襄陽地域의 傳統寺刹

[낙산사] 가람 및 전각(殿閣)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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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63회 작성일 2023-02-28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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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의 전각은 2005년 화재 전까지 원통보전을 중심으로 보타전, 고향실, 무설전, 심검당, 해우당, 무이당, 보타락, 범종각, 조계문, 사천왕문, 홍예문, 일주문, 등의 당우가 있었다. 이 가운데 대부분이 불타서 없어져서 2005년에 발굴과 복원을 병행하여 2009년까지 3차에 걸친 복원을 하여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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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일제강점기 낙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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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소실 전 낙산사



● 원통보전(圓通寶殿) 

 

사찰의 금당(金堂)으로 의상대사가 관세음보살을 만나 ”산 정상에 대나무 한 쌍이 솟아난 곳에 불전을 지으라“는 계시를 받고 그곳에 관세음보살님을 조성하여 모셨다고 한다. 그 장소가 지금의 원통보전이다.

몽골군이 내침하여 절을 불태우고 복장 유물까지 약탈을 당하자 무신정권의 권력자 최우(崔瑀)의 후원으로 복원한 것이이규보의 낙산관음복장수보문병송에 실려 전한다. 6.25 전쟁으로 1950년 전체 당우(堂宇)가 불에 타서 큰 타격을 입었으나 1953년 4월에 이형근(李亨根, 1920년 11월 2일~2002년 1월 13일, 대한민국 군번 1번) 장군에 의해 복원되어 점안식을 거행했다. 휴전 협정이 시작되어 절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군 통수권자인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 미 8군 대장 펜프리트, 합동군단장 클라크, 이형근 중장, 5사단장, 11사단장 등 군의 주요 지휘부가 대거 참석한 것을 보면 당시 낙산사의 위상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1군단 부군단장 최홍희(국제태권도연맹 ITF 창립자) 장군이 원통보전 편액을 썼으나 유신체제를 반대해 캐나다 망명 후 북한을 방문한다는 이유로 편액이 경봉(鏡峯) 스님의 글씨로 바꾸었다. 1군단 민심참모 전형인씨가 원통보전 주련을 썼으나 2005년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는 없다.

준공(竣工) 회향식(回向式) 때 영혈사 건칠관세음보살좌상(보물 제1362호)을 처음으로 모셨다고 하며, 후불탱은 2009년 석정스님에 의해 조성 봉안되었다. 2005년 양양산불로 전각은 전소되었으나 건칠관세음보살좌상은 당시 주지 금곡(金谷)정념(正念)스님과 사부대중의 원력으로 화마 속에서도 무사할 수 있었으며, 현 전각은 앞면 3칸, 측면 3칸에 팔짝 지붕으로 2007년 11월에 복원하였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왕이 된 후 선조들을 선왕으로 추증했는데 그의 증조인 익조(翼祖 李行里)가 자식이 없어 홍련암에서 백일기도 후 얻은 자식이 도조(度祖 李善來)로 이성계의 할아버지가 되는 분이다. 이런 인연으로 낙산사는 태조에서 성종에 이르기까지 극진한 보살핌을 받아왔으며 특히 세조는 중창에 많은 지원을 하였다. 세조 때인지 아니면 예종의 자복사찰(資福寺刹)이 원인인지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원통보전 용마루에 얹었던 청기와(靑瓦) 2장이 유물로 전하는데 혹자는 원통보전이 본래 청기와 지붕이었는데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시 모두 가져가고 2장만 남긴 것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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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통보전(우측은 경봉스님 현판과 청기와)



● 보타전(寶陀壂)   

 

우리나라 대표적 관음 성지임을 상징하는 보타전과 보타락은 관세음보살이 산다는 인도의 보타락가산(補陀洛迦山)에서 따온 이름의 건물이다. 건물은 당시 보산(寶山) 주지 스님의 원력으로 1991년 불사를 시작해 1993년 마근(麻斤) 주지 스님이 회향하였다. 

규모는 앞면 5칸, 옆면 3칸이며 청기와의 팔작지붕이다. 외부 벽화에는 낙산사를 창건한 의상스님의 일대기가 그려져 있다. 법당에는 입상(立像)인 천수관음을 중심으로 좌상(坐像)인 6관음(성관음, 십일면관음, 여의륜관음, 마두관음, 준제관음, 불공견색관음) 등 7관음을 봉안했다. 이는 관세음보살이 고통과 고난을 구제하기 위해 제도할 중생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몸을 바꾸어 나타난다고 하는『법화경』『보문품』에 근거를 둔 것이다. 그 뒤에는 1,500분의 관음상을 봉안하였다.

천오백관음보살 한분 한분마다 천수천안(千手千眼)이시기에 32응신(應身)을 곱하면 5천만 겨레가 된다. 즉 5천만 우리 민족의 구원과 해탈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 모든 관음상의 재질은 백두산에서 자란 홍송이다. 또한 그 동쪽 옆 벽면에는 벽면 모두를 차지하는 대형 목각 신중탱화가 모셔져 있다.

전하는 말에는 칠 관음상을 봉안하던 날 밤하늘에서 풍악 소리가 들리고, 청학 5마리가 날아올랐으며, 거칠던 동해바다는 조용해지고, 무지개 같은 상서로운 기운과 밝고 환한 빛이 온 하늘에 가득했다고 한다. 

낙산사 보타전은 원통보전, 해수관음상과 더불어 낙산사가 관음신앙의 성지임을 보여주는 중요한 건물이다. 2005년 화재 때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로 불길이 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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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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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타전 천수관음



● 사천왕문(四天王門)   

 

사천왕문은 사찰의 중심 영역으로 진입할 때 지나게 되는 문이다. 이 문에는 사천왕상이나 그림 등을 모시며, 사찰에 들어설 때 악한 기운을 내쫓는다고 여겨진다. 

원래 고대 인도의 신이었으나, 불교에 귀의한 후 수미산 중턱에서 동서남북의 네 방향을 지키며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호하게 되었다.

낙산사 사천왕문은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이며, 맞배지붕이다. 내부에는 양 측면에 사천왕이 모셔져 있다. 

동쪽을 지키는 지국천왕(持國天王)은 음악을 관장하는 신으로 국토를 지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며, 비파를 연주하고 건달바를 거느린다. 남쪽을 지키는 증장천왕(增長天王)은 수미산 중턱 남쪽에 있는 유리 지방을 관장하는 신으로 중생의 이익을 넓고 길게 만들어 만물을 소생시킨다. 지국천왕은 긴 검을 들고 있고 구반다를 거느린다. 서쪽을 지키는 광목천왕(廣目天王)은 눈과 입을 최대한 벌려 큰 소리와 웅변(雄辯)으로 악귀를 물리친다. 용과 여의주를 잡고 있고 용과 비사사를 거느리며 멀리 두루두루 볼 수 있다.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은 보탑과 창을 들고 있고 야차와 나찰을 거느린다.

사찰을 지키며 설법을 빠짐없이 듣는다.

이 사천왕상은 조선 말기에 김주성이 조성했으며, 1914년에 문을 고치면서 사천왕상을 개금하였다. 1988년에 문을 고치고, 2010년에 문을 다시 고치면서 사천왕상 개금도 다시 하였다. 이 건물은 6·25전쟁 및 2005년 산불에도 피해가 없었다. 2005년 산불이 사천왕문 앞에 있는 큰 벗나무 두 그루가 불을 막아 화마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하며 불에 탄 벚나무는 밑둥이에서 새순이 돋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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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문(2005년 산불에도 피해를 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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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천왕문(6.25 한국전쟁 시 폭격에서도 살아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