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북부선 종착지 양양역

1. 증언 <양양읍> 김상환(남.87) 양양읍 청곡2리 2020.7.19.

페이지 정보

조회 1,024회 작성일 2021-03-02 20:18

본문

1. 증언  <양양읍>


▶ 김상환(남.87) 양양읍 청곡2리 2020.7.19.

 

train_페이지_085_이미지_0003.jpg

구술중인 김상환씨 모습


● 우리 집터 부근이 모두 관사 자리였다.


  나는 어렸을 때 연창리에서 나고 자랐으며 그 뒤에는 구교리 철길 뒤인 샛말(청곡1 리)에서 주로 많이 살았으며 12살 때 해방을 맞았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집터 주변은 일정 때 모두 관사 자리였는데, 관사는 양쪽에 두 줄로 모두 10여동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안쪽으로 맨 뒤에 역장 관사가 있었다.

  그 후 관사는 모두 없어지고 모두 빈 공터가 되면서 밭으로 이용되었고 1977년도에주택단지가 조성되며 개인 집들이 들어섰다.


● 역사(驛舍) 길 건너에는 우리 큰댁의 여인숙이 있었다.


  지금 7번 국도에서 오르내리는 좁은 길옆으로 역사인 대합실 자리가 있고 큰길 건너편에 큰댁에서 조그만 여인숙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그 여인숙 옆의 빈 공터는 우차로 실려 온 목재를 잔뜩 쌓아놓은 하치장이 넓게 자리하고 있었고, 큰길 건너 청곡리 쪽으로도 목재를 부려놓은 소규모 하치장이 있었다.

  역에는 객차가 다니는 선로 이외에도 철광석을 실어놓은 화차, 목재를 실어놓은 화차 등 여러 가닥의 선로가 있었고 그 옆으로는 여러 동의 창고와 기차가 원산 쪽으로 다니는 철길 건너에는 역의 관리사무소가 2~3동 있었다.

  역사에서 송암리 쪽의 기차선로 아래쪽에는 기차 화통대가리(기관차)를 돌리는 선로가 뚱그렇게 나 있었으며 처음에는 사람이 밀어서 돌렸으나 나중에는 기계장치로 돌렸던 것 같다.


● 한도까(수리용 차)를 몰고 거마리까지 갔다 왔다.


  구교리 철길 뒤인 새잇말(청곡1리)에 살 때 우리 뒷집에 양양역의 열차 차장으로 재직하시던 박상길이란 분이 가끔 한도까(수리용 차)를 타고 점심 식사하러 집에 오실 때면 우리 동네 아이들에게 한도까를 태워서 임천과 거마리 큰 굴 앞까지도 갔다 오기도 했다.


● 양양 기차역에서 근무한 분들 중에는 기관사도 있었다.


  연창에 살았던 열차 기관사이던 이상철씨는 본인이 직접 운전하는 기차를 송암리 역에 세워두고 집에 와서 하루 밤을 지낸 그 다음날 다시 기차를 몰고 원산 쪽으로 다녔다.

그밖에 기차 승무원으로는 함병철, 김희소, 김규원 등이 있었으나 최성호씨는 양양역 사무직으로 근무한 것으로 알고 있다.

  저보다 일곱 살 위인 형님은 당시 북한에서 제일 크다고 하는 원산 인근의 갈마역 주변에 있는 철도공장의 기술자로 근무한 적이 있어 어머니와 함께 다녀오기도 했다.


● 동해북부선의 중심인 안변역은 평양과 경성(서울)로 갈라지는 길이 있다.


  동해북부선 종착역이던 양양역에서 출발한 기차가 안변역에 도착하면 동해안을 따라 계속 북으로 원산, 함흥, 청진 방면으로 가는 기찻길과, 원산에서 평양으로 갈라지는 노선과 마지막으로 경성(서울)로 가는 기찻길이 있었다.

  나는 아주 어릴 때 어머니와 양양에서 기차를 타고 안변으로해서 평양 방면으로 가는 기차를 갈아타고 평강 복개라는 곳에 가서 한 1년 산 것이 아련하게 기억난다.

 

 

train_페이지_087_이미지_0001.jpg

기관차를 돌렸던 위치를 증언하는 김상환씨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