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사 시문

연산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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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42회 작성일 2024-02-05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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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6년 명 홍치(弘治) 9년 김수동이 유점사·낙산사에 소금 공급하는 일을 서계하다.


홍문관 전한(典翰) 김수동(金壽童) 등이 서계하기를,

“신들이 듣자오니, 내수사(內需司)가 유점사(楡岾寺)·낙산사(洛山寺) 두 절에 소금을 공급할 것을 계청하였다 하옵는데, 신들의 생각으로는, 소금을 굽는 공력이 막중하거니와, 백성의 힘을 빌어서 구워낸 것을 무단히 놀고먹는 무리들에게 제공함은 왕정(王政)의아름다운 일이 아니오며, 특히 세조(世祖)께서 한때 사사로운 은혜를 베푸신 데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성종(成宗)께서 여러 조정의 분부를 받은 것 중에 행할 만한 것을 취하여 대신들과 상의해서 『속록(續錄)』을 작성하였는데, 이 두 절에 소금을 공급하는 조문은 실려 있지 않으니, 내시들이 제멋대로 아뢴 것을 가지고서 경솔히 『대전(大典)』을 변경할 수 없사옵니다. 함부로 아뢴 죄를 다스려서 길이 성헌(成憲)을 준수하소서."하니, 

전교하기를, 

“지금의 형세를 살펴보면 임금으로 하여금 수족을 놀리지 못하게 하고서 아랫사람들이 모두 자기마음대로 하려는 것이다. 이 일은 선왕(先王)의 친압(親押) 27) 이 있으니 폐기할 수도 없으며 또 내수사는 성종조에 모든 일을 다 직계하고 승정원(承政院)을 거치지않았다."하자, 

수동(壽童) 등이 또 서계하기를, 

“신하가 임금 섬김에 있어 일을 만나면 곧 말하여 허물이 돌아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바로 임금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한(漢)·당(唐)의 말엽과 같이 내시들이 전청하여 나라의 정사를 전제(專制)해서 임금으로 하여금 아무런 시책도 있을 수 없게 한 후에야 수족을 놀리지 못하게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전속록(大典續錄)』은 성종(成宗)께서 대신들과 더불어 강구해서 작성하여 후손에게 물려주신 것이온데, 승하(昇遐)하신 지 얼마 안 되어 내시들이 함부로 위에 아뢰어 성법(成法)을 동요하니, 그 죄는 용서할 수 없사옵니다. 내수사가 비록 직계한 전례가 있다 할지라도 소관이 곡물(穀物)이나 포목(布木)을 출납하는 따위 일이라면 오히려 가하거니와, 선왕의 법을 무너뜨리어 130섬 [斛]의 나라 소금을 허비하는 일을 어찌 내수사에서 함부로 할 수 있습니까. 이는 실로내시들이 정사에 간여하려는 조짐이오니, 통렬하게 다스려야 할 일입니다. 또 소금을공급하는 것에 대하여 비록 세조(世祖)의 어필(御筆)이 있다 할지라도 성종께서 『속록』 에 싣지 않으셨으니, 어찌 뜻하신 것이 없겠습니까. 세조께서 일찍이 해마다 유점사(楡 岾寺)에 쌀을 대주셨는데도 성종께서 혁파하기를 주저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정히 전하께서 본받으셔야 할 일입니다."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弘文館典翰金壽童等書啓. 臣等聞, 內需司啓請楡岾、洛山兩寺給鹽. 臣等以謂, 煮鹽功重, 勞民力以煮, 而橫費於遊食之徒, 非王政美事, 特出於世廟一時私恩耳. 成宗取累朝受敎可行 者, 與大臣商確, 以成續錄, 而不載兩寺給鹽之條, 不可以宦竪擅啓, 輕變大典. 請治擅啓之 罪, 永遵成憲. 傳曰, 觀今之勢, 使人主不得措手足, 而下之人皆欲任便自爲耳. 此事有先王 親押, 不可廢也. 且內需司在成宗朝, 凡事皆直啓, 不由政院矣. 壽童等又書啓, 臣之於君, 遇 事輒言, 納於無過之地, 是敬君也. 如漢、唐之季, 閹寺恣橫, 專制朝政, 使人主不得有爲, 然後方可謂之不得措手足也. 大典續錄 成宗與大臣講劘酌定, 以遺後嗣, 而賓天未幾, 宦寺擅自上聞, 以撓成法, 罪不可赦. 內需司雖有直啓之例, 如所管穀布出納等事, 猶之可也, 毁先 王之法, 以橫費一百三十斛之國鹽, 豈內需司所得擅也? 此實宦竪干政之漸, 在所痛治. 且給鹽雖有世廟御筆, 成宗不載續錄, 豈無謂歟? 世祖亦嘗歲給米于楡岾寺, 而成宗革之不疑, 此 正殿下所當法也. 不聽.


『燕山君日記』 12권, 연산 2년 1월 4일 癸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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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친압(親押), 예전에, 임금의 수결을 이르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