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북부선 종착지 양양역

2. 철도 부설과 기차운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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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100회 작성일 2021-03-03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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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철도 부설과 기차운행


1) 철도 부설


  일제는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1941년부터 질 좋은 양양 자철광을 대량 수송하기 위하여 양양역에서부터 서면 장승리 광업소까지 철도를 개설하기 시작했다.

  철도가 개설되기 전에는 삭도(케이블카:속칭 솔개미차)를 이용하여 철을 양양역까지 운반하게 되었다.

  그 당시 삭도 시설과 양양역에서부터 광산까지 철길 노반공사를 조성하는데 서선리 마을 앞의 안경다리 공사가 난공사였는데 이 공사에는 주로 전라도사람들로 구성된 보급대원들이 투입되었다.

  지금은 안경다리가 철거되었지만 당시 보급대원들이 믹서기를 이용하여 콘크리트를 타설했는데, 이때 서선리 동네사람들은 개울에 있는 자갈을 주어 속칭 학꾸띠기를 해서 돈을 조금씩 벌기도 하였다.

  또한 안경다리공사는 철근대신 광산에서 사용하다가 다 닳고 못쓰게 된 와이어를 사용하였으며 4명이 1조가 되어 산을 깎아내고 흙을 파서 손수레로 운반하여 상자에 넣고 다졌으며 공사에 동원된 보국대원들은 서선리 마을에 있는 함바집에서 숙식을 하였다.


2) 기차 운행


  1942년 9월경 양양광업소에 기차가 개통되면서 광업소구내에 장승역이 들어서면서 양양에서 광산까지 하루 2차례 왕복하였다.

  광산에서 양양역으로 철광석을 실은 화차는 양양역에서 출발하는 동해북부선의 객차와 화물칸에 이어 달아서 바로 운행될 수 있었다.

  광산역(장승리역)에서 운행되는 기차에는 객차도 2량이 달려있어 이 객차에는 주로 광업소 종사원과 그 가족과 그리고 광산 주변의 주민들도 이용하였다.

  양양역에서 기차가 광산으로 올라와 방향을 바꾸어 다시 양양역으로 내려 갈 때에는 기차 앞부분인 기관차를 지금 광산 굴에서 조금 더 내려와서 후진으로 올라갔는데 이때 사람들이 직접 회전대 손잡이를 잡고 돌려서 기관차를 돌렸다.

  당시 양양광산은 밤이 되면 복선으로 설치되었던 철로 변 주위에는 항상 불을 환하게 밝혔으며, 역무원들이 수신호용으로 커다란 간드레(candle)를 흔들며 빨간불과 파란 불을 번쩍거리며 사고방지를 위하여 주변경계를 삼엄하게 했다.

  철도가 광산까지 개통되기 이전에는 양양역까지 철광석 운반은 삭도를 이용하였다. 1941년경부터 삭도(솔개미차)에 광석을 싣고 장승리 광산에서 거마리와 내곡리 모로골을 지나 청곡리를 경유해서 송암리에 도착하여 양양역 설치한 조구통에 쏟아 놓은 후 화물차에 옮겨 싣고 동해북부선의 객차 뒤에 화물칸을 이어 달아서 15~20량 정도가 운행되었다.

  솔개미차는 10~20m의 높이의 한 아름되는 나무에 검은 기름을 칠하여 탑과의 거리는 지형에 따라 50m에서 많게는 약 70~80m 간격으로 세웠으며, 로프에 매달려 가는 솔개미차와의 서로간의 거리는 약 50여m 간격으로 운행되었으며 운행속도는 느린 속도로 천천히 움직였으며 소음이 심했다.

  동력은 영월 화력발전소에서 끌어와 사용하였으며, 바가지에 철을 실어 하루에 1~2회씩 24시간 운행하였으며 철광석을 실은 기차는 1일 1~2회 5~7량을 운행하였다.

  8·15 해방 후 38°선 이북의 양양역을 포함한 대부분 양양지역은 초창기에 소련군이 진주하면서부터 북한정치가 시작되었다.

  광산을 운영하던 일제가 본국으로 돌아간 후부터 북한에서는 갱내 채굴은 하지 않고 주로 일제 강점기에 채굴한 철광석과 그들이 사용하던 기존 시설을 이용하여 기차로 운반한 철광석은 양양역에서 동해북부선 원산행 열차에 달아서 제련소와 제철소가 있는 장전, 함흥 등지로 반출했다.

  당시 인공치하에서는 양양광업소장을 광장이라 불렀다.

  8·15 해방 전부터 1950년 한국전쟁 이전까지 약 8~9년간 동해북부선 종착지인 양양역에서 양양광업소에 생산되는 철을 싣고 동해북부선을 따라 일본과 북한으로 운반되었던 기차는 1950년 6월 25일 전쟁발발과 동시에 기간시설물이었던 양양역의 철도 시설을 포함한 부대시설은 함포사격 등으로 피해를 입는 등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 모두 파괴된 후 철광석을 실어 나르던 기차는 멈추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