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사 시문

고려사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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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13회 작성일 2024-02-05 17:39

본문

 

 

○ 「헌종 공상대왕(獻宗恭殤大王)」 


송나라 상인 황충(黃冲) 등 31명이 자은종(慈恩宗) 중 혜진(惠珍)과 함께 왔기 에근신이 맞이하여 보제사(普濟寺) 1) 에 머물도록 할 것을 명하였다. 혜진이 항상 말하기를, “보타락산(普陁落山) 성굴(聖窟) 2) 을 보고자 하여 왔다” 하며 가서 보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宋商, 黃冲等三十一人與慈恩宗僧惠珍來, 命近臣迎置于普濟寺. 珍常曰, 爲欲見普陁落山聖 窟而來, 請往觀之不許.


『高麗史節要』, 「獻宗恭殤大王」




○ 3월에 마강(馬絳)이 돌아갔는데 대장군 송분(宋玢)과 동행하여 가게 하였다. 원 나라 황후가 일찍이 낙산사(洛山寺)의 여의주(如意珠) 보기를 원하였으므로 분(玢)을 시켜 드리게 하였다.


三月, 馬絳還以大將軍宋玢伴行. 皇后, 嘗求見洛山寺如意珠, 使玢獻之.


『高麗史節要』, 「元宗順孝大王」




○ 왕과 공주가 북산 낙산사(北山洛山寺)에 거동하였다. 이후로 여러 번 사원(寺院)에거동하였다.


王及公主, 幸北山洛山寺. 自是, 屢幸寺院.


『高麗史節要』, 「忠烈王」




○ 「신돈」(辛旽) 


9월에 왕이 낙산사(洛山寺)에 행차하였다.낙산사는 신돈의 원찰(願刹)이다. 측근의 신하가 다투어 왕에게 아뢰기를 “금년에는 대풍이 들었습니다." 하니, 왕이 부처 앞에 꿇어 앉아 말하기를 “제가 나라를 다스린 지 15년이 되었는데 수재(水災)와 한재(旱災)가많았다.금년의 풍작은 실로 첨의(僉議-신돈)가 음양을 고르게 다스린 데 연유한 것입 니다." 하였다.

왕이 신돈을 공경하여 첨의라 일컫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신돈은 낙산사의 관음보살(觀音菩薩)이 영이靈異)하다고 하자 오일악(吳一鶚)을 시켜 비밀리에 저의 축원문(祝 願文)을 쓰게 했는데, 그 원장에 “제자(弟子 신돈 자신을 말함)의 분신 모니노(牟尼奴) 가 복이 많고 장수하여 나라에 머물러 살도록 해주십시오.” 하였다.

  모니노는 신돈의 비첩 반야(般若) 소생이니 우(禑)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처음에 신돈이 사비(私婢) 반야를 맞아 들여 임신시켜서, 반승(伴僧) 능우(能祐)에게 부탁하여 능우의 어머니 집에 가서 아이를 낳게 했다.

7일 만에 반야는 돌아오고 능우의 어미가 아이를 거두어 길렀는데 만 1년이 되지 않아서 아이가 죽었다. 능우의 어미는 신돈에게 꾸지람을 받을까 두려워서 다른 사람의아이를 훔쳐 다른 곳에 두고, 신돈에게 청하기를 '아이가 병이 있으므로 성 밖으로 옮겨서 기 르려고 하는데 어떻겠습니까.' 하니 신돈이 이를 허락하였다.

 1년이 되어 신돈이 아이를 데려다가 집에서 길렀으나, 반야도 제 아이가 아닌 줄은 알지 못하였다. 왕이 항상 대 이을 아들을 구하여 양자를 세우려고 했는데, 어느 날 미행하여 신돈의 집에 갔다, 신돈이 그 아이를 가리키면서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양자를삼아 뒤를 잇게 하소서.' 라고 하였다. 왕이 곁으로 보고 웃으면서 답하지 않았어도 오히려 내심 이를 허락하였다." 한다.


九月, 幸洛山寺, 辛旽願刹也. 左右爭言於王曰, 今歲大稔, 王, 跪于佛曰, 自不穀莅國, 十有 五年, 水旱爲灾, 今歲之稔, 實由僉議之燮理也. 王敬旽, 稱僉議而不名, 旽, 以洛山觀音靈異, 令吳一鶚, 密書願狀曰, 願令弟子分身牟尼奴, 福壽住國. 牟尼奴, 旽, 婢妾般若所生, 是 爲禑, 或云, 初, 旽, 納私婢般若, 有娠, 屬伴僧能祐, 使就產於其母家. 七日而般若還, 能祐 母, 收而養之, 未期年, 其兒死. 能祐, 恐被旽讓, 竊取他人兒, 置諸他所, 請於旽曰, 兒有疾, 移養城外, 何如, 旽許之. 比及一年, 旽取養于家, 般若, 亦未知非其兒也. 王, 常求嗣, 謀所以立後, 一日, 微行至旽第, 旽, 指其兒曰, 願殿下, 爲養子以立後, 王睨而笑之不答.


『高麗史節要』 「辛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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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제사(普濟寺), 개성(開城)에 있음.

2) 성굴(聖窟), 강원도 양양(襄陽) 낙산사(洛山寺)의 관음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