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북부선 종착지 양양역

1. 양양 철광산 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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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163회 작성일 2021-03-03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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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양 철광산 개황

 

1) 연혁

▪ 1933년 일본 석정(石井)광업소에서 개발 착수.

▪ 1937년 8월 일본인 광업권 설정 등록.

▪ 1938년 7월 일본 종연(種淵)공업주식회사 2,000만圓에 매수 채굴.

▪ 1939년 3월 일본 종윤실업(주) 이전 등록 후 해방 전까지 철광석 생산.

▪ 1945년 8월 해방 후 북한에서 채굴.

▪ 1953년 국유편입.

▪ 1955년 8월 수복 후 제1군사령부 공병부에서 개발.

▪ 1955년 12월 양양철광공사로 발족.

▪ 1963년 11월 대한철광(주) 이전등록

▪ 1967년 2월 국영에서 민영화(삼미개발주식회사)

▪ 1987년 2월 대한철광주식회사로 창립.

▪ 1995년 생산중단으로 폐광.


2) 채광

  초창기 양양 광업소에서는 주로 서선리 탑동에서 철을 많이 생산하였는데 당시 탑동에서는 겉흙만 걷어내고 발파만 하면 철광석이 나오는 노천 채굴 광산이었다.

  이때부터 일제는 본격적으로 채광을 시작하였는데, 이곳에 자철 함유량이 50∼80%인 양질의 철광석이 대량으로 매장되었음을 발견하고 전쟁무기 조달을 위하여 양양역이 개통된 후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1941년부터 철광석을 삭도(속칭 솔개미차)와 1942년부터는 기차를 이용하여 양양역으로 운반한 다음부터는 동해북부선철도를 이용하여 1945년 8월 해방 직전까지 일본으로 반출하였다.

  또한 일제가 광산에서 철을 한창 채굴할 무렵 광산지역에는 광업소 종사자들을 포함해서 무려 약 3만여명이나 되는 인구가 살았으며, 탑동에도 약 5,000여명이 살았는데 이들은 탑동 골짜기 흘러내려오는 계곡 물줄기를 옆으로 지어진 여러 곳의 사택에서 광업소 종사자들은 가족들과 함께 집단생활을 하며 살았다.

  이 사택들은 거마리 단지골에서 한 아름이 넘는 소나무들을 베어 지었는데, 그 나무들이 얼마나 무거웠던지 우차에 한 토막씩만을 싣고 탑동으로 옮겨 각재 및 판자를 캐어서 사택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