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북부선 종착지 양양역

2. 근대의 교통수단과 철도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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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402회 작성일 2021-03-03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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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근대의 교통수단과 철도도입


1) 우리나라의 전통 운송수단


  교통은 자연환경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산이나 강이 많은 곳보다 넓은 평야지대에서 교통이 발달하는 것은 도로를 건설하기 편한 지형조건 탓이다. 따라서 산지가 국토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그 사이를 많은 강들이 흐르는 우리나라는 구한말(舊韓末) 신작로(新作路)가 나기 전까지는 교통의 발달이 미약하였다.

  조선시대까지 길은 사람이 이동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빠른 소식전달을 위해 전국에 통행로를 만들었고 이 관용로(官用路)가 일반인의 여행로와 보부상(褓負商)의 장삿길로 이용되었다.

  옛 왕조시대의 교통수단은 사람, 말, 나룻배가 전부였다. 이런 교통수단은 나라의 위급한 소식이나 왕명을 각 지방 통치자들에게 빨리 전달하기 어려워서 고려(高麗) 의종(毅宗) 3년(1149)에 중국에서 봉수제도(烽燧制度)를 도입하였다. 산봉우리에서 밤에는 횃불로 낮에는 연기를 피워 연락하는 봉수는 당시에 하루가 채 걸리지 않을 정도로 빠른 통신수단이었다. 그러나 이 방법으로는 자세한 내용을 전달할 수 없었으므로 사람이 직접 전달해야 했기에 우역제도(郵驛制度)가 실시되기에 이르렀다.

  고려시대에는 전국에 22역도 525개의 역(驛)을 설치하고 병부(兵部)에 소속시켜 관리를 두어 관장하게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41역도 543속역을 체계를 유지하며 역승(驛 丞) 또는 찰방(察訪)을 두어 역을 관리하게 하였고 역에는 말을 대기시켜 놓고 공무를 수행하는 관리에게 새 말을 빌려주어 빨리 소식을 전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때 사용한 것이 마패(馬牌)로 마패에 새겨진 말의 수만큼 말을 빌릴 수 있었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더 빠른 교통수단으로 파발제도(擺撥制度)가 시행되었다. 나라의 긴급하고 중요한 소식만을 전달하는 이 제도는 보발(步撥)과 군마(軍馬)를 타고 전하는 기발(騎撥)로 나뉘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을 연결하고 지방 구석구석까지 다스리기 위해 중앙과 지방을 잇는 도로가 정비되고 교통도 발달하게 되었다.

  자동차가 등장하기 전에 장거리 교통수단으로는 말이 가장 많이 이용되었다. 왕과 귀족들이 타는 가마는 먼 거리를 가기는 어려웠으므로 이들도 장거리를 갈 때는 말을 이용하였다.

  그러나 일반인은 말을 탈 수 없었고 나귀와 조랑말을 타야했는데, 이것도 돈 있는 양반이나 선비들의 전용이어서 돈 없는 서민들은 언제나 도보로 여행하였다.

  그러다가 구한말에 이르러 우리나라의 교통수단에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다른 나라의 여러 가지 문물과 함께 1870년대 중엽에는 인력거가, 1890년대 초반에는 자전거가 들어왔으며, 갑오경장을 전후로 서양마차가 등장하였고, 곧이어 자동차도 처음 선을 보였다.

  1899년 5월 서울에 등장한 전차는 고종황제의 홍릉(洪陵)행차를 위해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에 궤도를 부설하고 미국에서 차체를 들여와 운행되기 시작하였다. 운행구간을 세 구간으로 나누어 5전의 요금을 받았는데 당시 자장면 한 그릇에 3전이었으니 비싼 편이어서 초기에는 고관대작과 서양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였으며 그리고 기생들이 심심풀이로 타고 다녔다.

  최초의 대중교통 수단이라고 할 수 있는 전차는 1960년대까지 이용되다가 자동차의 증가와 더불어 소통불편을 이유로 사라졌다.


2) 철도 도입


  19세기 중엽 우리나라에는 서구의 과학기계 문명이 점차 도입됨에 따라 철로가 새로운 관심사로 등장하게 되었다. 1877년 일본에 수신사로 다녀온 김기수(金綺秀)는 그의 견문(見聞)기록인 일동기유(日東記遊)에서 기차의 경이로움을 화륜거(火輪車)란 이름으로 소개하였다.

  김홍집도 1880년 일본에 다녀와서 국가 운영상 철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말과 우마차(牛馬車)와 인력거(人力車)가 왕래하고 교통수단이 별로 없던 우리나라에 철도에 관한 이야기는 획기적 사건이었다.

  서양에서는 영국이 1825년, 미국이 1830년, 일본이 1872년에 철로를 개통된 것을 사신으로 가서 보고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82년 열강이 철로개설을 요구하자 당시의 조선 정부의 재정고문이던 독일의 묄렌 도르프는 고종에게 국고의 부족을 이유로 연기를 건의하였다.

  1872년 10월 일본에서 개통 된지 4년 뒤인 1876년 4월에 조선의 관료 김기수는 일본에 수신사로 건너가서 일본 최초의 개통 구간인 동경(東京)의 신바시(新橋)에서 요코하마(橫浜)까지 기차를 타 보고 그의 저서 일동기유(日東記遊)에 다음과 같은 요지로 우리나라에 화륜거란 이름으로 최초로 철도를 소개하였다.


  “기차를 타기 위해 승강장에서 잠간 쉬었다. 승강장 옆의 철길에 40~50간이나 되는 긴물체가 있었으나 그것이 기차인줄 모르고 기차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바로 그 긴 물체가 기차라고 대답하더라.

  기차는 첫 간마다 안방 같은 실내가 있고 실내로 들어가는 승강구가 있더라. 기차는 쇠갈고리로 연결하였으니 능히 30~40간 에서 40~50간이 되더라. 기차 밖은 무늬가 있는 나무로 장식하고 실내는 가죽과 털, 담요 등으로 꾸몄다. 실내에 들어가니 양쪽에 의자가 있어 마주 대하니 여섯 사람 또는 여덟 사람이 앉게 되어 있더라. 의자 양쪽은 모두 유리로써 막았는데 장식이 찬란하여 눈이 부시더라. 차마다 모두 바퀴가 있어 앞차의 바퀴가 구르면 뒷 차의 바퀴도 따라서 구르게 되니 우뢰와 번개처럼 달리고 바람과 제비같이 날쌔더라.

  한 시간에 300~400리를 달린다고 하였는데 차체는 안온하여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으며 다만 좌우의 산천초목, 가옥, 인물이 보이기는 하나 앞에서 번쩍 뒤에 번쩍함으로써 도저히 잡아보기가 어렵더라.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신바시 까지 도착하였으니 그 거리가 95리(36km)나 되었던 것이다.

  화륜거(火輪車)는 반드시 철로를 따라가게 되어 있다. 양쪽 수레바퀴가 닿는 곳에는 선로를 깔았으니 수뢰바퀴가 짓밟고 지나가도 궤도를 벗어나지 않았다. 때로는 정차하는 곳도 있었으나 바퀴가 회전을 잘 함으로써 군색하고 막힘이 없더라. 노면에 철을 놓은 것도 또한 복선으로 하였으니 여기서는 차가 가고 저기서는 차가 와서 오는 것은 오고 가는 것은 가더라도 양쪽이 서로 방해됨이 없고 충돌하지 않더라. 오는 차와 가는 차가 또한 반드시 방향이 있었으니 오는 차는 왼쪽으로 오고 가는 차는 오른쪽으로 갔으며 때로 혹시 서로 만나게 되면 같은 시간에 정차하여 양쪽에 탄 사람들이 노고를 위로하더라.

  한간에는 남자가 타고 또 한간에는 부녀자가 탔으며 또 한간에는 본 국민, 한간에는 외국인이 탔는데 간간이 각각 다르기는 하나 면면히 서로 엿보게 되어있다.

  정거장에 내려서 노고를 위문하기를 겨우 마치자 화륜거는 즉시 불을 밟고 회오리 바람처럼 눈 깜작할 사이에 보이지 않으니 말문이 막혀 머리를 긁으며 놀랄 뿐이로다.”


  조선의 조정은 김기수의 일동기유로 일본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여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파견하였다.

  김기수는 귀국하여 덕원부사, 사헌부 대사헌, 한성부좌윤 등의 관직을 역임하다가 1894년 6월 62세로 세상을 떠났다.

  1885년 8월 서울~인천사이에 전기통신사업이 시작되면서부터 철도에 대한 인식은 더욱 넓게 퍼지기 시작했다. 뉴욕주재 한국영사는 1887년 2월 9일 서울~인천 사이의 철도부설을 공문으로 건의했다. 또 1899년 주미 한국공사로 있던 박정양(朴定陽)의 수신사 이하영(李夏榮)은 귀국할 때 정교한 철도 모형을 가지고 와서 고종과 대신들에게 그것을 보여주고 철도의 편리함과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고종은 1892년 미국인 모스 (J,R Morse)를 초청하여 이완용(李完用)과 이하영(李夏榮)으로 하여금 철도 건설문제를 의논하였으나 반대하는 자들이 많아 성사되지 못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의 조야에서는 철도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지식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189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우리나라의 선각자들 가운데 우리의 힘으로 철도를 건설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구한말인 1897년 3월 12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철도 경인부설권을 가진 미국인모스(James. R. Morse)가 인천 우각리에서 경인선 철도노선의 기공식을 거행하고 철도 공사를 진행하였으나, 1898년 자금부족으로 전체 공정이 반을 진행한 상태에서 일본 정부의 자본가인 경인철도인수조합(후에 경인철도합자회사로 개편)이 한국정부의 허락도 없이 경인부설권을 인수 일본인 삽택영일(澁澤榮一)이 공사를 재개 완공하므로 우리나라에서 최초인 1899년 9월 18일 제물포와 노량진간의 경인철도가 개통되어 기차 운행이 시작되었다. 【출처: 한국철도사, 철도박물관도록】


<그림 1> 경인선 개통과 함께 한국에 최초로 등장한 모갈형 증기기관차 (1899년 9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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