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사 시문

세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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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10회 작성일 2024-02-05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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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66년 명 성화(成化) 2년. 낙산사에 거동하다.


낙산사(洛山寺)에 거동하였다.


幸洛山寺.


『世祖實錄』 38권, 세조 12년 윤3월 13일 甲申




○ 1467년 명 성화(成化) 3년. 윤필상에게 함길도의 군수로 유점사·낙산사의 개창비용을쓰는 것에 대해 묻다.


임금이 윤필상(尹弼商)에게 묻기를, 

“함길도(咸吉道)의 군수(軍需)가 장차 궁핍하게 되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유점사(楡岾寺)와 낙산사(洛山寺)의 두 절은 함길도와 거리가 매우 가깝고 개창(改創)하기위한 비축(備蓄)이 매우 많다. 내가 그 역사를 정지하고 거기에 쓸 물건을 안변(安邊)으로 옮기려 하는데, 경의 뜻은 어떠한가?"하였다.

윤필상이 짐짓 놀랜 기색을 띠며 아뢰기를, 

“이 무슨 교지(敎旨)입니까? 이시애는 소인의 무리이니, 행하면 반드시 주륙(誅戮)될 것입니다. 지금 소인의 무리들 때문에 국가에 복이 될 역사를 정지하는 것은 불가하지않겠습니까? 신은 감히 교지를 받들지 못하겠습니다."하자, 임금이 크게 기뻐하였다.


上問尹弼商曰, "咸吉道軍需將乏, 爲之乃何? 楡岾、洛山兩寺, 距咸吉至近, 而其改創之備 甚多. 予欲停其役, 移所費之需於安邊, 於卿意何如?" 弼商陽驚曰, "是何敎也? 李施愛小醜, 行當就戮. 今以小醜之故, 停國家資福之役, 得無不可乎? 臣不敢奉敎." 上大悅.


『世祖實錄』 42권, 세조 13년 5월 27일 辛卯




○ 1468년 명 성화(成化) 4년. 중 학조에게 역말을 주어 고성 유점사에 가게 하다.


  병조(兵曹)에 명하여, 중 학조(學祖)에게 역말(驛騎)을 주어 고성(高城)의 유점사(楡岾寺)에 가게하고 그가 데리고 가는 장인(匠人) 15인에게도 또한 역말을 주었다. 그 당시중(僧) 신미(信眉)가 그의 무리 학열(學悅)·학조(學祖)와 서로 뜻을 합하여 자못 큰 복(福)을 베푸니, 훈척(勳戚)과 사서인(士庶人)이 많이 의지 하였다.

  학열은 낙산사(洛山寺)를 영조하고 학조는 유점사(楡岾寺)를 수축하였는데, 강원도(江 原道)가 소연(騷然)하여 감사(監司)·수령(守令)이 지오(支梧) 할 수 없었으므로, 이에 소득(所得)한 것으로써 산업(産業)을 경영하였다.


命兵曹, 給僧學祖驛騎, 往高城 楡岾寺, 其帶去夫匠十五人, 亦給驛騎. 時, 僧信眉, 與其徒 學悅學祖相結, 頗張威福, 勳戚士庶多附之. 悅造洛山寺, 祖修楡岾寺, 江原道爲之騷然, 監 司、守令莫能支梧, 乃以所得營置産業.


『世祖實錄』45권, 세조 14년 1월 23일 甲申




○ 1468년 명 성화(成化) 4년. 낙산사를 조성할 때 중 학열의 말에 따라 말을 징발하게 하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전지를 받들어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 김관(金瓘)에게 치서(馳書)하기를, “낙산사(洛山寺)를 조성(造成)할 때에 중(僧) 학열(學悅)의 말을 듣고 편의대로 말 [馬]을 징발하되, 그 말의 문권(文券)은 양양 부사(襄陽府使)로 하여금 작성하여 주게 하라."하였다.


承政院奉旨馳書于江原道觀察使金瓘曰, "洛山寺造成時, 聽僧學悅言, 便宜發馬, 其馬文, 令 襄陽府使成給."


『世祖實錄』 45권, 세조 14년 3월 20일 庚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