襄陽地域의 傳統寺刹

[낙산사] 낙산사에 깃든 불교 설화(說話)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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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550회 작성일 2023-03-02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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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에는 의상대사, 원효대사, 범일국사와 정취보살 이야기, 조신의 꿈, 파랑새를 만난 유자량 등 관세음보살과 관련한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가 너무나도 많다. 특히 삼국유사 이대성조의 원효스님이 관음보살을 친견하려 했으나 응신(應身)을 알아보지 못하고 실패하는 장면은 우리의 예단을 뛰어넘는 설화의 백미이다. 이 밖에도 낙산사에 숨겨진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펼쳐 본다



● 의상대사 행장(行狀) 

   

의 상 (義 湘 ,  625년~702년)은 통일신라 시대의 고승이다.  생애는 부석본비(浮石本碑)에 나와 있는데 다음과 같이 전한다.

20세에 출가하여 650년(진덕여왕 4년)에 사형(師兄) 원효(元曉)와 함께 당나라에 가던 중 고구려에서 장애(障礙)를 당해 당항성의 어느 동굴에서 유숙하게 되었다.  이때 해골에 괸 물을 마신 원효는 도의 길이 따로 있지 않다고 생각(一切唯心造)하여,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여 그와 헤어지게 되었다.

그 후 신라의 삼국 통일의 혼란 와중에도 661년(문무왕 1) 당나라 사신의 귀국 배편에 동승하여 건너가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에서 지엄(至嚴)의 문하에서 현수(賢首)와 함께 깊이 깨달았다. 현수는 지엄의 뒤를 이어 중국 화엄종의 제3조가 되고, 의상은 귀국 후 한국 화엄종의 시조가 된다.  670년(문무왕 10)에 귀국하여 관음굴(觀音窟)에서 기도하고 낙산사를 671년에 창건하고, 676년 왕의 뜻을 받아 봉황산부석사를 창건, 화엄 교학을 강술하여 해동 화엄종의 시조가 되었다.  692년(효소왕 1)에 당(唐)의 현수는 신라 유학승 승전(勝詮)이 귀국할 때 그의 저술“화엄경탐현기”와 서신을 보냈는데, 그 친필 서신이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의상은 문하에게 이것을 강술하면서 전교(傳敎)에 전심하다 열반하였다. 세수 향년 78세였다.

후일 고려 숙종은 해동화엄시조원교국사(海東華嚴始祖圓敎國師)라 시호하였다. 의상의 문하에는 뛰어난 10대 대덕(大德) 과 전교(傳敎)의 10대 대찰(大刹)이 있었다.

의상의 귀국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당나라는 삼국 통일을 원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 양국을 취한 것에 노하여 신라 승상 김흠순(金欽純)을 잡아 가두었다. 당 고종(高宗)이 신라에 대거 출병코자 한 기미를 김흠순 등에게 들고 급히 귀국하여 왕께 고하고 명랑(明朗)이 밀단법(密壇法)을 베풀어 화를 면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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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대사 표준영정

(출처: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전통문화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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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대사 표준영정 (출처: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전통문화포털)

 



● 낙산사를 창건(創建) 설화


① 삼국유사 낙산이대성(洛山二大聖)조

의상법사가 당나라에서 공부한 뒤 돌아왔을 때 대비진신(大悲眞身)이 이 해변 굴속에 계시기에 낙산이라 부른다는 말을 들었다. 

의상은 엄숙하게 수행한 지 7일 만에 자신이 앉는 좌구(坐具)를 물에 띄웠더니 천룡팔부(天龍八部)의 시종이 굴속으로 안내하였다. 따라가서 참례하니 천룡팔부가 공중에서 수정염주(水晶念珠) 한 벌을 주기에 받아왔다. 동해룡(東海龍)이 또한 여의보주(如意寶珠) 한 벌을 주기에 이를 받아서 물러 나왔다. 

다시 7일 동안 수행하여 드디어 관세음보살의 진용(眞容)을 뵈니, “이 자리 위의 꼭대기에 대나무 한 쌍(雙)이 돋아날 것이니, 그곳에 불전(佛殿)을 짓는 것이 마땅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법사가 그 말을 듣고 굴에서 나오니 과연 땅에서 대나무가 솟아났다. 이에 금당을 짓고 소상(塑像 흙으로 불상을 만듦)을 봉안하니, 그 원만한 모습과 아름다운 자질이 엄연히 하늘에서 난 듯했다. 대나무는 곧바로 없어졌으므로 바로 이곳에 관음의 진신이 거주함을 알았다.

이로 인해 그 절을 낙산사라 하고서 법사는 그가 받은 구슬을 성전에 모셔두고 떠나갔다. 이상은『삼국유사』에 수록되어 전하는 낙산사의 창건 연기 설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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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용으로부터 여의보주를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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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 창건

 

 

② 석익장(釋益莊)의「낙산사기(洛山寺記)」

익장스님의 낙산사기가『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한다. 양주(襄州) 동쪽 강선역(降仙驛) 남쪽 동리에 낙산사가 있다. 절 동쪽 몇 리쯤의 바닷가에 굴이 있는데, 높이는 백척 가량이고 크기는 곡식 만섬을 실은 배라도 드나들 만하다. 그 밑에는 항상 바닷물이 드나들어서 측량할 수 없는 구멍이 되었는데, 세상에서는 관음대사(觀音大士)가 머무는 곳이라고 한다. 굴 앞의 50보쯤 되는 바다 가운데 돌이 있고, 돌 위에는 자리 하나를 펼 만한데, 수면에 나왔다 잠겼다 한다.

옛적에 신라 의상대사가 친히 성용(聖龍)을 뵙고자하여 돌 위에서 자리를 펴고 기도했다. 14일이나 정성을 다했지만 볼 수가 없었으므로 바다에 몸을 던졌더니, 바닷속 동해 용이 부축하여 돌 위에 올려놓으니 관음대성(觀音大聖)이 굴속에서 팔을 내밀어 수정염주를 주면서, “내 몸은 직접 볼 수가 없다. 다만 굴 위의 두 대나무가 솟아난 곳이 나의 이마 위다. 거기에 불전을 짓고 상을 봉안하라.”라고 했다.

용(龍)도 또한 여의주와 옥을 바쳤다. 법사가 여의주를 받고 가서 보니, 대나무 두 그루가 솟아 있었다. 그곳에 불전을 짓고 용이 준 옥으로 상을 조성해서 봉안하니 바로 이 절이다. 세상에 전해오기를 굴 앞에 와서 지성으로 예배를 드리면 파랑새가 나타난다고 한다. 

두 기록 중 낙산사기가 약 50년 앞서는데 내용이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전체적인 줄거리는 같으며, 관음 진신이 일러준 대나무가 솟아난 곳에 낙산사를 창건했다는 내용만은 일치한다. 이로써 서역의 보타낙가산처럼 낙산사에도 관음의 진신이 상주한다는 신앙이 정착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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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이 된 선묘낭자의 도움으로 신라로 무사 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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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묘낭자의 도움으로 부석사 창건



● 헌신과 희생의 선묘낭자(善妙娘子)


의상은 699년 불교의 교리를 공부하기 위하여 당나라 산동반도 북쪽 등주(登州)라는 바닷가에 도착하여 신심이 깊은 신자의 집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그 집 주인에게는 아리따운 용모의 선묘(善妙)라는 딸이 있었다. 선묘는 의상을 지켜보며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되어 의상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했으나 의상은 불교의 깨달음에 전력하면서 담담하였다. 이때 선묘는 영원히 의상을 따를 것을결심하고 공부하는 것을 돕기로 마음먹었다. 의상이 공부를 마치고, 신라로 다시 돌아가는 길에 선묘의 집에 들러 그간의 도움에 대하여 감사 인사를 하고 바로 배를 타러 갔다. 

의상이 떠난 것을 뒤늦게 알게 된 선묘는 급히 배 타는 곳으로 가보았지만 이미 저만치 떠나가고 있었다. 선묘는 의상이 입을 옷과 여러 물건을 담은 상자를 배를 향해 던져 의상에게 전하고는‘스님이 무사히 돌아가 불교의 교리를 잘 펼치시게 해주십시오.’하며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당시는 배가 작아서 조그만 파도에도 뱃길이 매우 위험했는데 선묘가 용으로 변하여 의상이 탄 배를 보호하여 무사히 신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신라에 도착한 의상은 낙산사를 창건하고 법석(法席)을 다진 다음 화엄 사상을 펼칠 곳을 찾아 경상북도 영주시 봉황산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다른 종파의 스님들이 수백 명이나 살고 있어 의상의 뜻을 펼칠 수 없었다. 이때 선묘가 큰 바위로 변하여 절의 건물 위를 덮어 떨어질 듯 말 듯 위태로운 상황을 만드니 스님들이 놀라고 두려워 모두 도망갔다. 그 일 이후 의상이 그곳에서 화엄경을 날마다 강론하니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 교리를 전할 수 있게 되었다. 의상은 큰 바위가 공중에 떴다고 해서 절의 이름을‘부석사(浮石寺)’라고 지었다. 현재에도 부석사에는 부석(浮石)이라는 큰 바위가 있는데 이것이 용이 된 선묘가 변하였던 바위라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