襄陽地域의 傳統寺刹

[낙산사] 성보문화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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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53회 작성일 2023-02-28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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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연석(大硯石), 청자연적(靑瓷硯滴)


만해 한용운스님이 1928년 “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의 낙산사사적 중보물편에 “대연석 세조의 하사품( 大硯石 世祖의 下賜品)”이라고 적혀있다. 벼루는 직사각형인데 길이 50cm, 너비 30cm로 큰 편이며, 가운데는 타원형의 연지(硯池)가 파여 있다. 연적은 두꺼비 모양의 청자로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검은 빛을 띤다. 길이 10cm, 높이 6cm이다. 보물 두 점 모두 현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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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가 하사한 벼루(大硯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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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적



● 교지 2장(敎旨 二張)


역시 1928년 앞서 말한 낙산사사적중 보물편에는“교지 2장 조선 성종의 유품이니 일은 민역면제요, 일은 노비하사니라(敎旨 二張 朝鮮 成宗의 遺品이니 一은 民役免除요, 一은 奴婢下賜니라)는 기록이 나온다. 성종 임금께서 낙산사 스님들의 요역(徭役)을 면제해주고, 절에 노비를 하사한다는 내용의 교지 두 장이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 수정염주와 여의보주(水晶念珠와 如意寶珠) 


삼국유사를 보면 13세기 몽골군이 침입했을 때 수난사가 실려있다. 몽고 병란이 있던 1253∼1254년에 의상대사께서 받은 수정염주와 여의보주를 양주(양양)성으로 옮겼으나 성이 함락하려 할 때 주지인 선사(禪師) 아행(阿行)이 은합(銀盒)에 넣고 피난하려 하자 절에서 일하는 노비 걸승(乞升)이 보주를 빼앗아 땅에 묻으며 ”병란에 살아나면 보물을 나라에 바칠 것을 맹세“하였다.     1254년 10월 22일 성이 함락되었고, 아행은 죽고 걸승은 살아남았다. 적군이 물러가자 보주를 파서 명주도(溟州道) 감창사(監倉使)에게 바쳐서 잘 보관이 되었는데 1258년 11월 기림사 주지 각유(覺猷) 대선사가 임금에게 아뢰어 어부(御府임금의 창고)로 옮겨 갔다.  1273년 고려사 권 27 세가(世家) 제27 원종 14년 조에 보면 1월에 원나라 사신 마강(馬絳)이 왔다가 3월에 돌아가면서 ”낙산사 여의주를 가지고 갔다“. 원나라 왕후가 오랫동안 ”보고 싶다“ 하여 고려 왕실에 요청하자 무능한 왕실이 보관한 지 15년 만에 원나라에 강탈을 당했다.      



● 해수관음상(海水觀音像) 


낙산사 성보(聖寶) 가운데 역사에 비하여 가장 넓리 알려진 것이 해수관음상으로 오봉(五峯) 중 경내에서 가장 높은 신선봉(神仙峯)에 위치하고 있어 멀리에서도 조망이 가능하여 원력을 발할 수 있다.  낙산사 해수관음상은 당시 주지 원철(圓徹)스님의 원력으로 양질의 화강암 산지로 손꼽는 전라북도 익산에서 석재 700여 톤을 운반하여 1972년부터 불사를 시작하여 5년 만인 1977년 11월 6일 점안(點眼)하였다. 높이 16m, 둘레 3.3m, 최대 너비 6m로 대좌 앞부분에 두 마리의 용을 조각하고, 양 옆으로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관음상은 대좌 위에 활짝 핀 연꽃 위에 서 있는데 왼손에는 감로수(甘露水) 병을 받쳐 들고 오른손은 가슴 높이에서 수인(手印)을 짓고 있다. 해수관음상 둘레에 조성된 108 법륜석은 2005년 4월 낙산사 화재 이후 불법이 더욱 번창하여 중생의 번뇌를 깨달음으로 성화(聖化)시킨다는 바램에서 조성한 것이다. 108개의 장판석과 48개의 바퀴살을 화강암으로 깔았으며 2008년 6월 20일 에 완성하였다. 관음상 앞에는 비익조가 조각된 석조 불전함이 위치 해 있다. 

낙산사 내의 해수관음상은 관음지(觀音池)에도 조상(造像) 되어 있고, 홍련암 가는 길의 연하당(蓮河堂) 옆에서 관음수를 주시는 보살도 해수관음보살 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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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수관음보살상 (1977년 원철 스님의 원력으로 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