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북부선 종착지 양양역

1. 증언 <양양읍> 채복성(남.83) 양양읍 송암리 202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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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024회 작성일 2021-03-02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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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증언  <양양읍>


▶ 채복성(남.83) 양양읍 송암리 202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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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중인 채복성씨 모습


● 전기모터 펌프로 뱀째산 물탱크로 물을 퍼 올렸다.


  아버지는 1945년 해방이 되던 해에 철도청에 입사했으며 원산역에서 차장을 하고고성의 조그만 역에서 역장을 하면서 고성에 살았는데 양양역으로 발령받은 아버지를 따라서 13살 때 양양으로 이사를 왔으며 그 해 인민학교 5학년 때 6·25사변이 터졌다.

  양양역에 근무 시에는 기관고에서 아버지 등과 함께 5~6명의 종사원이 근무했는데 기관차가 머무르는 기관고에서는 기차에서 태운 석탄재를 버리고 새로운 석탄을 싣고 물을 채우는 일을 했다.

  그리고 기관고 안에 조그만 사무실이 있었는데 추운 겨울에는 아버지와 함께 일을 하는 아저씨들이 사무실 석탄난로에 뜨끈뜨끈하게 불을 피워놓으면 불을 쬐면서 놀았던 기억이 난다.

  또한 역 구내에 있는 우물에서 뱀째산에 있는 물탱크에 전기모터 펌프로 물을 끌어올리는 일은 아버지가 전담했다.

  양양으로 내려오기 전 고성에서 살 때 기관차승무원 가족들은 차비가 공짜이어서 어머니가 안변에 가서 사과를 도매해가지고 와서 고성역전에서 약 3~4년 동안 사과 장사를 했었다.


● 기차가 철광석을 싣고 원산 쪽으로 갔다.


  철광석은 광산에서 솔개미차로 싣고 오면 철광석을 보관하는 조구통 시설물에 둥글게 생긴 커다란 윈치로 2층 조구통 하치장에 쏟아 놓은 다음 기관차가 화차를 끌고 2층 조구통 하치장 밑의 1층 통로로 들어가면 2층에서 문을 열어 철광석을 내려뜨려싣고 원산으로 갔는데 하루에 1번씩 싣고 갔다.

  일부 철광석은 일제 강점기 말에 양양광산에서 운반해 놓은 것이 남아 있었는데 해방 후 북한에서 실어 간 것으로 알고 있다.


● 6·25전쟁이 일어나고 한 달 후 함포사격으로 기관사가 사망했다.


  6·25전쟁이 일어나고 한 달 후인가 가평 앞 바다에서 함포사격을 해 기관고에 포탄이 떨어지면서 기관고 속에 들어가 있던 기차 앞대가리인 기차화통에 정통으로 맞아 기관사가 사망했고 기관고 옆에 야적한 탄약, 무기 등의 전쟁물자도 폭격을 맞아서 엄청난 굉음과 함께 파괴되었으며 하늘높이 불길이 치솟고 일대가 온통 화염에 휩싸였다.

  그때 우리 집 복숭아나무 과수원 사이로 인민군 장교로 보이는 군인이 와서 하는 말이 바다에서 쏘는 함포사격인줄 모르고 소리가 나지 않은 비행기가 왔다고 호들갑을 떠는 모습은 지금 생각하면 웃어넘길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이때까지 양양역 대합실은 함포사격에 피해를 입지는 않았었지만, 양양역 대로변(현7번국도)의 경찰 주재소 옆에는 창고가 2동이 있었는데 이 창고에는 주로 북한 흥남비료공장에서 만든 비료를 가마니로 싣고 와서 저장했는데 폭격으로 몽땅 타버렸다.

  당시 북한에서 인민군대가 기차로 싣고 온 무기 등의 전쟁 물자를 기관고 옆 조구통 앞에 쌓아놓고 뱀째산에서 소나무를 베어다가 가지로 덮어서 보이지 않도록 위장한 상태였다.


● 말들은 지붕이 씌워진 화차로 싣고 내려왔다.


  현 한양석재에서 송암리 본 마을 쪽으로 논이 있는 자리에는 당시 말을 키우는 마서간(마사:馬舍)이 길게 들어섰는데 해방 후에는 그 마구간 터 옆의 건물에 로스케가 묶었다고 했으며, 그 당시 아이들이 로스케들에게 들깨 깻묵을 주고 흘레바리(빵)와 바꾸어 먹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6·25사변 직전까지 인민군대가 이 마석간에 주둔하고 있었으면서 이곳에 말을 많이 키웠는데 이 말들에게는 현 송암리 마을 사이로 흐르는 농업용수 관계수로에서 철둑길 밑으로 조그마하게 구멍을 뚫고 물길을 내서 그 물을 먹게 만들었으며 약 5~60여 마리나 사육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즉 지금으로 말하면 마서간이 자동차를 운영하는 수송부 역할을 한 것이다.

  이 말들은 북에서 지붕이 씌워진 화차에 싣고 왔는데 친구들과 구경하러 갔다가 건빵과 고기 조각을 얻어먹기도 했다.

  당시 아버지가 역에서 일을 하였다지만 그때는 지금처럼 봉급은 없었고 15일에 한번 씩 배급이 나오는데 쌀은 아주 조금주고 주로 좁쌀만 받아 좁쌀 밥과 좁쌀죽으로 연명했으니 한참 크고 먹어야할 어린 나이에 건빵을 얻어먹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인민군들이 이 말들을 이용하여 양양역에서부터는 남쪽으로 전쟁무기를 마차로 운반 하는 것을 볼 수 있었으며, 6·25사변 일어나기 이전부터 기차로 싣고 온 탱크가 남쪽으로 내려갔으며 인민군들은 3일전에 산으로 해서 밤을 이용해서 남쪽으로 이동했다고 하는데, 6·25가 나기 바로 직전에는 소련군들이 보이지 않았다.


● 철로 레일 깔은 길을 자갈선이라 불렀다.


  현재 송암리에서 청곡2리 방향으로 내려가는 소로(당시 철로)길 송암 옆으로 작은 소로가 대각선으로 나 있는데 이 길은 당시 남대천 버덩까지 이어져 철로 레일을 깔아 자갈선이라고 부른다.

  이 길로 남대천에서 채집한 자갈을 레일위로 다니는 구루마[손 수레]를 이용하여 역까지 실어 날랐으며, 강릉으로 나가는 철도는 기반공사는 다했으며 남대천으로 기차가 더 이상 건너지 못하도록 송암리 입구에 말뚝을 박고 X자로 차단 장치를 하면서 막아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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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철광석을 싣기 위하여 조구통 밑 통로로 진입하는 현장을 증언하는 채복성씨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