襄陽地域의 傳統寺刹

[낙산사] 위치와 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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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401회 작성일 2023-03-02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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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 가람 전경

 

 

오봉산(五峯山) 낙산사(洛山寺)는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전진리 55번지(낙산사로 100)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이다.  낙산사는 신라 문무왕 11년(671년)에 의상(義湘)대사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진용(眞容)을 뵙고 창건한 사찰이다. 

의상(義湘, 625년~702년)은 고대 통일신라 시대 중기의 왕족 출신의 고승이다. 그는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여 중국 화엄종 제2대 조사인 지엄(至嚴)으로부터 화엄종(華嚴宗)을 수학하고 법통을 이어받아서 한국 화엄종(華嚴宗)의 시조가 되었다. 호는 해동화엄시조원교국사(海東華嚴始祖圓敎國師)이며, 아버지는 신라의 진골 귀족 김한신 장군이다.

삼국유사 낙산이대성(洛山二大聖)조에는 당대 최고의 고승이었던 의상대사는 물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외쳤던 원효 스님(617년~686년)과 관련된 설화도 소개되고 있다. 또한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사굴산파(闍堀山派)의 개조인 범일국사(梵日國師 810년~889년)도 정취보살(正趣菩薩)에 얽힌 전설과 함께 낙산사 중창에 참여하게 된 인연도 소개되고 있다.

13세기 고려를 침입한 몽골은 절을 불태우고 불상의 복장 유물을 도굴해 가는 등의 참사를 격었다. 그 후 무신정권의실권자인 최우(崔瑀, ?~1249)의 후원(1230년대 중, 후반으로 추정)으로 중창 보수되었다는 기록이 이규보의 낙산관음복장수보문병송(洛山觀音腹藏修補文幷頌)에 전한다.    

의상대사가 천룡팔부(天龍八部)에게 받은 수정염주(水晶念珠)와 동해용의 여의보주(如意寶珠)를몽골군의 침입에도 헌신으로 지켜냈으나 1273년 원나라 사신 마강이 왔다가 왕후(王后)가“보고자 한다”는 핑계로 3월에 돌아가면서 원나라로 강제 이송되었다.


신라와 고려에서 국교로 인정받던 불교는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존속의 위험까지도 느끼게 됨에도 불구하고 낙산사는 왕실과의 인연으로 비교적 많은 지원을 받았다.

조선 초기에는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봄과 가을에 신하를 파견하여 재(齋)를 올리도록 하였으며, 이후에는 갑령(甲令 항상하는 일)으로 남겨 후대 왕들도 재를 봉행토록 하였다.

역대 왕 중 가장 불심이 돈독한 세조(世祖)는 퇴락한 낙산사를 방문하여 1466년(세조 12년)에 중창(重創) 불사(佛事)를 지시하여 1468년 완공을 하였다. 이때 가람이 전체적으로 형태를 갖추었으며 칠층석탑(七層石塔), 홍예문(虹霓門), 원통보전(圓通寶殿)의 담장인 원장(垣墻) 등의 중요 문화재가 조성이 되었다. 낙산사 동종(洛山寺 銅鐘)은 조선 예종이 1469년(예종 1년) 그의 아버지 세조를 위해 낙산사에 보시한 종이다. 

세조의 중창 불사를 훌륭하게 마친 학열(學悅 ? ∼ 1484) 스님은 세조 승하(昇遐) 후 대신들의 표적이 되어 어디서 입적하였는지도 알 수 없으며 유가(儒家)적 시각에서 악의적인 왜곡과 비판이 조선왕조실록에 전한다. 

조선 중기에는 성종부터 시작하여 연산군과 중종에 의해 불교가 탄압을 받은 시기로 성종(成宗)은 낙산사에 3가지 특혜(1, 화재 예방을 위해 낙산사를 멀리 돌아가는 새로운 길, 2. 소금을 구워서 유점사와 낙산사에 보관, 3. 낙산사 앞 20여리안에서의 해산물 채취금지)를 모두 회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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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김홍도의 낙산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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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의 낙산사도

 


조선 후기에도 두 번의 커다란 재난이 있었는데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대화재(大火災)이다. 임진왜란(1592년) 당시 막대한 폐해를 입었으나 세부적인 기록은 전하지 않으며 그 후 1631년 인조 9년에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하여 가람 전체가 크게 소실되었다. 

이 밖에도 낙산사에는 여러 차례 화재가 있었는데 통일 신라대인 786년, 통일신라 후기인 10세기 초반, 조선 정조 원년인 1777년, 1950년 6·25 전쟁, 2005년 4월 5일 대화재 등이 있다. 이런 병화(兵火) 때마다 중창을 거듭하여 법등(法燈) 을 이어온 장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조선 말기인 1895년에는 승려의 도성출입금지령(都城出入禁止令)이 해제되어 압박이 줄었으며 일제 강점기인 20세기 초반에는 31본말사법(三一本末寺法)에 의하여 건봉사의 말사로 지정되었으며 금당 요사채 등 100여 간이 넘었다고 한다. 6·25전쟁으로 인하여 1950년 사찰 내 전체 당우(堂宇)가 불에 타서 큰 타격을 입었으나 1군단장인 이형근 장군에 의해서 1953년 4월에 원통보전이 완공되어 중창불사 점안식을 거행했다.

낙산사의 상징이 된 해수관음보살상(海水觀音菩薩像)은 1972년에 원철(圓徹)스님이 화강암으로 높이 11m의 입상(立像)을 완공하여 1977년 11월 6일 점안식을 가졌다. 보타전은 1993년에 완성되었으며 천수관음을 비롯한 7관을 봉안하였다. 모든 관음상의 재질은 백두산 홍송(紅松)으로 제작하였다.

2005년 4월 4일 양양군 양양읍 화일리(禾日里)에서 발화된 불이 4월 5일 오봉산으로 번져 홍련암 등 몇몇 당우만 남기고 모든 전각과 요사채가 소실되었으며, 더욱 안타까운 것은 보물 제479호인 범종(梵鐘)이 용해(鎔解)로 훼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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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4월 5일 화재 후 원통보전과 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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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낙산사 복원 후 원통보전과 가람

 

 

잿더미 속에서도 복원 불사의 염원과 온정에 힘입어 발굴을 시작하여 원통보전은 세조 때가 최대 규모였음을 확인하고 사역의 배치는 17∼18세기 김홍도의 낙산사도를 참고하여 발굴과 복원을 동시에 하였다.(국립문화재연구소 2008 낙산사 발굴보고서)   2005년부터 제3교구 설악산문(雪嶽山門)의 무산(霧山) 대종사의 격려와 낙산사 주지 금곡(金谷) 정념(正念) 스님의 원력 (願力)에 힘입어 2009년에 대부분의 가람을 완성하였다.

또한 관음보살의 자비 나눔을 실천하기 위하여 2005년 정념스님이 낙산사 복지 재단을 양양읍 내에 설립하였다. 낙산사 상락원에서는 치매 등 중증 질환을 앓는 노인들을 돌보고 있다. 노인 복지 센터에서는 노인 주간(晝間) 보호를 하고 있으며, 2007년부터 주간 보호 노인과 어르신들을 위한 무료 급식소(매일 250인분)도 운영하고 있다.  무산지역아동센터에서는 도서관을 비롯하여, 초, 중학생의 여가 공간과 공부방을 운영 중이며, 1985년 개관한 낙산 유치원을 2007년 새로운 부지에 신축하여 140여명의 원생을 지도하고 있다. 이 밖에도 2009년 낙산 포교당을 양양 중·고등학교 입구에 개축 운영하고 있다.  2003년 4월부터는 불교대학을 개강하여 매년 주 1회 수업으로 2학기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경쟁이 극심한 현대 사회에 만연한 정신질환과 우울증, 스트레스 관련 장애를 극복하고 사찰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템플스테이를 운영하고 있다. 

낙산사의 어느 전각이나 보물보다도 감동적이고 눈에 띄는 것은“길에서 길을 묻다”와“꿈이 이루어 지는 길”이란 선문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