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지방의 제사의식

2. 양양향교석전대제 襄陽鄕校釋奠大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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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702회 작성일 2022-03-11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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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양양향교석전대제(襄陽鄕校釋奠大祭)



■ 개요(槪要)

▪ 주관(主管) : 양양향교 전교(襄陽鄕校典校)

▪ 장소(場所) : 양양향교 대성전(襄陽鄕校大成殿)

▪ 주신(主神) :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

▪ 향사(享祀) : 매년 2·8 상정일(上丁日)

▪ 준비(準備) : 양양향교



■ 의미(意味)

문묘(文廟)에서 공부자(孔夫子)에게 제사 지내는 의식을 말한다. 즉 만세종사(萬世宗師) 이신 공부자께서 남기신 인의도덕의 이상을 근본으로 삼아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효제충신(孝悌忠信)의 실천과 수제치평(修齊治平)의 도리를 천명(闡明)함에 있어 배사모성(拜師慕聖)의 예로써 공부자께서 자리에 앉아 계신 듯이 엄숙하고 경건하게 전례(奠禮)를 봉행하는 것을 석전이라 한다.

양양향교에서는 매년 춘기 2월 상정일(春期 陰 二月 上丁日)과 추기 8월 상정일(秋期 陰 八月 上丁日)에 5성(五聖)과 공문 10 철(孔門十哲), 송조 6현(宋朝六賢), 아국 18현 (我國十八賢)께 석전(釋奠)을 봉행하였는데, 그동안 향교 운영상의 이유로 2006년까지는 2 · 8 상정일(上丁日)에 향교 대성전서 봉행, 2007년 공부자 기신일(忌辰日)과 탄강 일(誕降日)로 변경, 2018년 춘기석전부터 다시 2 · 8 상정일(上丁日)로 정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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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전>



■ 연원 및 변천

석전(釋奠)이란 문묘(文廟)에서 공자를 비롯한 성인(聖人)과 현인(賢人)들인 선성선현(先 聖先賢)에게 매년 봄가을 지내는 제례 의식이다. 석(釋)은 ‘놓다[舍]’ 또는 ‘두다[置]’의뜻을 지닌 글자로써 ‘베풀다’ 또는 ‘차려놓다’라는 뜻이며, 전(奠)은 추(酋)와 대(大)의 합성어(合成語)로 ‘추(酋)’는 술병에 술을 담은 뒤 덮개를 덮어놓은 형상으로 술을 의미 하고, ‘대(大)’는 물건을 놓는 받침대를 상징한다. 따라서 석전은 술을 받들어 올린다는 의미가 된다.

『주례(周禮)』나『예기(禮記)』 등의 경전 기록에 따르면, 석전은 본래 산천(山川)과 묘사(廟社)에서 거행하는 제사였고, 또 학교에서 선성선사(先聖先師)에게 올리는 제사를 석전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후대로 내려오면서 전자(前者)의 의식은 사라지고 학교에서 거행하는 제사 의식만을 석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석전은 ‘정제(丁祭)’ 또는 ‘상정제(上丁祭)’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석전을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上丁日)에 거행 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석전제를 올리는 장소인 문묘에는 유학의 발전에 기여한 성현들의 신위가 등급에 따라 나뉘어 배치되어 있다.

석전의(釋奠儀) 정위(正位)는 공자 1위(位)이며, 안자(顔子) · 증자(曾子) · 자사(子思) · 맹자(孟子) 등의 4위가 배향위(配享位)에 해당한다. 여기에 공자의 대표적인 제자인 10철 (哲)과, 송나라 성리학의 정통을 이었다고 평가받는 주돈이(周敦頤) · 정호(程顥) · 정이 (程頤) · 소옹(邵雍) · 장재(張載) · 주희(朱熹) 등을 종향위(從享位)로 삼았다. 그밖에 동무 (東廡)와 서무(西廡)에는 유학의 진흥에 공을 세운 우리나라의 성현 18명을 각각 모셨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태조 7년(太祖, 1398), 숭교방(崇敎坊)에 성균관을 설치해 국립 최고학부의 기능을 다하게 했으며, 정전(正殿)인 대성전에는 공부자(孔夫子)를 비롯해서 4성, 공문 10철과 송조 6현 등 21위를 봉안했고, 동 · 서무에 우리나라 명현 18위를 봉안하여 매년 춘추 두 차례 석전을 받들어 행하였다.

그러나 일제 치하인 1937년부터는 양력 4월과 10월의 15일로 변경하여 실시하다가 해방 후인 1949년에 전국 유림대회의 결의로 5성위(五聖位)와 송조 2현(宋朝二賢)만 봉안 하고 그 외 중국 유현을 매안(埋安)하고 우리나라 18현을 대성전에 승봉종향(陞奉從享) 하고 춘추석전을 폐하고 탄일(誕日)인 음력 8월 27일에 기념 석전을 봉행하다가 2007 년부터 공부자(孔夫子)의 기신일(忌辰日)을 양력(陽歷)으로 환산한 5월 11일에 춘기석전 (春期釋奠)을 봉행하고, 탄강일(誕降日)을 양력으로 환산한 9월 28일에 추기석전(秋期釋 奠)을 봉행하였다.

그 이후 2014년부터 석전대제에 관하여 “198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 지정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하라”는 문화재청의 공문지시에 따라 성균관은 2014년 추기 석전대제부터 일무(佾舞)와 아악을 198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 지정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하 며, 예법에 따라 2᛫8 상정(上丁)일에 석전 봉행을 결정하고 2014년 추기석전부터 시행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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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삼문>

 

■ 유래(由來)

석전의 유래는 유학이 수입되고 국립 학교가 설립된 삼국시대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측 된다. 특히 신라에서 신라 진덕여왕 2년(648)에 김춘추가 당나라 국학에서 석전 의식을 참관하고 돌아온 후 국학 설립을 추진한 점, 신라 성덕왕 16년(717)에 당나라로부터 공자 · 10철 · 72제자의 화상(畫像)을 가져와서 국학에 안치했던 점 등은 국학에서 석전이 봉행 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고려에서는 국학에 문묘를 설치하고 석전을 거행했으 며, 왕이 직접 술잔을 올리는 헌작(獻酌) 의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조선에서는 태조 6년(1397) 6월 한양에 새 문묘가 조성되기 시작하여 태조 6년(1397) 6 월 2일 이듬해 완성되었다. 이후 정종 2년(1400) 2월 2일에 대화재로 건물이 소실되었 다가 태종 7년 3월 21일에 한양으로 재천도 한 이후에 재건되었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다시 소실되었다가 선조 34년(1601)부터 선조 37년(1604)까지 두 차례로 나누어 복원하 였다.

문묘에서의 석전은 매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에 거행되었으며, 중사(中祀)의 규정이 적용되었다. 조선의 문묘에 봉안된 신위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으나 최종적으로 정비된 것을 살펴보면, 정전(正殿)인 대성전(大成殿)에는 공자를 비롯한 4성(四聖), 10철(哲)과 송조(宋朝)의 6현(六賢) 등 유학(儒學)에서 성인과 철인, 현인으로 받드는 인물 21위(位) 가 봉안되었고, 동무(東廡)와 서무(西廡)에는 우리나라의 명현 18위(位)를 봄과 가을로 1 년에 두 차례씩 석전(釋奠)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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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전대제 제례1>


■ 절차 및 내용

조선 초기 국가 전례 정비의 내용을 담고 있는 『세종실록』「오례」에는 석전의 의식이 네 가지로 정리되어 있다. 시학작헌문선왕의(視學酌獻文宣王儀)는 국왕이 성균관에 행차하여 문묘의 공자 신위에 술을 올리고, 성균관 유생들을 대상으로 시학(視學) 하는 의식이다. 시학은 국왕이 유생들의 공부 상황을 둘러보는 것을 가리키며, 때로는 알성 시(謁聖試)를 베풀어 인재를 뽑기도 하였다. ‘왕세자석전문선왕의(王世子釋奠文宣王儀)’ 는 왕세자가 주관하여 석전을 거행하는 의식이며, ‘유사석전문선왕의(有司釋奠文宣王 儀)’는 관원들이 주관하여 석전을 거행하는 의식이다. 마지막으로 ‘주현석전문선왕의(州 縣釋奠文宣王儀)’는 각 주현에 있는 향교에서 거행하는 석전 의식이다.

이상(以上)은 석전의 의식들이 성종 대에 편찬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서는 새로운 의식들이 추가 또는 세분화(細分化)되고 명칭도 일부 조정되어 수록되었다. 『국조오례의』에 실린 석전 의식은 향문선왕시학의(享文宣王視學儀), 작헌문선왕시학의(酌獻文宣王視學儀), 왕세자작헌문선왕입학의(王世子酌獻文宣王入學儀), 왕세자석전문선왕 의(王世子釋奠文宣王儀), 유사석전문선왕의(有司釋奠文宣王儀), 문선왕삭망전의(文宣王 朔望奠儀), 문선왕선고사유급이환안제의(文宣王先告事由及移還安祭儀), 주현석전문선왕 의(州縣釋奠文宣王儀), 주현문선왕선고사유급이환안제의(州縣文宣王先告事由及移還安祭 儀) 등이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서 정비된 석전 의식은 조선 후기까지 큰 변화 없이 계속 이어졌다. 또, 광무 1년(1897) 대한제국 선포 이후 제정된 대한예전(大漢禮典)에서도 왕세자가 황태자, 문선왕이 문묘(文廟)로 바뀌는 등의 명칭 변화만 있을 뿐, 실제 거행 되는 의식의 절차는 국조오례의의 내용을 준수하였다.



■ 헌관 급 제집사 분방

헌관 및 제집사의 인원은 대성전 3명, 동서종(東·西從) 각 1명, 동서무(東西廡) 각 1명, 집례, 대축, 알자(謁者), 찬인(贊人) 각 1명, 봉향(奉香), 봉로(奉爐), 봉작(奉爵), 전작(奠 爵), 사준(司樽), 동종봉향(東從奉香), 동종봉작(東從奉爵), 동종전작(東從奠爵), 동종사준 (東從司樽), 서종봉향(西從奉香), 서종봉작(西從奉爵), 서종전작(西從奠爵), 서종사준(西從司樽), 동무봉향(東廡奉香), 동무봉작(東廡奉爵), 동무전작(東廡奠爵), 동무사준(東廡司 樽), 서무봉향(西廡奉香), 서무봉작(西廡奉爵), 서무전작(西廡奠爵), 서무사준(西廡司樽), 고수(鼓手), 전사관(典司官) 등 총 34명이다.

대성전의 초헌관은 본래 양양향교 전교(典校)이다. 그러나 변경하여 지금은 초헌관은 양양군수,아헌관은 의회의장, 종헌관은 외부 기관장이 행하도록 했다. 그리고 동서종(東 西從)과 동서무(東西廡) 헌관 및 집례는 유림회원 중에서 학덕이 있는 적임자를 선정한 다. 기타 제 집사는 청년회원 중에서 적격한 자를 결정한다.


▶▷ 진행(進行)

집례의 창홀(唱笏)에 따라 알자는 초헌관을 인도하여 제수의 진설을 살핀다.

찬인(贊人)은 축관과 제집사를 인도하여 관세위(盥洗位)에 나아가 관수(盥手), 세수(帨 手)하고 네 번 절하고 대성전 각각자리에 오른다.

알자와 찬인이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 분헌관을 인도하여 소정 위치에 들어간다.

알자(謁者)가 삼헌관에게 행사를 알린다.

헌관 이하 참례자는 일동 사배(四拜)를 한다.


전폐례(奠幣禮)를 행한다.

초헌례(初獻禮)를 행한다.

아헌례(亞獻禮)를 행한다.

종헌례(終獻禮)를 행한다.

분헌례(分獻禮)를 행한다.

음복례(飮福禮)를 행한다.

망료례(望燎禮)를 행한다.



■ 헌관 및 집사의 명칭과 임무

· 초헌관(初獻官) : 5성위(聖位)에 향을 사르고 첫 잔을 올리는 제관으로 제사의 주인 이다.

· 아헌관(亞獻官) : 5성위에 두 번째 잔을 올리는 제관.

· 종헌관(終獻官) : 5성위에 세 번째 잔을 올리는 제관.

· 분헌관(分獻官) : 동종 · 서종 · 동무 · 서무에 향을 사르고 잔을 올리는 제관.

· 전사관(典祀官) : 나라의 제사에 제수를 준비하고 제상을 차리는 일을 맡은 제관.

· 대축(大祝) : 축문을 읽는 제관.

· 알자(謁者) : 초헌관·아헌관·종헌관을 안내하는 집사.

· 찬인(贊引) : 분헌관과 대축 등 제집사를 안내하는 집사.

· 봉향(奉香) : 향(香)을 받드는 집사.

· 봉로(奉爐) : 향로를 받드는 집사.

· 봉작(奉爵) : 준소(樽所)에서 사준이 따른 술잔을 받아 헌관에게 건네주는 집사.

· 전작(奠爵) : 헌관에게서 술잔을 받아 신위 앞에 올리는 집사.

· 사준(司樽) : 준소(樽所)에서 술을 잔에 따르는 집사.



■ 제물 · 제구 · 제복 · 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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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물

어해(魚醢), 근저(芹葅), 순저(筍葅), 녹해(鹿醢), 탐해(醓醢), 궤서(簋黍), 궤직(簋稷), 토해(兎醢), 정저(菁菹), 시성(豕腥), 구저(韭葅), 폐비(幣篚), 어수(魚鱐), 진자(榛子), 녹포 (鹿脯), 보도(簠稻), 보양(簠梁), 형염(形塩), 황율(黃栗), 건조(乾棗), 양성(羊腥), 자인(茨 仁), 능인(菱仁), 제주(祭酒) 등이다.


▶▷ 제구

방형 뚜껑이 있는 보(簠), 원형 뚜껑의 궤(簋), 향합(香盒), 향로(香爐), 촉대(燭台), 변두 (籩豆), 유작(鍮爵), 유잔(鍮盞), 준(樽), 저(葅), 식상(食床) 주전자(酒煎子) 등이다.


▶▷ 제복

헌관과 집례, 대축, 알자, 찬인, 전사관은 금관제복(金冠祭服)을 입는다.

제집사는 유건도복(儒巾道服)을 입는다.


〈축문〉

維 檀君紀元○○○○年 歲次太歲某月干支 朔某日干支 襄陽郡守 某 敢昭告于 

大成至聖文宣王 伏以維王 道冠百王 萬世宗師 玆値上丁 精禋是宜 謹以 牲幣醴齊 粢盛庶 品 式陳明薦 以先師兗國復聖公 郕國宗聖公 沂國述聖公 鄒國亞聖公 配享 孔門十哲 宋朝 六賢 我國十八賢 從 尙饗


유 단군기원○○○○년 세차태세모월간지 삭모일간지 양양군수 모 감소고우 

대성지성문선왕 복이유왕 도관백왕 만세종사 자치상정 정인시의 근이 생폐예제 자성서품 식진명천 이 선사 연국복성공 성국종성공 기국술성공 추국아성공 배향 공문십철 송조 6현 아국 18현 종 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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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전대제 제례 2>

 

 

▶▷ 5성(五聖)

· 공부자(孔夫子) : 명(名)은 구(丘)요, 자(字)는 중니(仲尼)이며 노(魯)나라 사람으로  부(父)는 숙량흠이요, 모(母)는 안씨(顔氏)이다. 노(魯)나라  대사구(大司寇)를 지냈으며,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으로  추존(追尊)됨.

· 안자(顔子) : 명(名)은 회(回)요, 자(字)는 자연(子淵)이며, 노(魯)나라 사람으로  부(父)는 무요(無繇)이며, 모는 강씨(姜氏)이다.  연국복성공(兗國復聖公)으로 추봉(追封)됨.

· 증자(曾子) : 명(名)은 삼(參)이요, 자(字)는 자여(子輿)이며 노(魯)나라 사람으로  점(點)의 아들이요 성국종송공(郕國宗聖公)으로 추봉됨.

· 자사(子思) : 명(名)은 급(伋)이요, 자(字)는 자사(子思)이며, 부(父)는 리(鯉)요,  공부자의 손자이다. 기국술성공(沂國述聖公)으로 추봉됨.

· 맹자(孟子) : 명(名)은 가(軻)요, 자(字)는 자거(子車)이며, 추(鄒)나라 사람으로  부(父)는 격공의(激公宜)요, 모(母)는 장씨(仉氏)이다.  추국아성공(鄒國亞聖公)으로 추봉됨. 


▶▷ 공문 10철(孔門十哲)

· 민손(閔損) : 자(字)는 자건(子騫)이요, 노(魯)나라 사람이며, 비공(費公)으로 추봉됨.

· 염경(冉耕) : 자(字)는 백우(佰牛)요, 노(魯)나라 사람이며, 운공(鄆公)으로 추봉됨.

· 염옹(冉雍) : 자(字)는 중궁(仲弓)이요, 노(魯)나라 사람이며, 설공(薛公)으로 추봉됨.

· 재여(宰予) : 자(字)는 자아(子我)요, 노(魯)나라 사람이며, 제공(齊公)으로 추봉됨.

· 단목사(端木賜) : 자(字)는 자건(子騫)이요, 위(衛)나라 사람이며, 여공(黎公)으로 추봉됨.

· 염구(冉求) : 자(字)는 자유(子有)요, 노(魯)나라 사람이며, 서공(徐公)으로 추봉됨.

· 중유(仲由) : 자(字)는 자로(子路)요, 노(魯)나라 사람이며, 위공(衛公)으로 추봉됨.

· 언언(言偃) : 자(字)는 자유(子游)요, 오(吳)나라 사람이며, 오공(吳公)으로 추봉됨.

· 복상(卜商) : 자(字)는 자하(子夏)요, 위(魏)나라 사람이며, 위공(魏公)으로 추봉됨.

· 전손사(顓孫師) : 자(字)는 자장(子張)이요, 진(陳)나라 사람이며, 진공(陳公)으로 추봉됨.


▶▷ 송조 6현(宋朝六賢)

· 주돈이(周惇頤) : 자(字)는 무숙(茂叔), 호(號)는 염계(溓溪)이며, 송(宋)나라로  도주한 사람이다. 관(官)은 남강군사(南康郡事)요, 여남백(汝南伯)이며, 도국공(道國公)으로 추봉되었다.

· 정 호(程 顥) : 자(字)는 백순(伯淳), 호(號)는 명도(明道)이며 송(宋)나라 하남 (河南)사람이다. 관(官)이 종정사승(宗正寺丞)이요, 하남백(河南伯)이며, 예국공(豫國公)으로 추봉되었다.

· 정 이(程 頤) : 자(字)는 정숙(正叔)이요, 호(號)는 이천(伊川)이며, 명도(明道)의  아우이다. 관(官)은 선의랑(宣義郞)이요, 이천백(伊川伯)이며,  낙국공(洛國公)으로 추봉되었다.

· 소 옹(邵 雍) : 자(字)는 요부(堯夫)요, 호(號)는 안락(安樂)이며, 송(宋)나라 하남 (河南)사람이다. 관(官)이 영주단련추관(潁州團練推官)이요, 시(諡)는 강절(康節)이다. 신안백(新安佰)으로 추봉되었다.

· 장 재(張 載) : 자(字)는 자후(子厚)요, 호(號)는 횡거(橫渠)이며, 송(宋)나라  봉상미현(鳳翔郿縣)사람이다. 관(官)이 동지태상예원 (同知太常禮院)으로 미백(郿伯)으로 추봉되었다.

· 주 희(朱 熹) : 자(字)는 원회(元晦)요, 호(號)는 회암(晦菴)이며, 송(宋)나라 무원 (婺源)사람이다. 관(官)이 사훈이부랑(司勳吏部郞)이요, 휘국공 (徽國公)으로 추봉되었다.


▶▷ 아국 18현(我國十八賢)

· 설 총(薛 聰) : 자(字)는 총지(聰智)요, 호(號)는 빙월당(氷月堂)이며,  경주사람이다. 부(父)는 승(僧) 원효(元曉)요, 관(官)이 한림학사(翰林學士)이며, 홍유후(弘儒侯)로 추증되었다.

· 최치원(崔致遠) : 자(字)는 고운(孤雲)이며 호(號)는 해운(海雲)이며, 경주사람이다. 신라 때 관(官)이 한림학사(翰林學士)였으며, 시호는 문창후 (文昌侯)이다.

· 안 유(安 裕) : 초명(初名)이 향(珦)이며, 자(字)는 사온(士蘊)이며, 호(號)는 회헌 (晦軒)으로 순흥사람이다. 고려 충렬왕 때 관(官)이 도첨의중찬 (都僉議中贊)이었으며, 시호는 문성공(文成公)이다.

· 정몽주(鄭夢周) : 자(字)는 달가(達可)요, 호(號)는 포은(圃隱)이며, 영일사람이다.

고려 공민왕 때 관(官)이 시중(侍中)이었으며, 시호는 문충공 (文忠公)이다.

· 김굉필(金宏弼) : 자(字)는 대유(大猷)요, 호(號)는 한훤당(寒暄堂)이며, 서흥사람 이다. 관(官)이 형조좌랑(刑曹佐郞)이며, 중종 때 우의정을 증직 받았고,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다.

· 정여창(鄭汝昌) : 자(字)는 백욱(伯勗)이요, 호(號)는 일두(一蠹)이며, 하동사람이다.

관(官)이 현감(縣監)이었으며, 우의정을 중직 받았고, 사호는  문헌공(文獻公)이다.

· 조광조(趙光祖) : 자(字)는 효직(孝直)이요, 호(號)는 정암(靜庵)이며, 한양사람이다.

관(官)이 대사헌(大司憲)이며, 영의정을 증직 받았고, 시호는  문정공(文正公)이다.

· 이언적(李彦迪) : 자(字)는 복고(復古)요, 호(號)는 회재(晦齋)이며, 주사람이다.

관(官)이 죄찬성(左贊成)이며, 영의정을 증직 받았고, 사호는  문원공(文元公)이다.

· 이 황(李 滉) : 자(字)는 경호(景浩)요, 호(號)는 퇴계(退溪)이며, 진성사람이다.

관(官)이 대제학(大提學)이며, 영의정을 증직 받았고, 시호는  문순공(文純公)이다.

· 김인후(金麟厚) : 자(字)는 후지(厚之)요, 호(號)는 하서(河西)이며, 울산사람이다.

관(官)이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이며, 영의정을 증직 받았고,  시호는 문정공(文正公)이다.

· 이 이(李 珥) : 자(字)는 숙헌(俶獻)이요, 호(號)는 율곡(栗谷)이며 덕수사람이다.

관(官)이 이조판서(吏曹判書)이며, 영의정을 증직 받았고, 시호는 문성공(文成公)이다.

· 성 혼(成 渾) : 자(字)는 호원(浩原)이요, 호(號)는 우계(牛溪)이며 창령사람이다.

관(官)이 좌참찬(左參贊)이며, 영의정을 증직 받았고, 시호는 문간공(文簡公)이다.

· 김장생(金長生) : 자(字)는 희원(希元)이요, 호(號)는 사계(沙溪)이며, 광산사람이다.

관(官)이 형조참판(刑曹參判)이며, 영의정을 증직 받았고, 시호는 문원공(文元公)이다.

· 조 헌(趙 憲) : 자(字)는 여식(汝式)이요, 호(號)는 중봉(重峯)이며 백천사람이다.

관(官)이 첨정(僉正)이며, 영의정을 증직 받았고, 시호는  문열공(文烈公)이다.

· 김 집(金 集) : 자(字)는 사강(士剛), 호(號)는 신독재(愼獨齋)이며, 부(父)는  장생(長生)이다. 관(官)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이며, 영의정을  증직 받았고,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다.

· 송시열(宋時烈) : 자(字)는 영보(英甫)요, 호(號)는 우암(尤庵)이며, 은진사람이다.

관(官)이 좌의정(左議政)이며, 영의정을 증직 받았고, 시호는  문정공(文正公)이다.

· 송준길(宋浚吉) : 자(字)는 명보(明甫)요, 호(號)는 동춘당(同春堂)이며, 은진  사람이다. 관(官)이 좌참찬(左參贊)이며, 영의정을 증직 받았고, 시호는 문정공(文正公)이다.

· 박세채(朴世采) : 자(字)는 화숙(和叔)이요, 호(號)는 현석(玄石)이며, 반남사람이다.

관(官)이 좌의정(左議政)이며, 영의정을 증직 받았고, 시호는 문순공(文純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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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전대제 제례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