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시문

동정기(東征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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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84회 작성일 2024-02-13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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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정기(東征記)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병자년 8월 16일 사시(巳時:9시)에 농암(農巖)에서 출발하여 화현(花峴)의 한상주(韓尙周)의 집에서 말에게 여물을 먹이고, 저녁에 방길리(方吉里)의 이자정(李子正)의 노비 집에서 묵었다. 이 날 60리를 갔다.

17일은 날이 흐려 저녁에는 이따금 비가 내림. 

 새벽에 출발하여 조종(朝宗)에 이르렀다. 장인어른의 묘소에 들러 참배하고 10리를 가서 고개 하나를 넘었는데, 개나리 고개라 하였다. 고개를 지나 깊은 골짜기 속을 가는데, 산세가 구불구불하여 하나의 시내를8, 9차례나 건넜다. 울퉁불퉁한 길을 30여 리쯤 가자 비로소 큰길이 나타났다. 우리는 감천역(甘泉驛)에서 말에게 여물을 먹이고 가평군(嘉平郡)을 지나 초연대(超然臺)에 올랐다. 

 지세가 뛰어나 증조부의 『청평록(淸平錄)』에 자세히 보인다. 저녁에 비가 와서 말을 재촉하여 안보역(安保驛)에 이르고, 잔도(棧道)를 타고 강을 따라 20리를 가서 임말생(林末生)의 집에 묵었다. 이 날 90리를 갔다.


18일은 아침에는 흐리고 비가 이따금 내리다가 저녁이 될 무렵 날이 갬. 

 해가 뜰 무렵에 출발하여 석파령(席破嶺)에 올랐는데, 고갯길이 매우 험준하여 걸어가고 말은 쉬게 하였다. 빗줄기가 상당히 세져서 옷이 다 젖었다. 고개를 내려가자 또 강이 나타났는데, 강 너머의 들판이 드넓어 마음과 눈이 비로소 시원해졌다. 배로 신연(新淵)을 건너 오후에 춘천(春川) 읍내에 도착하여 의생(醫生) 박효철(朴孝哲)의 집에 묵었는데, 부사(府使) 남취성(南聚星)이 찾아왔다.


19일은 새벽에 비가 잠시 그쳤다가 다시 내리더니 오후에 쾌청하게 갬. 

 아침에 출발하여 소양정(昭陽亭)에 올라 잠시 앉아서 술 한잔을 마시고 내려왔다. 배로 강을 건너 20리를 가자 그곳은 부복천(扶服遷)이었는데, 양쪽 계곡에 잔도가 이어져 있고 이따금 매우 험준한 곳도 있었다. 잔도가 끝나자 비로소 강변을 떠나 골짜기로 들어가게 되었다. 10리쯤 가자 청평사(淸平寺)의 중이 남여(籃輿)를 가지고 와서 우리를 맞이하였다.

숲이 울창하고 물소리가 콸콸콸 들려오는 가운데 점점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가마에서 내려 구송대(九松臺)에 앉았다. 구송대는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아홉 그루의 소나무가 지금은 하나도 없고 절에 사는 중이 어린 소나무를 새로 심어 보완하였다. 대 아래에는 흰 바위가 널찍하고 평평하게 깔려 있고, 시냇물에 잔잔한 물결이 이는 가운데 두 줄기 폭포수가 벼랑에서 떨어지는데, 그 길이는 겨우 3길쯤 되었다. 폭포 위에는 또 용담(龍潭)이 있고, 용담 위에는 또 두 줄기 폭포수가 걸려 있는데, 그 길이가 아래 폭포에 비해 더 웅장하고 모습도 더 단정하였다. 나는 대에 앉아 술을 불러 한잔 술을 마셨다. 그곳에서 수백 보를 앞으로 나아간 곳이 영지(影池)인데, 영지는 깊이가 한 자도 못 되었으나 푸르스름한 빛을 띠고 맑았다. 작은 바위 서너 개가 그 속에 서 있어 이끼와 풀로 뒤덮인 모습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이 못이 영지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선조(先祖)의 기록에 자세히 실려 있다.

나옹(懶翁)이 심은 잎갈나무 네 그루가 아직도 있는데, 그중 하나는 크기가 거의 50뼘에 달하였으나 오랜 세월에 나무 속이 썩어서 안이 텅 빈 채 갈라져 있었다. 두 그루의 작은 나무가 곁가지로 뻗어 자라 그 크기가 10뼘이나 되었는데, 나무의 중심을 뚫고 꼭대기 위로 솟아 나와 가지와 잎을 편 모습이 매우 기이했다.

절에 도착하여 잠시 휴식을 취하고 서천(西川)을 구경한 다음, 송단(松壇 소나무가 서 있는 낮은 언덕)에서 밥을 먹고 남여를 타고 식암(息菴)의 옛터로 올라갔다. 그곳은 선동(仙洞)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데, 섬돌이 아직도 남아 있고 바위에 새긴 네 글자가 또렷하였다. 그 옆에는 몇 칸짜리 작은 암자가 있는데 돌을 포개 얽어놓은 구조물이 매우 높이 솟아 있었으니, 이는 후세 사람이 얽은 것이지 식암이 얽어 놓은 것이 아니었다. 암자 뒤에는 푸른 절벽이 깎아지른 듯이 서 있는데 그 위가 송단으로, 한적하여 앉아 있을 만하였다.

방향을 돌려 서쪽으로 수십 보 간 곳이 나한전(羅漢殿)인데, 돌 위에 세숫대야는 아직도 남아 있으나 그 위로 떨어지는 샘물의 양이 극히 적어 그 속을 채우지 못하고 있었다. 나한전 왼쪽 시냇물 속에는 돌함[石函]이 있는데, 그 속에 놓여진 오지장군[瓦缶]에는 진락(眞樂 이자현(李資玄))의 유골이 묻혀 있었다. 방향을 돌려 동쪽으로 수백 보를 간 곳이 견성암(見性菴)인데, 부용봉(芙蓉峯) 아래에 있어 지대가 특별히 맑고 높았으나 암자가 텅 빈 채 중이 없었다. 이때쯤 날이 저물어 가고 산바람이 휘익 불어왔다. 피로가 심하여 돌을 베고 누워 있는데 노승 명헌(明憲)이 따라와 서로 마주하고 잠이 들었다. 이 모습은 참으로 한 폭의 그림으로 그릴 만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극락전(極樂殿)을 구경하고 밤에 선당(禪堂)에서 묵었다. - 절은 청평사(淸平寺)를 말한다. -  


20일 새벽에 일어나 보니 달이 밝음. 

 스님을 따라가 영지(影池)를 구경하였다. 나무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물빛이 일렁이는 것이 세상과 다른 일단의 신기한 풍경이었다. 술 한 잔을 따라 마시고 돌아와 밥을 먹은 다음 다시 서천(西川)을 보고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진락의 비문을 읽어 보았다. 비석은 빛깔이 맑고 매끈한 데다 자획이 조금도 마멸되지 않았는데, 다만 윗면의 몇 손바닥 넓이가 겨울철에 탁본하러 온 자들이 피운 불에 달궈져 벗겨진 것이 안타까웠다. 용담(龍潭) 구송단(九松壇)에 이르러 한참 동안 앉아 있다가 산을 나왔는데, 중 명헌ㆍ선휘(善暉)ㆍ천호(天浩)가 이곳까지 따라와 나를 송별하였다. 우두사(牛頭寺) 옛터에 들러 구경하고 민가에 들어가 말에게 여물을 먹인 다음 출발하였다. 다시 소양정(昭陽亭)에 오르고 문소각(聞韶閣)에 들러 휴식을 취하는데, 부사(府使)가 나를 만나러 나왔다. 밤에 박씨(朴氏) 집에서 묵었다.

21일은 아침에 비가 오다가 곧 맑음. 

 아침에 부사가 와서 나를 만났다. 밥을 먹은 다음 비를 무릅쓰고 출발하여 원창역(原昌驛)에서 점심을 지어 먹었다. 10리를 가서 사령(沙嶺)을 넘고 또 10리를 가서 부소원(扶蘇院)에 이르렀는데, 이곳은 홍천(洪川)의 경계이다. 이곳에서부터 산골짜기 가운데를 가는데, 이따금 볼 만한 수석이 있었다. 모두 15리를 가서 저녁에 홍천 읍내의 차씨(車氏) 집에서 묵었다.


22일은 안개가 낌. 

 새벽에 출발하여 15리를 가니, 볼만한 너럭바위와 폭포수가 있어 잠시 앉아 술 한잔을 마셨다. 30리를 가서 창봉역(蒼峯驛)에서 말에게 여물을 먹이고 출발하여 10여 리를 가자 벽옥정(碧玉亭)이 나왔는데, 푸른 벼랑, 푸른 못 위에 큰 소나무 수십 그루가 있었다. 말에서 내려 잠시 앉았다가 20리를 가서 횡성(橫城)에 도착했다.


23일은 해가 뜬 뒤에 출발하였다. 길을 잘못 들어 우회하는 바람에 40여 리를 가도 황씨(黃氏) 집의 장지(葬地)에 도착하지 못하였다. 몇 리를 가서 원백(遠伯 황쇠(黃釗))을 만나 덤불을 깔고 앉아서 담소를 나누었는데, 그가 말하기를 “6, 7일 전에 미리 이곳에 도착하였습니다. 상여 행렬이 어제 흥원강(興元江)에 도착하였으므로 오래지 않아 이곳에 올 것입니다. 그래서 마중 나가 도중에서 맞이하려는 참입니다.” 하였다. 나는 말과 사람이 모두 지쳐 그와 함께 가지 못하고 곧장 장지로 향하였다. 정오 무렵에 상여 행렬이 도착하고 경지(敬之 황흠(黃欽))와 그의 두 아들도 뒤따라왔다. 목사(牧使) 이대규(李大規)가 며칠 전에 그의 선산(先山)으로 가면서 글을 남겨 위문하고 쌀 두 말과 약간의 제찬(祭饌)을 선사하였다.


24일은 비. 방백(方伯) 심여기(沈汝器)가 왔다. 

 사시(巳時)에 하관하였다. 사시(巳時)에 하관하였다. 나는 신주를 쓰고 이어 초우제(初虞祭)에 참가하였다. 횡성 현감(橫城縣監) 조정하(曺挺夏)도 와서 만나 보았다.


25일 아침을 먹고 출발하여 5리쯤 가자 구불구불한 작은 산이 있다. 이따금 푸른 벼랑 위에 소나무가 울창하고 큰 시내가에 기슭을 따라 흘러나왔으니, 이것이 곧 섬강(蟾江)의 상류이다. 이와 같은 경치가 2리쯤 이어진 뒤에 잔도가 나왔는데, 이름하여 ‘편애(編崖)’라 하였다. 시내를 건너 북쪽으로 가서 돌아보니, 시내 남쪽에 높다랗게 솟은 푸른 언덕을 수많은 소나무가 뒤덮고 있고, 그 아래로는 깊이 고인 물이 맑은 못을 이루고 있었다. 언덕 안에는 촌락과 밭이 은은히 보이는데, 매우 아름다워 보이나 어느 마을인지 알 수 없었다. 모두 30리를 가서 횡성에 도착했는데, 처음 갈 때에 비해 길이 매우 짧았다. 현감 조정하가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와서 만나 보았으며 음식을 주고 양식을 보조해 주었다. 30리를 가서 창봉역에 도착하였는데, 날이 아직 저물지 않았다.


26일 새벽에 출발하여 홍천에서 말에게 여물을 먹였다. 

 춘천(春川)에서 온 과거 보러 가는 선비가 마침 여관에 함께 들어와서 나를 만났다. 한 명은 이의좌(李宜佐)이고, 한 명은 미처 이름을 묻지 못하였다. 40리를 가 길가에서 말을 쉬게 하다가 5리를 가서 마령(馬嶺)을 넘고, 10리를 가서 천감역(泉甘驛)에 도착하였다.


27일은 새벽에 비가 내리다 곧 그치고 오후에 또 비가 내림. 한 식경만에야 그침. 

  해가 뜬 뒤에 출발하여 40리를 가서 만의역(萬義驛)에서 말에게 여물을 먹이고, 1리쯤 가자 잔도가 강을 따라 거의 1리쯤 이어져 있는 곳이 나타났는데, 이곳이 바로 백천(白遷)이다. 비를 무릅쓰고 10여 리를 가자 옷이 다 젖어서 길가의 마을 집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잠시 쉬었다. 비가 그치자 다시 1리쯤 가서 강을 건너고 험준한 고개 하나를 넘어 인제(麟蹄) 읍치(邑治)에 도착했는데, 강에서 이곳까지는 총 10리이다. 당형(堂兄)이 병 때문에 아직 읍으로 돌아오지 못하였는데, 내가 곧 이곳에 도착할 것이라 여기고 관의 아전에게 미리 나를 접대하도록 당부해 두었기 때문에 아전들이 와서 나를 만나 관아(館衙)로 들어가자고 청하였다. 밤에 동헌(東軒)에서 묵었다.


28일 오후에 한계(寒溪)를 향해 출발하여 5리를 가서 합강정(合江亭)에 올랐다. 두 줄기 물이 앞에서 합쳐지고 흰모래와 맑은 여울이 깨끗하고 그윽하였다. 

덕산령(德山嶺)을 넘어 수백 보나 되는 잔도를 따라 걸어갔다. 10리 만에 원통역(圓通驛)이다. 큰 소나무들 사이를 계속 걷노라니 수목의 끝을 따라 은은히 보이는 몇몇 봉우리들이 마치 눈에 덮인 것 같아 기분을 들뜨게 하였다. 15리를 가서 절에 이르러 묵었다. 절이 전에는 폭포 밑에 있었는데 경오년(1690)에 불타서 이건하였으며,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불이 나 임시로 대강 얽어 놓은 상태이고 미처 중건하지 못하였다. 읍치(邑治)는 인제현이다.  


29일에 조반을 먹고 남여로 10리를 가니 옥류천(玉流泉)이다. 

 샘물이 바위 위를 따라 흘러 떨어지면서 돌을 뚫어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웅덩이 위아래는 모두 길이가 약 수백 자에 이르는 폭포였다. 그곳에서 10리 간 곳이 옛 절터였다. 여기서부터 위로는 길이 매우 경사가 져서 남여를 타고 올라가는데 마치 곧장 천상으로 오르는 것만 같았다. 3리를 가서 남여에서 내려 걸어갔는데, 열 걸음마다 한 번씩 쉬어도 풀무질을 하는 것처럼 숨 쉬기가 힘들었다. 

 3, 4리를 가서 석대(石臺) 하나를 만났는데, 폭포를 정면으로 마주한 푸른 절벽이 하도 높아 몇천 자인지 알 수 없었다. 폭포가 그 꼭대기에서 떨어지는데, 춤추며 날아 허공에 걸려 있는 모습이 마치 흐트러진 생사(生絲) 같기도 하고 흰 명주를 늘어뜨린 것 같기도 하였다. 햇빛이 바로 비치자 홀연히 다채로운 무지갯빛이 되기도 하고 혹 산바람이 옆으로 불어올 적이면 마치 연기나 아지랑이처럼 자욱이 흩어졌다. 

 언뜻 보면 그것이 물이란 사실을 모를 정도였다. 전에 이효광(李孝光)의 기문을 보니, 안탕산(雁宕山)의 폭포는 푸른 연기처럼 자욱하여 커졌다 작아졌다 한다. 어느 순간 거꾸로 부는 바람을 맞으면 그대로 허공에 서려 있고 한참 동안 내려오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지금 이 폭포를 보니 정말 그 말을 믿을 만 하다. 몇몇 스님이 나무와 돌을 이용하여 그 상류를 막았다가 모인 물을 트자 물이 거세게 쏟아지고 나무와 돌이 함께 떨어지면서 소리가 온 숲과 골짜기를 울렸는데, 그 또한 장관이었다.

 몇 식경 동안 앉았다가 남여로 4리를 가서 대승암(大乘庵)에 이르렀는데, 자리 잡은 지대가 매우 높고 호젓하여 좋았다. 다만 몇 년 동안 거처한 중이 없어 너무 심하게 황폐해진 것이 흠이었다. 그러나 하룻밤은 지낼 만하여 간단히 청소하고 베개와 대자리를 깔아 유숙하기로 하였다. 밥을 먹고 나서 상승암(上乘庵)의 옛터에 가 보았는데, 이는 대승암에서 위로 수백 보 거리에 있었다. 

 스님이 뒷봉우리에 올라가면 곡연(曲淵)과 봉정(鳳頂)을 바라볼 수 있다고 말하였다. 풀이 우거지고 길이 황폐하고 날이 저물어 갈 수가 없어 안타까웠다.


30일에 아침을 먹고 나서 가마에 올라 만경대(萬景臺)로 향하였다. 

만경대는 대승암 남쪽 5리쯤에 있는데, 이에 하나의 바위 봉우리 앞에 있는 바위 벼랑은 십단이고, 아래를 내려다봐도 땅이 보이지 않고, 위로도 더욱 깎아지른 듯 하여 겨우 한 사람만 앉을 수 있었다. 올라가 산속을 보니, 여러 바위 골짜기들이 마치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하였다. 흰 안개가 마치 큰 바다처럼 가득히 피어나, 주위의 경치을 삼켰다 토해내고 생겨났다 사라지곤 하면서 순식간에 천 가지 모습으로 변하였다. 한참 동안 앉아 보다가 가파른 비탈길을 걸어서 내려오는데, 그 어려움은 어제 걸었던 길과 다름이 없었다. 어제는 오르막이었고 오늘은 내리막이라는 것만 다를 뿐이었다. 5리를 가서 비로소 남여에 올라 한계사(寒溪寺)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해가 질 무렵에 읍으로 돌아왔다. 

『農巖集』



「東征記」

  

丙子八月十六日. 巳時. 自農巖發行. 秣馬花峴韓尙周家. 夕宿方吉里李子正庄奴家. 是日. 行六十里. 

十七日. 陰. 夕乍雨. 平明發行. 到朝宗. 歷拜外舅墓. 行十里踰一嶺. 名介羅里. 過嶺行深谷中. 山勢回複. 一溪八九涉. 崎嶇廿餘里. 始得大路. 秣馬甘泉驛. 過嘉平郡. 登超然臺. 形勝具見曾祖考淸平錄中. 日暮雨作. 促馬到安保驛. 棧道沿江二十里. 宿林末生家. 是日. 行九十里. 

十八日. 朝陰. 雨時下. 向晩開霽. 日出時發行. 登席破嶺. 嶺路甚峻. 徒步. 以休馬足. 雨勢頗緊. 衣盡濕. 下嶺復得江. 隔江原野曠然. 心眼始開. 舟渡新淵. 午後到春川邑底. 寄醫生朴孝哲家. 府使南聚星. 來見. 

十九日. 曉雨乍止復作. 午後快霽. 朝發行. 登昭陽亭. 少坐飮一杯. 下舟渡江. 行廿里. 爲扶服遷. 兩山峽束. 棧道往往絶險. 棧盡始舍江. 入谷行十許里. 寺僧持籃輿來迎. 樹林翳鬱. 水聲濺濺. 漸入幽境. 下輿坐九松臺. 臺築石以成. 九松今亡. 其一. 寺僧新種稚松補之. 臺下白石寬平. 溪水淪漣. 雙瀑從崖上墜下. 長僅三丈. 瀑上復有龍潭. 潭上又有雙瀑懸焉. 其長視下者而壯. 尤更端好. 坐臺上呼酒飮一杯. 稍前數百步. 爲影池. 池深不盈尺. 湛然綠淨. 有小石數四. 離立其中. 苔草被之. 更可愛池. 所以得名者. 具在先祖記中. 懶翁所植赤木四株尙在. 其一. 大幾五十圍. 歲久中朽. 呀然拆裂. 有二小樹蘖生. 大亦十圍. 貫心腹以上. 出于其顚. 布枝葉甚奇. 到寺少憩. 觀西川. 飯于松壇. 籃輿上息菴舊墟. 在仙洞最深處. 石砌猶存. 石刻四字宛然. 其傍小菴數楹. 疊石危構極孤絶. 此卽後人所構. 非息菴也. 菴後蒼壁削立. 其上爲松壇. 孤迥可坐. 轉而西數十步. 爲羅漢殿. 石上盥盆尙存. 泉流涓滴. 不能盈科矣. 殿左澗中有石函. 中置瓦缶. 瘞眞樂遺骨. 轉而東數百步. 爲見性菴. 在芙蓉峰下. 地特淸高. 菴空無僧. 時日且夕. 山風颯然. 倦甚枕石而臥. 老僧明憲. 隨至對睡. 眞堪作畫也. 歸路觀極樂殿. 夜宿禪堂. 寺謂淸平寺. 

二十日. 曉起月明. 從一僧往觀影池. 木影陰森. 水光沖融. 別有一段幽異之景. 酌酒一杯而歸. 飯後復見西川. 讀金富軾所撰眞樂碑. 石色瑩膩. 字畫無少泐. 獨上面數掌. 大爲冬月打者. 火灸剝裂. 可惜. 至龍潭九松壇坐. 良久出山. 僧明憲, 善暉, 天浩隨至此送別. 歷見牛頭寺舊基. 入民家秣馬而行. 再登昭陽亭. 歷憩聞韶閣. 府伯出見. 夜宿朴家. 

二十一日. 朝雨旋晴. 朝. 府伯來見. 飯後冒雨發行. 中火原昌驛. 十里踰沙嶺. 十里扶蘇院. 是爲洪川界. 自是行山谷中. 往往有水石. 凡十五里. 夕宿洪川邑底車家. 

二十二日. 霧. 平明發行. 十五里有盤石瀑流之勝. 少坐飮一杯. 三十里蒼峰驛. 秣馬發行. 十餘里碧玉亭. 蒼崖碧潭上. 有長松數十株. 下馬少坐. 二十里到橫城. 

二十三日. 日出後發行. 誤取迂道. 行四十餘里. 未到黃家葬山. 數里遇遠伯. 班荊坐語. 前六七日先到此. 靷行昨泊興元江邊. 不久當至. 故方往迎於中路云. 余馬困人疲. 不能偕行. 直到其墓廬. 午間. 喪行來到. 敬之及其二子隨來. 主牧李大規. 數日前往其松楸. 留書相問. 且餽糧米二斗及饌物若干. 

二十四日. 雨. 方伯沈汝器來到. 巳時下棺. 余題主. 仍參初虞祭. 橫城縣監曹挺夏. 亦來相見. 

二十五日. 朝食後發行. 五里許有小山邐迤. 往往爲蒼崖松樹森蔚. 其上大溪水. 循其趾而流. 卽蟾江上流. 如是二里許. 有棧道名編崖. 渡溪北行. 顧視溪南. 蒼岡嶐然. 萬松被之. 水匯其下爲淸潭. 岡內隱隱有村落田疇. 望之甚勝. 不知何村也. 凡行三十里. 到橫城. 視去時路大捷. 主倅曹挺夏聞而來見. 饋飯助糧. 三十里到蒼峰驛. 日未暮矣. 

二十六日. 平明發行. 秣馬洪川. 赴擧士人自春川來者. 適同館來見. 一名李宜佐. 一不及問名. 四十里歇馬路傍. 五里馬嶺. 十里泉甘驛. 

二十七日. 曉雨旋止. 午後復雨. 食頃乃止. 日出後發行. 四十里萬義驛秣馬. 行里許得棧道. 緣 缺 幾一里. 是爲白遷. 冒雨行十數里衣盡濕. 投入路傍村舍. 更衣少憩. 雨止復行. 里許渡江. 踰一峻嶺. 到邑治. 自江至此. 凡十里. 堂兄以疾尙未還邑. 以余行近當到此. 預勑官吏接待. 故吏輩來謁. 請入館衙中. 夜宿東軒. 

二十八日. 午後發向寒溪. 五里登合江亭. 二水交會於前. 白沙淸湍. 瀟洒幽夐. 踰德山嶺. 行棧道數百步. 十里圓通驛. 連行長松間. 從樹抄隱隱. 見數峰如雪. 令人神聳. 十五里至寺宿. 寺舊在瀑布下. 庚午. 火燒移建. 未幾又火草創. 不及重建. 邑治. 麟蹄縣也. 

二十九日. 朝飯. 籃輿行十里. 爲玉流泉. 泉從石上流下. 穿石爲小泓. 泓上下皆瀑約 缺 數百尺. 十里爲舊寺基. 自此以上. 路極峻絶. 在輿上如直登天. 行三里. 下輿步行. 十步一休. 喘息如鍛. 三四里得一石臺. 正對瀑布. 蒼壁磅礴. 不知幾千尺. 瀑從其顚下墜. 飛舞夭矯. 如散絲. 如垂練. 日光正照. 悤作彩虹色. 或被山風橫吹. 則飄散霏微. 如煙如靄. 驟視之. 殆不知其爲水也. 舊見李孝光記. 鴈宕瀑. 浡浡如蒼煙. 乍大乍小. 悤被風逆射. 盤旋久不下云云. 今見之. 信然. 數僧用木石. 壅其上流. 畜水決之. 噴薄奔騰. 木石俱下. 聲振林壑. 亦壯觀也. 坐數食頃. 輿行四里. 至大乘菴. 占地極高. 幽夐可愛. 但數年無居僧. 荒落已甚. 然尙可度一夜. 灑掃設枕簟. 爲留宿計. 飯後. 往觀上乘菴. 舊址在菴上數百步. 僧言登後峰. 可望曲淵鳳頂. 而草深路廢. 日又晩不得往. 悵然. 

卅日. 朝食後. 登輿向萬景臺. 臺在菴南五里許. 乃一石峰最前. 石厓十斷. 下臨無地. 上更巉削. 容一人坐. 旣上. 視山裏諸巖壑如指掌. 適白霧方漲. 彌漫如大海. 呑吐興滅. 頃刻千變. 坐觀良久. 步下絶磴. 其艱與昨路無異. 特登降異耳. 行五里. 始就輿. 到寒溪寺午飯. 日晡還邑. 以下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