襄陽地域의 傳統寺刹

[낙산사] 낙산사에 깃든 불교 설화(說話)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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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43회 작성일 2023-03-02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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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유사의 이대성조의 원효(元曉)스님과 관음보살


원효(元曉) 스님께서 의상 스님이 관음을 친견했다는 소문을 듣고 뒤질세라 푸른 동해를 벗삼아 몇 날을 걸어서 낙산 남쪽 교외에 이르니 논 가운데서 흰옷을 입은 한 여인이 벼를 베고 있었다. 법사가 희롱하여 그 벼를 달라고 청하였더니, 여인도 희롱 삼아 벼가 흉작이라고 대답하였다. 

법사가 또 길을 가다가 다리 밑에 이르니, 한 여인이 월경(月經) 때 입던 옷(月水帛)을 빨고 있었다. 법사가 마실 물을청하니 여인은 그 더러운 물을 떠서 주었는데, 법사는 이를 엎질러 버리고 다시 냇물을 떠서 마셨다. 이때 들 가운데에 있는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있다가 법사를 불러 말하기를, “제호(醍醐)를 마다한 이 화상(和尙)아!” 그리고는 날아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 소나무 아래에는 벗어 놓은 신발 한 짝이 있었는데, 법사가 이윽고 절에 이르니 관음상 아래에 앞서 보았던 벗어 놓은 신발 한 짝이 있었다. 그제야 좀 전에 만난 성스러운 여인이 곧 관음의 진신임을 알게 되었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그 소나무를 관음송(觀音松)이라 하였다. 법사가 관음굴에 들어가서 다시 관음의 진용을 보고자 하였으나 풍랑이 크게 일어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갔다.



● 삼선수(三仙水)와 신선봉(神仙峯)


삼선수는 본래 홍련암 서쪽 해수관음전 후원에 있었던 샘물이다. 

원효스님이 하루는 영혈사(靈穴寺)에서 세수를 하다가 문득 말했다. “낙산은 관음도량이라 수 천만인이 오가는 곳인데 식수가 없다는 것이 유감이구나!”그러더니 짚고 있던 석장으로 땅을 찌르며 문수보살의 주문을 외우면서 낙산을 가리켰다. 그 후부터 낙산사에는 식수가 풍부하게 되었고 영혈사의 식수는 1/3로 줄었다고 한다. 

한편 의상스님이 홍련암 서쪽 봉우리에는 신선이 노닌다고 말했다. 그 뒤 하루는 백발 노인 세분이 산에서 내려와 물을마시고 산 위로 올라갔으니 이들이 신선이었다. 이후부터는 이 우물을 세분의 신선이 마셨다 하여 삼선수(三仙水)라 불렀다. 해수관음상이 있는 산을 신선이 노닌다하여 신선봉(神仙峯)이라 하였다. 



● 범일국사(梵日國師)와 정취보살(正趣菩薩)


굴산산문(崛山山門) 개산조(開山祖) 범일국사는 836년 입당(入唐)하여 남종선의 드높은 경지를 체득한 선승으로 현재에도 매년 5월 단오 때가 되면 “강릉대관령국사성황제”의 주신으로 모셔지는 민중에게 친근한 어른이다.

『삼국유사』에는 범일국사가 당나라의 명주 개국사에 이르렀을 때 왼쪽 귀가 없어진 한 스님이 여러 스님의 끝자리에 앉아 있다가 범일국사에게 말했다. “저는 스님과 같은 신라사람입니다. 제 고향은 명주 익령현(翼嶺懸, 지금의 양양군) 경계의 덕기방(德耆坊) 입니다. 조사께서 훗날 본국에 돌아가시면 꼭 저의 집을 지어주셔야 합니다.” 이윽고 범일국사는 여러 총림으로 두루 다니며 선에 정진하다가 마조도일선사의 제자인 염관제안선사에게 법을얻고 847년 귀국하여 당시 명주의 호족으로 이름 높은 도독 김공의 초청에 의해 굴산사를 세우고 선의 가르침을 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858년 2월 보름밤 중국의 명주 개국사에서 만났던 스님이 창문 밑에 와서 말했다. “옛날 명주 개국사에서 조사께서는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약속이 늦어지는 것입니까.”깜짝 놀란 국사는 꿈에서 깨어나 사람들과 함께 익령 경계로 찾아가서 그 스님이 있는 곳을 찾았다.

수소문 끝에 낙산(洛山) 아랫마을에 사는 여인을 찾아서 사는 곳을 물으니 덕기라고 했다. 그 여인에게는 여덟 살 난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항상 마을 남쪽 돌다리에 놀았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에게 물었다.“   너는 매일 누구랑 그렇게 노니.” 아들은 천진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와 같이 노는 아이들 가운데는 금빛이 반짝이는 아이도 있어요.”어머니는 아들의 말을 국사에게 고했다. 

국사는 놀라고 기뻐하며 돌다리 밑에 가서 찾아보니 물속에 왼쪽 귀가 없는 석상이 있는 것이 아닌가?. 국사는 그 석상의 얼굴이 옛날 개국사에서 만났던 스님과 같음을 알고 송구스러운 마음에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 석상은 바로 정취보살 상이었다.

이에 간자(簡子;점치는 댓조각)를 만들어 절을 지을 곳을 점쳤더니 낙산 위가 제일 좋다 하여 그곳에 법당 세 칸을 세우고 정취보살상을 모셨다. 이로써 낙산사는 관음신앙에 정취보살의 지혜를 수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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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일국사 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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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취전



● 조신의 꿈(調信之夢)


삼국유사 제3권 탑상(塔像)편에 실린 대표적인 꿈 이야기로, 조신설화(調信說話)라고도 한다. 

조신은 신라의 스님으로 세규사(世逵寺)의 농장 관리인으로 파견되어왔다. 스님은 고을 원님 김흔공의 딸을 홀로 연모하여 낙산사 원통보전에서 원님 딸과 인연 맺을 수 있기를 관음보살께 몰래 기도했다. 그러나 그녀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자 조신은 관음보살상 앞에서 원망하며 날이 저물도록 슬피 울다가 지쳐서 잠이 들었다.

꿈에서 낭자가 '저도 속으로 스님을 사랑했지만 부모님의 뜻으로 시집을 갔습니다. 스님과 부부의 연을 맺고자 다시 왔습니다.' 조신은 매우 기뻐 낭자와 고향으로 돌아가 자녀 다섯을 낳아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가난하여 생계를 꾸리기조차 어려웠다. 10여 년을 돌아다녀도 옷은 찢어지고 열다섯 살 큰아이는 굶어 죽어 익령(翼嶺, 양양 옛이름)의 해현(蟹峴, 기정리와 사천리 사이 고개)에 묻고 네 아이와 우곡현(강릉 옥계) 길가의 띳집에 살았으나 늙고 병들어 굶주림에 일어나지도 못했다.  열살된 딸이 동냥을 나가서 개에 물려 돌아와 눕자 부모는 흐느꼈다. 내가 당신과 만났을 때는 나이도 젊어 좋은 음식 나누었고 옷도 함께 지어 입었습니다. 이렇게 15년, 정은 쌓였고 사랑은 두터워졌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추위와 굶주림도 헤아리지 못하는 상황에서 행복을 누리겠습니까?

젊은 얼굴에 예쁜 웃음은 풀잎 위의 이슬 같고 굳고도 향기롭던 기약도 한갓 바람에 날리는 버들가지 같구려! 당신에게는 내가 짐이 되고 나는 당신 때문에 괴롭습니다. 지난 환락은 번뇌의 계단이었습니다. 당신이나 나나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굶어 죽기보다는 헤어져 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순경(順境)일 때는 붙들고 역경(逆境)일 때는 버리는 것이 못 할 짓이기는 합니다만 헤어짐도 만남도 운명입니다. 바라건대 여기서 서로 헤어지도록 합시다.

아이들을 나누어 헤어지려 할 때 아내가“나는 고향으로 갈 테니 당신은 남쪽으로 가세요.”서로 잡았던 손을 막 놓고 길을 나서려 할 때 조신은 꿈에서 깨어났다.  깜짝 놀라 일어나니 관음보살상 앞이고 쇠잔한 등불은 어스름한 불그림자를 너울거리며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조신은 수염과 머리털이 하얗게 세어 있었다. 넋이 나간 듯하고, 인간 세상의 고된 염증을 느껴 백년의 신고(辛苦)에 시달린 것 같았다. 탐욕의 마음이 사라지니 관음보살을 대하기가 부끄러웠다. 

해현에서 아이 묻은 곳을 파보니 돌미륵이 나왔다. 깨끗이 씻어서 낙산사에 봉안하고 경주로 돌아가 장원 관리 임무를 벗었다. 그리고 사재(私財)를 털어 정토사를 세우고 부지런히 선업(善業)을 닦았다. 그 뒤 조신에 대하여는 아는 사람이 없 었다 한다.



● 파랑새를 만난 유자량


고려 명종 때(1197년) 유자량이 병마사(兵馬使)가 되어 10월에 이곳 관음굴 앞에 와서 분향 배례(拜禮) 하였더니 파랑새가 꽃을 물고 날아와 복두(幞頭:급제한 사람이 쓰는 관) 위에 떨어뜨린 일이 있었다.  이후 유자량은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며 백성들의 칭찬이 자자한 명관이 되었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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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련암 앞 파랑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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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련암(관음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