현 양양석재에서 양양읍내로 올라가는 7번국도와 논 사이에 있는 조그만 소로 길에는 술집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다.

  그리고 해방 후 술집 옆 논에는 마사간이 있어 소련군이 약 1개 소대 정도가 주둔하였는데 그들이 내부적으로 무슨 일로 왔는지는 자세히 모르겠으나 이들은 마사간에 붙은 관사에 묵으면서 무기를 싣고 다니는 마차를 끄는 20~30마리의 말을 관리했는데 소련군은 주로 속칭 흘레바리(빵)를 먹고 있었으며 이들은 6·25사변 직전에 모두 철수했다.


● 함포사격 첫 방에 포탄이 기관차 화통에 정통으로 맞았다.


  6·25사변일 1달 정도 지나 앞 바다에서 함포 사격을 했는데 첫 방에 기관고에 있던 기관차 화통 원덩어리에 포탄이 정통으로 맞아 안에 있던 기관차에 불이 붙어 아수라장 되었으며 나중에 기관사가 죽었다고 한다.

  당시 동해안 바다에서 군함이 역에 야적한 무기를 파괴하려고 이틀에 한번 꼴로 함포사격을 하는 통에 우리 집과 양 옆의 두 집 그리고 뒷집까지 모두 4집이 박살났다.

  마침 아버지는 식전에 일찍이 밭에 일하러 가서 괜찮았는데 전광운씨 부인은 파편이 손에 맞아 손가락이 모두 잘려 나갔다. 우리 어머니는 그 당시 농사일로 감곡리에가 계시는 바람에 다행히 화를 면할 수 있다 이때까지 양양역 대합실은 함포사격에 피해를 입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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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차를 돌리는 전차대를 증언하는 전한기 씨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