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북부선 종착지 양양역

1. 증언 <양양읍> 김세열(남.83) 양양읍 송암리 2020.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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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028회 작성일 2021-03-02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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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증언  <양양읍>


▶ 김세열(남.83) 양양읍 송암리 2020.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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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중인 김세열씨 모습


● 어머니가 원산에서 계란 장사, 양양에서 사과 장사를 했다.


  해방 전 까지 원산 행 기차가 매일 아침 8시경에 출발했다. 장사를 하던 어머니가 시골을 다니며 계란을 사서 상자에 넣어 아침 기차로 싣고 가서 원산과 안변 등지에서 팔았고, 돌아 올 때는 사과를 사가지고 다음날 저녁 기차로 양양역에 도착했다.

  그때 어머니는 둘째 누님과 같이 다녔는데 식구들이 모두 마중 나가서 지게 등으로 실어온 기억이 있는데 다음날 시장에 가서 팔았으며 거의 일주일 간격으로 다니셨고 꽤 여러 해 동안 장사를 하신 것으로 기억된다.

  동네에서 거두어들인 계란은 10개씩 볏짚 속에 넣고 엮어서 한 상자씩 만들어 10접 (1,000개)을 기차에 싣고 원산 쪽으로 가셨고, 그 다음날 내려 올 때 에는 사과를 10접 (1,000개) 정도를 사가지고 왔다.

  어머니께서는 6·25전쟁 후에는 고춧가루와 곶감 장사를 했다.

  그리고 예전에 양양역에 광산에 철을 운반하던 기차의 차장을 한 함병철씨 모친도 사과 장사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


● 기관차 타는 재미로 기관차를 돌려주러 내려갔다 올라오곤 했다.


  저녁에 역에 도착한 기차는 기관차만 떼어 현재 송암리 마을회관 까지 온 다음 후진으로 현재 한양석재에 인근에 위치한 기차를 돌리는 데부르(전차대)에서 기차를 돌려서 갔는데 그 때 저녁 먹고 놀이삼아 기관차에 매달려 타고 데부르까지 가서 기관차를 돌려주었는데 양쪽으로 5명씩 타고 직원들과 함께 손잡이로 밀어서 돌려주고 그기관차를 타고 다시 현재 청곡리 입구까지 내려갔다 올라오곤 했다.

  기차를 돌렸던 그 자리는 2~3년 까지도 구조물이 남아있었는데 지금은 매워지고 잡초 밭으로 변해 버렸다.

  기관차를 돌리는 대부르(전차대) 밑 부분에는 롤러(roller)가 설치되어 있어 사람 힘으로도 기관차가 용이하게 돌아간다.


● 지금 주민들이 왕래하는 도로는 당시 기관차를 돌려주는 기차선로였다.


  역 대합실 옆에는 설탕과 명태 등을 보관한 창고가 나란히 붙어 있었고 현재 주민 들이 통행하는 도로는 당시 기차선로가 2개 있었는데, 이 선로는 기관차 앞뒤를 바꾸는 기차선로와 창고에서 물건을 싣는 용도로 이용했다.

  현재 주민들이 왕래하는 도로(당시 기차선로)를 건너면 플랫폼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고, 그 플랫폼 다음에 기차선로가 있었는데 이 기차 길이 안변과 원산 쪽으로 가는주 기차선로였다.

  따라서 원산행 기차를 타려면 플랫폼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이 기차선로에 손님을 태우려고 서 있는 기차를 타고 내렸다.


● 삼촌이 조구통에서 일을 하다가 떨어져 크게 다친 적이 있다.


  그 선로 바깥쪽으로 양양광산에서 솔개미차(삭도)로 철광석을 싣고 와서 쏟아 내린 조구통이 있는데 이 2층 조구통 밑으로 기차선로가 있어 기관차가 화차를 달고 들어오면 2층에서 철광석을 쏟아 내리는 슈트가 2개 정도가 있다.

  이 조구통에서 우리 김동영 삼촌이 조구통에 슈트를 내리는 직원으로 일을 하다가 언젠가 2층 조구통에서 떨어져 크게 다쳐서 어머니가 약을 구하려고 애쓰시던 기억이 난다.


● 당시 기관차가 남대천 철교를 이용해 손양까지 한 번 갔다 왔다.


  남대천 철교 공사를 하는데 삐아(교각) 사이에 나무를 엮어서 동바리를 받치고 그위에 침목을 놓고 레일을 깔았는데 1칸씩 이동하면서 공사를 하였고 다 끝난 후 기관차가 운행하는 것을 딱 1번 보았는데 손양까지 갔다 왔다고 들었다.

  현 이장집 뒤로 철교 밑까지 레일이 깔려 있었는데 이 길을 자갈선이라고 불렀으며 남대천 버덩까지 레일을 놓아 자갈을 채취에서 구르마(손수레)로 실어 날랐는데 그때는 주로 주민들이 강제로 부역(노역)을 하였다.


● 어머니 몰래 친구하고 기차를 타고 간성까지 갔다 왔다.


  해방 후 11살 무렵 아침에 한살 위인 진기 친구와 어머니 몰래 간성까지 기차를 타고 갔다가 간성에서 저녁 6시쯤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밤 9시경에 양양으로 돌아 와서 배가 고파 부엌에 들어가 딸그락 거리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조용히 밥을 먹었던 생각이 나는데 딱 한 번만 갔다 온 적이 있다.

  우리 동네 앞에 약 20~30여 마리의 말을 키우는 마구간이 있었다.

  당시에는 거름이 귀하여 말똥을 서로 가지고 가려고 했는데 그 마구간으로 통을 들고

말똥을 가리러 갔다가 말이 뒷발로 통을 걷어차 혼이 난적이 있다.


● 남대천 철교 침목을 뜯어서 집을 짓는 기둥으로 사용했다.


  6·25전쟁이 나고 인민군이 기관고 옆에 무기, 장비 등을 쌓아놓은 것과 그밖에 탈취한 것으로 보이는 콩을 비롯한 곡물을 실은 도라꾸(화물차)를 뱀째산의 소나무 가지로 덮어 두었는데 함포사격으로 박살이 났으며 터지는 소리와 화염이 엄청났으며, 이 무렵 이틀에 한번 꼴로 포격을 했다.

  하루는 어른들이 가평 앞바다에 군함이 와 있다는 소문을 듣고 피난 가라고 해서 감곡리로 피신했는데 이날 우리 집과 전한기집 등 4집이 포탄에 맞아서 파손되었다.

  우리 아버지는 마굿간(외양간)의 소를 지키기 위하여 남아 변소 뒤에 숨었었다가 피해를 보지 않았다.

  6·25전쟁이 끝나고 레일은 공병대에서 모두 뜯어가고 우리는 기름을 먹인 6~9자가량 되는 긴 침목을 뜯어다 집을 지을 때 기둥과 집 재목으로 사용하기도 했는데, 우리뿐만 아니라 온 동네사람들이 모두 가져왔다. 이때 우리 집은 역에 가서 함석을 주워 다가 지붕재로 사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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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주민들이 다니는 좌측 도로 길은 기관차 돌리는 레일선이고 

우측 플랫폼 다음은 원산으로 가는 기차선로라고 증언하는 김세철씨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