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시문

양양부의 훼철한 정자에 대한 기문(襄陽府毁亭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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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84회 작성일 2024-02-13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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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양부의 훼철한 정자에 대한 기문(襄陽府毁亭記)


성현(成俔) 



영동의 아홉 고을 중에 양양부가 가장 크다. 

뛰어난 인물과 가축이 번성하였고, 재물과 곡식도 넉넉하여 이전 지방의 관리들이 많이 머물렀다. 내가 처음 양양성으로 들어오니 곧 객사가 산기슭에 있고 건물의 정면이 언덕을 바라보고 있었다. 낮고도 좁으며 기울어지고 누추하여 답답한 회포를 펼 수가 없었다. 걸어서 언덕마루로 올라가 보니 몇 묘(畝)의 넓이에 맑은 그늘을 드리운 큰 나무가 서 있었다. 

 서북으로는 활을 쏘는 과녁을 설치할 만한 공간이 있었고 동남으로는 굽어보니 들이 넓어 수 십리 펼쳐져 있고, 맑은 내가 감싸 돌고 마을이 옹기종기 붙어 있었다. 나는 정신이 화평해지고 마음이 넓어지는 그 광경을 즐겁게 감상하였다. 다만 비를 가릴 만한 곳이 없는 것이 한이었다. 어떤 아전이 나아와 말하였다.

 예전에 정자가 숲 사이에 꿩이 나는 듯 있어 빈객들이 술을 마시고 시를 읊조릴 때는 반드시 그곳에서 하였고, 근래 어떤 점술가가 이 언덕은 고을에서 용(龍)의 허리에 해당하는 곳으로, 용의 허리로 정자가 있어 용이 노해서 바람이 시도 때도 없이 발작한다. 정자가 없으면 곧 바람도 그칠 것이라고 하였다. 그 당시 고을 수령이 방백의 명으로 이것을 헐었다. 그런 다음에는 다시 중건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나는 아전의 말을 듣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풍수설이라는 것이 어느 시대에 생겨났는가. 

 옛날 성현들은 풍수를 말씀하신 적이 없는데 후세의 용렬한 유자들이 천착하여 도리에도 맞지 않는 말을 지어낸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 책은 땅의 음양을 가지고 사람의 길흉을 점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바람이 그치고 일어나고 것이 정자의 유무에 달려 있다는 얘기는 여태껏 들어 보지 못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아』을 살펴보면 폭풍(暴風) 가운데 위에서 아래로 따라 부는 바람을 퇴(頹)라 하고 아래에서 위로 부는 바람을 표(飇)라 하며, 양풍(凉風)을 유(飅)라 하고 맹풍(猛風)을 열(颲)이라 하며 음산하게 바람이 부는 것을 에(曀)라 하고 돌면서 바람이 부는 것을 양각(羊角)이라고 하였다. 여름에 부는 웅풍(雄風)을 구모(颶母)라고 하고 황매(黃梅)가 익는 시기에 20일간 바람이 그치지 않는 것을 박도(舶䑲)라고 한다. 그러므로 곧 바람의 종류가 하나가 아니다. 그 부는 것도 일정하지 않다. 모두 우연히 그렇게 부는 것이다. 어찌 대자연이 의도가 있어 그렇게 부는 것이란 말인가.

 『주례』 「대사도」에서 해를 측정하는 기구로 해의 그림자를 측량하는 법에 해그림자가 동쪽에 있으면 저녁에 그림자가 많이 생기고 해 그림자를 재는 지역이 서쪽에 있으면 바람이 많이 분다. 바닷가에 그런 경향이 더욱 심하다. 대개 해양의 드넓은 곳에는 대기가 상승하여 바람이 일어나는데 바람이 소진될 곳이 없기 때문에 나무의 줄기와 잎이 흔들려서 하루 종일 바람 부는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지금 양양부는 동쪽으로는 대해(大海)에 접해 있고 서쪽으로는 대관령의 으슥한 깊은 골짜기의 입구에 자리 잡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람이 그 골짜기를 따라 동쪽으로 바다를 휘몰아 서쪽으로 불어오기도 하는데, 지세는 필연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지 어찌 바람이 그치고 일어나는 것이 정자의 유무와 관계가 있단 말인가.


만약 점술가의 설이라면 주(周)나라 성왕(成王) 때 하늘에서 대풍이 불어 벼를 모두 쓰러지고 큰 나무가 뽑힌 일, 

『춘추』 노 희공(魯僖公) 16년에 여섯 마리의 바닷새가 뒤로 날아 송(宋)나라 국도를 지나갔다고 한 일, 

항우(項羽)가 한 고조(漢高祖)를 형양(滎陽)에서 포위하였을 때 서북에서 바람이 일어 모래와 돌을 날려 낮인데도 어두웠다고 한 일, 

당나라 소종(昭宗) 천복(天復) 2년에 대풍으로 집이 뽑히고 거목이 춤추듯이 날아다닌 일,  


 이같이 어찌 정자를 지어 그렇게 된 것이겠는가. 초영왕은 장화대를 쌓고 진시황은 아방궁을 지었으며, 한무제는 장양궁과 오작궁을 만들고 진 후주와 수 양제는 강남에서 궁궐을 크게 일으켰다. 이러한 일은 모두 토목공사를 궁극에 산맥을 자르고 백성들의 골수를 긁어낸 것이다. 어째서 바람을 일으켜 경책하는 뜻을 보여주지 않았단 말인가.

 그러면 하늘은 본래 무심하고 바람도 역시 무심하고 고요한 가운데에서 일어나 고요함 속으로 사라진다. 길흉이 그 사이에 선악과 있지 않은 것이다. 양양부에서 정자를 허문 후에도 오히려 바람이 그치지 않아 혹 기왓장을 날리기도 하고 혹 나무를 뽑기도 하고 혹 벼와 곡식을 망치기도 하고 지금까지도 이런 일이 그치지 않는다. 어찌 정자를 허물었는데도 바람이 그치지 않는단 말인가. 심하도다, 사람들이 쉽게 현혹되어 이해하기 어렵다. 

 이에 아전이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하여 마침내 기문을 쓴다.


『虛白堂集』



襄陽府毀亭 


嶺東九邑.惟府爲最鉅.人物阜蕃.財穀優贍.故前此按節者多留焉.余始來入城則客舍在林麓.而軒楹又面岡.低隘仄陋.無以宣壹鬱之懷.步至岡頭則大樹晴蔭數畝.西北可張帿.東南俯瞰.平郊數十里.淸川練回.籬落櫛密.余樂其怡廣.但以無庇雨之所爲恨.有小吏進曰.舊有亭翬飛於樹林之間.而賓客觴詠者必於是焉.頃因卜者之說曰.此岡乃邑之龍腰.龍腰有亭.故龍怒而風之發作無節.無亭則風止矣.其時邑宰因方伯之命而毀之.其後不復建也.余聞而歎之曰.風水之說.昉於何代乎.古昔聖賢所不道.而後世庸儒.造爲穿鑿不經之說耳然其書不過因地之陰陽.而卜人之休咎.未聞風之止作.繫亭之有無也.謹按爾雅.暴風從上下曰頹.從下上曰飆.涼風曰飀.猛風曰颲.陰而風曰曀.回而風曰羊角.嶺嶠之間.夏有雄風曰颶母.黃梅時二旬風不止曰舶䑲.然則風之類不一.而其發亦不一.此皆偶然而動.豈大塊有心而噓之乎.周禮大司徒.以土圭測日之法云.日東景夕多陰.日西景朝多風.而海上尤爲甚.蓋海洋浩漾之間.因氣乘陵而起.無所洩盡.故調調刁刁.終日呼號而不已也.今府東臨大海.西控大嶺幽隧之口.故或從隧而東.或捲海而西.勢所必然.豈可以風之止作.繫亭之有無也歟.如卜者之說則周成王時天大風.禾盡偃.大木斯拔.春秋魯僖公六年.六鷁退飛過宋都.項羽圍漢祖於滎陽.風起西北.揚沙石.晝晦.唐昭宗天復二年.大風拔屋.巨木飛舞.此豈構亭而致歟.楚靈王築章華臺.秦始皇作阿房宮.漢武帝構長楊, 五祚宮.陳後主, 隋煬帝大起宮闕於江南.此皆窮極土木.劚山脈而剝民髓.是何天不發風而示警歟.然則天本無心.而風亦無心.從靜中而起.向靜中而滅.非有休咎吉凶於其間也.府自毀亭之後.猶不能遏.或飛瓦.或拔樹.或傷禾稼.至于今不已.是何亭毀而風不止歟.甚矣.人之易感而難解也.於是吏不能答.遂以爲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