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시문

설악기(雪嶽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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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82회 작성일 2024-02-13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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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악기(雪嶽記)


해좌(海左) 정범조1) (丁範祖)




무술년(1778) 가을, 나는 양양부사로 부임하였다. 북으로 설악을 돌아보니 우뚝 솟아 구름 가에는 가파르고 매우 장엄하였다. 정무에 쫓겨 그곳으로 가서 유람하지 못하였다. 이듬해 삼월, 상운역(祥雲驛) 역리(驛吏)장현경(張顯慶)과 고을 선비 채재하(蔡載夏)와 약속하고 함께 출발하였다. 조카뻘 되는 신광도(申匡道), 사위 유맹환(兪孟煥)과 아들 약형(若衡)이 따라왔다.


신축(17일). 

 신흥사(神興寺)에서 묵었다. 절을 빙둘러 있는 천후산(天吼山), 달마봉(達摩峰), 토왕봉(土王峰)이 모두 외설악산(外雪嶽山)이다.


임인(18일). 

 절의 스님 홍운(弘雲)에게 명하여 견여(肩輿)를 이끌라 하고 북으로 비선동(飛仙洞)을 경유하여 들어갔다. 봉우리의 모양과 물소리가 사람의 정신과 혼백을 시원하게 함을 깨달았다. 절벽을 오르는데 깎아지른 듯이 서 있는 것이 수백 척이 보였다. 가마를 버리고 오르는데 절벽이 모두 돌계단으로 한 계단 오를 때마다 한번 숨을 내쉬었다. 사응(士膺) 장형경(張顯慶)을 돌아보니 오히려 아래 계단에 있는데, 쫓아갈 수 없다고 용서를 빈다. 

 마척령(馬脊嶺)을 오르니 갑자기 큰 바람이 일어났다. 뿌연 안개비가 사방을 막고, 스님 홍운이 이곳이 중설악(中雪嶽)이라고 알려주었다. 날이 개면 설악의 전체 모습이 보인다고 한다. 해질 무렵 오세암(五歲庵)에 들어갔다. 기이한 봉우리가 사방으로 펼쳐있는데, 삼엄하게도 사람을 칠 듯 하였고 가운데는 흙구덩이를 여니 깊숙이 암자가 있다.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이 일찍이 이곳에 은둔하였다. 암자에는 2개의 초상화가 있어 공의 유학자 모습과 스님 모습을 그렸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배회하며 슬퍼하였다. 공은 스스로 오세동(五歲童)이라고 불렀고, 이런 연유로 암자의 이름이 되었다.


계묘(19일). 

 왼쪽 산기슭을 넘어 내려가다 꺾어 동쪽으로 갔다. 큰 골짜기를 돌아 올라갔다. 고개의 기세가 마척령과 견주어 보아도 더 험준하였다. 끈으로 앞뒤를 밀며 서로 붙어서 십리를 간 후에 사자봉 정상에 올랐다. 여기가 상설악(上雪嶽)인데 천지가 모두 산이었다. 고니가 나는 듯, 칼이 서있는 듯, 연꽃 봉우리 같은 것이 모두 봉우리였다. 솔 같은 것, 항아리 같은 것이 모두 골짜기였다. 산은 모두 돌이고 흙이 없는데 매우 푸른 것이 쇠를 쌓아 놓은 색과 같았다. 


 사자봉(獅子峰)의 동쪽 조금 깊숙한 평지에 암자의 이름이 봉정암(鳳頂庵)이다. 전하기를 고승이 봉정암에서 상주한다고 한다. 사자봉 아래로 푸른 벼랑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니 벼랑이 좁아 겨우 한발자국 정도였다. 발 딛는 곳마다 쌓인 낙엽이고 무너진 돌이며 쓰러진 나무여서 헤아릴 수 없어 무서웠다. 좌우의 산은 모두 기이한 봉우리인데 숲 위로 솟아, 물은 뒷고개에서 와서 골짜기에 퍼져 내려온다. 골짜기는 모두 돌인데 맑고 밝은 것이 마치 눈과 같고 물로 덮여있다. 돌의 형세가 솟아 있고 엎어 있으며, 오목하고 볼록하며, 넓고 좁은 것은 물에 의해 형성되었다. 

 대략 폭포를 이룬 것이 십여 개인데 쌍폭이 더욱 기이했다. 소(沼)를 이루고 보(洑)를 이루고 넘쳐서 흐르는 것이 헤아릴 수 없는데 수렴이라 불리는 것이 더욱 기이했다. 이와 같이 하루를 마치고 영시암에 들었다. 암자는 곧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이 이름 붙인 곳인데, 일찍이 이곳에서 은거하였다. 봉우리와 골짜기는 그윽하고 기이한데 씨 뿌릴 만한 땅이 있고 향기로운 숲과 우거진 나무가 많았다. 밤새도록 두견새 소리를 들었다.


갑진(20일). 

 물을 건너 남쪽으로 계곡으로 들어갔다. 계곡 물은 모두 나무와 돌로 뒤엉켜 있어 발을 담글 수 없었다. 조금 올라가니 돌이 모두 하얀데 홀연히 자줏빛으로 변해 수면 위로 울퉁불퉁 나있다. 좌변 석벽은 검푸르다. 물줄기가 그 가운데에서 쏟아내려 시원하게 울린다. 앞에 고개가 있는데 매우 험준하였다. 가마에 엎드려 올라 왼쪽 산기슭을 따라 백보 내려가니 앞으로 수십 척의 돌벼랑과 마주했다. 

 색은 푸르고 폭포가 꼭대기에서 쏟아 내리는데 영롱하기가 흰 무지개 같았다. 바람이 잠깐 일면 가운데가 끊어져 안개와 눈처럼 되어 하늘 가득 흩날린다. 물거품이 때때로 사람 옷에 불어오는데 종자들도 하여금 피리를 불어 폭포 소리와 상응하여 응답토록 하니 골짜기 가득 맑고 밝게 울려 퍼졌다. 이곳이 한계폭포(寒溪瀑布)이다. 내가 홍운에게 일러 말하길, 또 이런 곳이 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없습니다. 금강산 구룡폭포(九龍瀑布)보다 심원합니다라고 하였다. 동남에 좋고 숲과 골짜기가 절승으로 아름답다.

  동쪽은 오색령(五色嶺)인데 영천으로 마땅히 아픔이 쌓여 있다. 수석이 많아 바라보면 그윽하고 기이하나 날이 저물어 갈 수가 없었다. 고개를 넘어 돌아와 백담사(百潭寺)에 이르러 묵었다. 


을사(21일). 

 북쪽으로 나가 비선동 뒷고개를 따라 내려왔다. 고개는 급하게 걸려 있는데 모두 돌로 뒤섞여 있고 구멍이 많아 조금이라도 실족하여 분명히 번번이 쓰러지고 엎어진다. 남쪽으로 마척령 여러 봉우리를 바라보니 구름 가에 늘어서 있는데 어떻게 내가 그 위에 이를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신흥사(神興寺)에서 묵었다.


병오(22일) 

 돌아왔다. 설악산은 인제(麟蹄)와 양양(襄陽) 두 고을에 옹거하나 인제가 4분의 3을 차지한다. 사자봉(獅子峰) 동쪽이 청봉(晴峯)이고 사자봉과 견줘 조금 높으나 소득은 동해에 그친다. 서·남·북쪽으로 설악이 되고 사자봉보다 더 얻을게 없었다. 그래서 오르지 않았다. 사자봉의 남쪽은 쌍폭(雙瀑)과 수렴동(水簾洞)이고, 서쪽은 오세암이고, 또 그 서쪽은 영시암(永矢庵)이며, 또 그 서쪽은 백담사이다. 멀리 바다가 그 북쪽에 잠겨있고 풍악이 나계처럼 푸르름을 낸다. 한계폭포는 서남쪽에 있는데, 신흥사부터 오세암까지 40리, 오세암에서 사자봉까지 40리, 사자봉에서 영시암까지 40리, 영시암에서 한계폭포까지 30리, 한계폭포에서 백담사까지 30리, 백담사에서 신흥사까지 40리이다. 

 설악을 빙둘러 걸어서 갈 수 있는 것이 220여리이고, 가마를 타고 갈 수 있는 것이  40여리이다.


『海左先生文集』



「雪嶽記」 


戊戌秋. 余赴襄陽任. 北顧雪嶽. 巉巉雲際甚壯. 而迫吏事. 不克往遊焉. 翌年三月. 約祥雲丞張君顯慶士膺, 州之士人蔡君載夏. 同發. 戚姪申匡道, 女婿兪孟煥, 家兒若衡從. 辛丑宿神興寺. 環寺而爲天吼, 達摩, 土王諸峰. 皆雪嶽外麓也. 壬寅. 命寺僧弘運者. 導肩輿. 北由飛仙洞入. 峰態水聲. 已覺爽人神魄. 仰視絶壁. 削立數百尋. 捨輿而登. 壁皆石級. 一級一喘. 顧士膺. 猶在下級也. 謝不能從行. 登馬脊嶺. 忽大風作. 霧雨窈冥四塞. 弘運告是爲中雪嶽也. 日晴則見嶽之全體云. 薄暮入五歲庵. 奇峰四擁. 森然欲搏人. 而中開土穴. 窈然受庵. 梅月堂金公時習. 甞遯于此. 庵有二眞. 寫公儒釋狀. 余爲低佪悲之. 公自號五歲童. 故庵名. 癸卯. 踰左麓而下. 折而東. 循大壑而上. 嶺勢視馬脊加峻. 絙而前後推者相附麗. 十里而後. 登獅子峰絶頂. 是爲上雪嶽. 而塞天地皆山也. 若鵠翔若劒立若菡萏者. 皆峰. 若若釜若盎甕者. 皆谷. 山皆石無土壤. 深靑若積銕色. 獅子之東. 稍隩衍. 有庵名鳳頂. 傳高僧鳳頂常住云. 由獅子下. 緣崖而南. 崖窄廑容趾. 趾所循爲積葉爲崩石爲僵木. 凌兢不可度. 而左右山皆奇峰. 迭出林木上. 水自後嶺來. 布谷而下. 谷皆石. 晶瑩若雪而水被之. 石勢之起伏凹凸廣狹而水形焉. 大畧爲瀑者十數. 而雙瀑益奇. 爲潭爲洑爲漫流者不勝計. 而稱水簾者益奇. 若是者竟日. 而入永矢庵. 庵卽金三淵昌翕所名. 甞隱于此云. 峰壑幽奇. 有土可種. 多芳林茂樹. 終夜聞杜鵑聲. 甲辰. 渡水而南行谷中. 谷水皆木石槎枒不受足. 稍上而石盡白. 忽變紫赤. 盤陀水面. 左邊石壁紺碧. 水歧瀉其中决决鳴. 前有嶺甚峻. 伏輿而登. 循左麓而下百步. 前對石壁幾數十尋. 色蒼潔. 瀑從巓飛下. 玲瓏如白蜺. 風乍掣則中斷爲烟雪. 飄灑滿空. 餘沫. 時時吹人衣. 令從者吹篴. 與瀑聲相應答. 瀏亮一壑. 是爲寒溪瀑也. 余謂弘運曰. 復有此否. 曰. 無之矣. 過楓嶽九龍瀑遠甚矣. 東南林壑絶美. 東爲五色嶺. 有靈泉. 宜痞積. 多水石. 望之幽怪. 而日暮不可窮. 踰嶺還. 抵百潭寺宿. 乙巳. 北出之. 循飛仙洞後嶺而下. 嶺懸急. 皆錯石多竅. 少失足則輒僵仆. 而南指馬脊諸峰. 歷歷雲際. 不知何以能致我於其上也. 宿神興. 丙午還. 雪嶽據麟襄二州. 而麟得四之三. 獅子峰之東. 爲晴峰. 視獅子差高. 而所得止東海. 西南北之爲雪嶽. 無加得於獅子. 故不果登. 獅子之南爲雙瀑水簾. 西爲五歲. 又其西爲永矢. 又其西爲百潭. 遠海涵其北. 楓嶽靑出若螺䯻. 寒溪瀑在西南. 自新興至五歲四十里. 五歲至獅子四十里. 獅子至永矢四十里. 永矢至寒溪三十里. 寒溪至百潭三十里. 百潭至神興四十里. 環雪嶽而可行者凡二百有二十里. 可輿者凡四十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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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범조(1723:경종 3 ∼ 1801:순조 1)의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자는 법세(法世), 호는 해좌(海左)이다.1759년 (영조 35) 진사시에 합격한 뒤 성균관유생이 되었다.

 1763년 증광 문과에 갑과로 급제해 사직서직장(社稷署直長), 성균관전적·병조좌랑을 거쳐 지평이 되었다. 그러나 왕명을 받드는 데 지체했다는 죄로 잠시 갑산으로 유배되었다.

 정조 초에 양양부사가 되어 부세를 줄이고 유풍(儒風)을 진작시키는 등 서민 교화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겸관(兼官)으로 있던 강릉에서 목상(木商)이 소나무를 잠매(潛買)한 사건으로 파직되었다.

 1781년 동부승지, 대사간을 거쳐 풍천부사가 되어 사직하였다.

 1792년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나이가 많음을 들어 치사(致仕)를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예조참판·개성유수·이조참판 등에 차례로 제수되었다. 

 1794년 지돈녕부사가 되어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가면서 형조판서에 승진, 지춘추관사를 겸임하였다.

 문집으로 『해좌집』 39권이 있고, 시호는 문헌(文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