襄陽地域의 傳統寺刹

[낙산사] 성보문화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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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58회 작성일 2023-02-28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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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산사 범종(洛山寺 銅鐘 보물 제479호, 2005년 7월 7일 해제)


조선 예종 1년(1469)에 그의 아버지인 세조를 위해 낙산사에 보시(布施)한 높이 158㎝, 입지름 98㎝의 종이다. 종 꼭대기에는 사실적이고 기품 있어 보이는 용 2마리가 서로 등지고 있어 종의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어깨 부분에는 연꽃잎으로 띠를 둘렀고 몸통에는 가운데 굵은 3줄을 그어 상·하로 나누고, 위에는 보살상 4구를 새겼다. 보살상 사이 사이에는 가로로 범어로 글자를 4자씩 새기고, 보살상 머리 위로는 16자씩을 새겨 넣었다.

몸통 아래로는 만든 시기와 만들 때 참여한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종의 밑 부분에는 너비 9.5㎝의 가로줄이있어, 그 안에 당시에 유행하던 물결무늬를 새겨 넣었다.

큰 종으로 조각 수법이 뚜렷하고 모양이 아름다우며 보존상태가 좋아, 한국 종을 대표하는 걸작품이었다.

이종의 몸체에는 만든 배경과 과정이 적혀있는데 김수온이 짓고 명필 정난정이 썼다고 한다. 

“세조가 왕비와 세자를 대동하여 순례에서 돌아오는 길에 낙산사에 들렀다가 사리분신(舍利分身)의 기적을 보고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이에 낙산사를 중창하도록 하고 후에 예종이 된 세자의 자복사찰(資福寺刹)로 삼았다. 

이종은 6.25 전쟁 직후 강릉 포교당으로 가져갔다가 낙산사 복원으로 회수해 왔다고 한다. 그러나 2005년 4월 5일 낙산사에 발생한 산불로 낙산사 동종이 소실, 용해되어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2005년 7월 7일 지정 해제되었다. 현재 훼손된 종 일부가 낙산사 의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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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 동종(소실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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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예문(복원 후)



● 낙산사 홍예문(洛山寺 虹霓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3호)


낙산사의 문루(門樓)인 홍예문은 조선 세조 12년(1466) 왕이 낙산사에 행차하여 사찰을 중수하면서 건립하였다. 당시 강원도의 고을 수에 맞추어 26개의 홍예석을 써서 조성하였다고 하는데 사용된 돌은 강현면 정암리 길가에서 파석(破石)하여 가져다 쌓은 것이다. 기단부는 거칠게 다듬은 2단의 큼직한 자연석을 놓고, 그 위에 화강석으로 된 방형의 선단석(扇單石) 3개를 앞뒤 두 줄로 쌓아 둥근 문을 만들었다. 문의 좌우에는 큰 강 돌을 정교하게 다듬어 홍예문 위까지 성벽을 쌓아 사찰 경내를 구분하였다. 

홍예문 위의 누각(樓閣)은 김유성(金有聲)의 낙산사도(洛山寺圖)에 그려진 것으로 보아 18세기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홍예문 위에는 1962년에 건립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문루(門樓)가 세워져 있었으나 2005년 4월 5일 산불로 소실되어 2009년 10월 12일 복원하였다.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의 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다



● 낙산사 원장(洛山寺 垣墻,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4호)


원장은 낙산사 법당인 원통보전의 둘레를 사각으로 에워싸고 있는 담장으로 조선 세조(재위 1455∼1468)의 명으로 처음 조성되었다. 2005년 산불로 대부분 전각과 함께 일부 소실되어서 2007년 4월 5일 다시 복원하였다.

높이 3.7m, 길이 220m로 1971년 강원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담장 안쪽 벽은 기와로, 바깥쪽은 막돌로 쌓았다.

법당을 향하고 있는 담장 안쪽에는 밑부분에 2단의 장대석 기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다시 1단의 장대석 받침돌을 놓았다.

담벽은 강회 진흙과 평기와(平瓦)를 차례로 쌓아 담벽 전면은 기와로 가로줄을 맞추고, 일정한 간격으로 둥근 화강석을 배치하여 단조로운 벽면을 장식하였다. 담장 바깥면은 막돌로 벽면을 고르게 쌓았고 돌 사이에는 강회 진흙으로 메웠다. 담장 위에는 기와로 지붕을 이어 담벽을 보호하였다. 돌과 기와와 흙으로 높고 정연한 담장을 쌓고 넓은 벽면을 아름답게장식한 이 담장은, 법당을 둘러 신성한 지역을 보호하면서 공간적 조형물로도 빼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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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 원장(垣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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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 의상대



● 낙산사 의상대(洛山寺 義湘臺,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8호)


의상대(義湘臺)는 홍련암의 관음굴로 가는 해안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신라의 고승 의상(義湘)이 낙산사를 창건할 때 좌선 수행처라고 전한다. 창건 이후 이곳에 암자를 지은 것이 천년전 이라고 하는데 자세한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송강 정철(1536~1593)이 <관동별곡>에서“洛낙山산 東동畔반으로 義의相샹臺대예 올라 안자, 日일出출을 보리라”한 것과 용암체조(龍巖體照 1714∼1779) 스님의“등낙가의상대(登洛迦義湘臺)”를 보면 당시에도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근대에 들어서는 김만옹(金晩翁) 주지스님이 1925년 정자를 짓고 의상대라 편액을 부쳤다. 편액은 동아일보 제호(題號)를 쓴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가 황정견의 서체로 썼는데 친일(親日) 시비가 불거져 작가명과 낙관은 지워진 상태로 있다. 

편액을 자세히 보면“오를 의(義)”자가 아니고“복희씨 희(羲)”자로 쓰여 있어“희상대(羲湘臺)”로 읽어야 한다. 그러나편액을 쓸 당시“희(羲)”의 음이“오를 의”자로도 불렸다고 하나 지금은“희”자로만 불리고 있다. 그 뜻은“물가에서 떠오르는 해를 조망하는 곳(집)”이다. 

실제로 주변에 노송(老松)들이 자리하고 있어 동해안의 아름다운 해안 절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으며, 떠오르는 일출 경관으로 유명하여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곳이다.

1936년 폭풍으로 무너져 중건하였으며, 1974년 강원도 유형문화제로 지정이 되었다. 1975년에도 중건하였으나 현재의모습은 1995년 8월에 육각정으로 복원이 되었다. 



● 홍련암(紅蓮庵,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6호)


홍련암은 낙산사의 부속 암자로 의상대(義湘臺) 북쪽 300m 지점에 있는데 앞면과 옆면이 각 3칸씩으로 관음보살을 모

신 겹처마 팔짝 지붕이다. 

의상(義湘) 대사가 관음보살의 진신(眞身)을 친견하고“이 자리 위의 꼭대기에 대나무가 솟은 곳에 불전(佛殿)을 짓는 것이 마땅 할 것이다”라는 말씀을 들으며 여의보주를 받은 곳이다. 또한, 일설에는 의상이 이곳을 참배할 때 푸른 새를 만났는데 새가 석굴 속으로 자취를 감추자 이상히 여겨 굴 앞에서 밤낮으로 7일 동안 기도를 하였다. 7일 후 바다 위에 홍련(紅蓮)이 솟아 그 가운데 관음보살이 현신하였으므로 이 암자 이름을 홍련암이라 이름 짓고 파랑새가 사라진 굴을 관음굴 (觀音窟)이라 불렀다고 한다. 

바닷가 석굴 위에 자리 잡은 이 암자의 밑으로는 출렁이는 바닷물이 드나드는데 이 광경을 마루에 있는 작은 구멍으로 직접 목격할 수 있다. 일설에는 여의주(如意珠)를 바친 용이 불법을 들을 수 있도록 배려하여 이렇게 지었다고 한다. 이와같은 구조는 감은사지(感恩寺址)의 법당과 문무왕의 고사를 생각하게 한다.

신라 및 고려 시대 중창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임진왜란 이후인 1752년(영조 28) 덕린(德麟)이 중수하였고, 1797년(정조 21) 혜근(慧勤)이 중수하였으며, 1802년(순조 2) 청호(晴湖)·흥운(興雲)이 중수하였다. 1975년 원철(園哲)이 중창하여 옛 모습을 복원하였다. 2005년 화재 때 부처님의 가피로 화재를 면했으며 홍련암 부속 요사채만 소실되었던 것을 복원하였다.

홍련암은 1984년 6월 2일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6로 지정되었다. 홍련암 입구에는 요사채인 연하당(蓮河堂)이 있는데 이곳은 해안에서는 보기 드문 석간수(石間水)가 솟는데, 이 샘은 원효(元曉)가 양양의 영혈사(靈穴寺) 샘물을 석장(錫杖)에 담아 끌어왔다는 설화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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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련암의 저녁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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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홍련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