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북부선 종착지 양양역

1. 증언 <양양읍> 김재호(남.79) 양양읍 송암리 20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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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034회 작성일 2021-03-02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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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증언  <양양읍>


▶ 김재호(남.79) 양양읍 송암리 20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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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탱크를 증언하는 김재호씨 모습


● 내가 어릴 적 놀이터처럼 놀던 양양역


  송암리 기차역 근처에서 기차소리를 듣고 기차역을 놀이터로 삼았다. 아침이면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손은 보따리를 들고 큰 짐은 등에 지고 기차를 타는 모습을 보았고 밤이면 또 많은 사람들이 내리는 것을 보며 자랐다.

  외삼촌이 북쪽 장전에서 살고 있어서 이빨 치료차 기차를 타고 장전 치과병원에 다녔는데 기차타고 창밖을 내다보며 다니는 것이 기분이 좋았다.

  동네 아저씨가 양양광산에 광석을 나르는 기차를 운전하고 다녀서 아저씨에게 부탁하면 가끔은 공짜로 기차를 타고 양양광산에 다니기도 하였다.

  양양 광산 다니는 기차는 손님은 타지 않고 기사 혼자만 타고 다녔다. 기차가 양양 광산에 가면 화차를 철광석 싣는 곳에 대면 위에서 우당탕 하고 소리를 내며 철광석이 쏟아져 내려오면 싣고 내려와 기차역에 세워두면 북쪽으로 가는 기차가 철을 실은 광차를 달고 갔다.

  아침 8시에 기차가 떠나는데 갈 때는 큰 가마에 밤새도록 물을 끓여 펄펄 끓는 물을 기차에 가득 싣고 떠났다. 석탄을 때고 다니니까 석탄재가 많이 나온다. 그러면 지금 한양석재 있는 곳에 석탄재를 버린다.

  사람들은 아침 8시차를 타기 위해 현 한양석재 건너편에 여관, 식당, 가게들도 여럿있었는데 거기서 자고 식사도 하고 아침차를 탔다. 송암리에는 주재소도 있고 번창한 도시거리였다. 저녁때 기차가 오면 화차를 돌려야 한다.

  그때 기차 돌리는 곳에 대면 여럿이 화차를 밀면 천천히 돌아 기차 방향이 앞으로바뀌게 된다. 그게 재미있어 아저씨들과 같이 화차를 돌려주기도 하였다.

  오색 쪽에서 우차로 소나무를 실어오면 쌓아두었다가 기차가 실어 가는데 그때는 자동차가 별로 없으니 10여대의 우차가 지금의 자동차 트럭처럼 소나무를 실어 와서 역전 주변에 내려놓으면 동네사람들이 껍질을 벗겨 땔감으로 사용하였다. 나중에 소나무 껍질을 다 벗기고 나면 역전에 일하는 아저씨들이 목도를 하여 기차에 가득 실고 갔다.


● 기차에 싣고 다닌 물건들 중에는 양양남대천에서 채취한 자갈도 있었다.


  기차 철로를 남대천 강변까지 놓아 화차를 강변에 놓고 사람들이 남대천에서 자갈을 채취하여 화차에 실어놓으면 기차가 와서 끌고 북쪽으로 떠났다. 객차는 한번에 3~4대씩 달고 다녔다.

  그때 이상철 기관사가 유명했는데 그분은 원산에서 오다가 기차 개다리(크랭크)가 부러졌는데 중간에 어찌하지 못하여 참나무를 이용하여 철사를 동여매고 양양까지 무사히 도착하였다고 했다. 양양서 다니는 사람들은 생선을 많이 싣고 가고 올 때는 안변에서 사과를 많이 사 가지고 와서 양양 시장에서 팔았다.

  양양의 청년들이 인민군에 입대할 때도 기차에 타고 군가를 소리 높여 부르고 깃발을 휘날리며 북쪽으로 갔다.

  철로는 남쪽으로 강릉 쪽으로 길을 만들어 놓고 레일은 깔지 못하고 해방이 되었다. 남대천에는 교각(삐아)이 20여개가 세워졌고 상판도 놓아 아이들이 위험한 철길 걷기를 자랑으로 삼았다.


● 6·25전쟁이 임박해서 밤차로 무기와 인민군들이 실려 나왔다.


  1950년 6·25전쟁이 임박해서는 북에서 밤차로 무기들과 인민군들이 기차로 실려 나왔다. 탱크도 실려 왔는데 기차에서 내려 남대천 쪽으로 가다가 빠져서 인민군들이 고생하는 것을 보았고,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무기들도 많이 실고 왔다.

  전쟁이 벌어져 남쪽 국군에게서 빼앗은 무기들을 기차로 북으로 실어갔다. 1950년 8월 어느 날 오후 4시경 비행기가 와서 정찰을 하고 간 후 바다 배에서 함포사격이 시작되었다. 엄청난 폭음에 놀라 모두 숨고 기차역전은 다 부서졌다.

  나는 우리 집 소를 끌고 풀을 먹이려고 남대천에 갔는데 군함에서 쏜 함포 알이 천둥소리 보다 더 크게 산을 울리며 기차역과 마을에 떨어져 기차역은 박살이 났고, 집들도 파괴되고 사람들이 포탄에 맞아 피를 흘리는 사람, 죽은 사람을 보고 너무 무서웠다. 그 후로는 기차는 다니지 못했다.

  국군의 양양 입성으로 피난 갔던 사람들이 국군을 따라 돌아오니 집은 간데없고 마을은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목재도 구할 수 없으니 할 수 없어 기차 침목을 뜯어다 집을 지었다.

  침목을 뜯기 어려워 철로 밑을 깊이 파고 해머로 내려치면 침목이 빠져나왔다. 못이 없어 철사를 잘라 못으로 만들어 집을 짓는데 사용하였고 너도 나도 기차 침목을 뜯어다 사용하고 역전길 주변에 땅을 파고 곡식을 심으니 기차 길은 점점 없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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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나무를 인부들이 목도로 화차에 싣는 상황을 증언하는 김재호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