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 지역의 사지 및 근·현대사찰

도적사지(道寂寺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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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72회 작성일 2024-02-15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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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적사지의 위치와 현황


도적사지(道寂寺址)는 오대산과 이어진 정족산(鼎足山)의 주맥인 절골에 있는데 주소는 양양군 서면 수리 628-3번지이다. 

절터 동쪽은 다락 논으로 활용되고 있고, 서북쪽은 오랫동안 경작을 하지 않아 잡목들이 자라고 있으며, 북쪽 능선이 시작되는 지점에 좌우로 2개의 묘지가 있다.

조선 말기까지 묘지자리에 작은 법당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 주위에 많은 기와조각과 건축부재로 활용된 것으로 보이는 석재와 자기조각들이 산재해 있는데 이로 볼 때 도적사는 비교적 큰 규모의 사찰이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불상을 반출하였다고 하는데 확인할 수 없다. 절터 북쪽에 있는 묘지를 조성할 때 둥근 맷돌,  기와 조각과 불에 탄 흙 등이 출토되었다는데 둥근맷돌도 외부로 반출되어 지금은 그 행방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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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적사지 위성사진과 대동여지도에 표기된 도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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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적사지 석축 흔적과 다듬어진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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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적사지 옛 터




■ 도적사의 연혁


현재 도적사 창건에 대한 구체적인 서면기록은 없지만 절터에서 발견된 청석탑 및 와편 등 유물을 토대로 추정해 볼 때 불교가 크게 성행했던 고려 시대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의 몇몇 문헌들에 도적사의 위치와 존폐 여부를 알려주는 기록이 전해진다. 조선시대의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에도 존재한 것으로 보이는데 대동지지에 18세기 중엽에 폐사되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하지만 1799년에 편찬된 범우고에는 18세기 말에도 도적사가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어 정확한 폐사 연대를 확정하기 어렵다.

이들 기록 이외에도 여지도서(輿地圖書 : 영조 33년 1757)에 도적사가 정족산 자락에 있었는데 폐사되었다는 기록과,  현산지(峴山誌 :1757~1899년)에는 부 남쪽 15리 수동(水洞)의 북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고 기록하면서 숙종 16년(1690) 경신에 “화적(火賊)에 의해 겁탈 당한 바가 있어 중들이 모두 슬퍼하여 흩어졌다(爲火賊所劫仍以寺憤僧散/위화적소겁잉이사분승산)”라고 적혀있다. 

조선 전기(중종 25년, 1530)의 대표적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도적사가 오대산에서 이어오는 정족산(鼎足山) 주맥에 있으며, 정족산은 양양도호부에서 서남쪽으로 40리 떨어진 지점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기원집(杞園集)의 ‘기원선생연보’에 어유봉(魚有鳳 : 1672~1744년)이 1692년 가을에 처남인 홍유인[洪有人 자:홍인보(字:洪仁甫) / 1667~1694년]과 함께 도적사에서 글을 읽었다는 기록 [추여홍인보독서우도적사/秋與洪仁甫讀書于道寂寺]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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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산지 문헌기록과 범우고의 도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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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과 기원집 기원선생연보(자료:규장각한국학연구원)




■ 도적사지 유물과 유적


1. 석조유물(石造遺物) 

도적사의 연혁(沿革)을 알려주는 유물이 수습되었는데, 고려 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청석탑재(靑石塔材)를 비롯하여 육각형 대석(臺石), 옥개석(屋蓋石), 디딜방아 확석 등을 양양문화원이 소장하고 있다.


가. 청석탑(靑石塔)

청석탑의 탑신과 옥개석은 같은 재질의 돌로 다듬어진 것인데 총 3석을 수습하였다. 이 중 중소형 2석은 1992년에 양양문화원에 기증된 것이고, 대형 1석은 2012년 12월에 양양문화원에서 옮겨 놓았다.

심하게 파손된 상태로 옥개석 일부와 탑신 2면이 남아 있어 몇 층에 활용되었던 부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3석의 모양과 크기가 조금씩 달라 상하층은 구별할 수 있어 편의상 하층 1석, 중층 1석, 상층 1석으로 호칭한다.

하층석(下層石)  탑신의 면석(面石) 한가운데는 1조의 원형 음각선(陰刻線)이 있는데 그 안에 범자(梵 字) 진언(眞言)을 새겨 놓았다.

중층석(中層石)은 반만 남아 있 지만 다른 층에 비하여 상태가 양호하여 세부적인 돌다듬기 기법을 볼 수 있다. 탑신은 좌우에 우주(隅柱)를 새겼으며, 면석 한가운데 1조의 음각선으로 원형문을 마련하고 범자를 새겨 넣었다. 옥개석 처마부는 수평을 이루고 있다. 낙수면(落水面)의 경사가 완만하고, 합각부는 치켜 올려 마루부를 표현했는데 합각부 끝에 풍탁(風鐸)을 달았던 구멍이 있다. 

상층석(上層石)은 남아 있는 부재들 중에 파손이 가장 심하다. 면석부 한가운데 1조의 음각선으로 원형문을 마련하고 범자를 음각했다.  3석(三石) 모두 가운데에 찰주공(擦柱孔)이 반만 남아 있다. 규모가 작고 높이가 낮아 붕괴나 도괴(倒壞) 위험이 있어 한가운데에 굵은 찰주공을 세워 청석탑을 견고하게 유지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탑신석에 새겨진 범자 중 하층석은 진언(眞言)으로 확인되나 상층석은 범자 자체가 분명하지 않은데다 일부가 없어진 부분이 있어 확실하지 않다. 중층석은 2면만 남아 있어 다른 면에는 어떤 범자가 새겨졌는지 알 수 없어 종자(種字)인지, 진언인지, 아니면 다라니경(陀羅尼經)의 일부가 남아 있는 것인지를 확신할 수 없는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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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석탑 부재와 상ㆍ중ㆍ하층의 범자 탑영


나. 육각형 대석(臺石)과 옥개석(屋蓋石)

육각형 대석은 사리구 등을 봉안했던 것으로 높이 17cm,  가운데 원공 지름 25cm, 한 변의 길이가 43cm로 반파된 상태이다.  상부에 2단 괴임단이 있고 모서리에는 돋을새김이 있다. 

높이 36cm,  한 변의 길이가 44cm의 평면 육각형으로 된 옥개석(屋蓋石)과 상부에 올려진 보주(寶珠)가 같은 재질이다. 

육각형 대석과 옥개석은 표면이 정연하게 다듬어졌으며 세부적인 표현 기법으로 보아 우수한 장인이 다듬은 것으로 보인다. 두 조형물은 평면이 육각형으로 동일(同一)하며 석질(石質)도 같아서 하나의 부도탑에 활용되었던 부재로 보인다. 

대석에 마련된 괴임단과 상면 중앙에 원형 홈이 있는 점, 옥개석 하부에 별다른 치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조선후기(朝鮮後期) 건립된 부도(浮屠)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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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적사지에서 출토된 부도탑 부재 및 확석


다. 확석

디딜방아의 확석일 가능성이 높다. 확석의 규격은 84cm x 53cm x 51cm, 원공 지름 27cm, 깊이 24cm로 원공이 깊어지면서 좁아지는 형태이다.  



2. 기와와 자기 조각

도적사지 지표에는 많은 기와 조각이 산재해 있으며 경작지 논, 밭둑에서도 보이지만 경작지와 산이 맞닿은 경계 지점과 묘지 주변에는 기와뿐만 아니라 자기 조각들도 산재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여러 동 의 당우(堂宇)가 있었던 넓은 절터임을 짐작할 수 있다.

경작지 주변에는 고려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평기와(平瓦)조각들이 산재해 있으며 묘지 주변에서 발견된 기와는 제작기법으로 보아 조선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확인된다.

명문이 새겨진 기와 2종이 수습되었는데 경작지 동쪽 낮은 구릉에서는 표면에‘□貢’으로“공”자 한 글자만 판독이 된다. 고려 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또 다른 명문의 평기와는 사지 북쪽에서 수습되었으며‘□寺’로 역시“사”자 한 글자만 판독되는데 조선시대 절 이름이 새겨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으로 보면 고려시대에는 논이 있는 경작지가 중심절터로 보이며, 조선 후기에 사찰규모가 축소되면서 절터 뒤편의 구릉지대에 작은 규모의 법당이 유지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자기조각은 절터 중심지 수로주변에 흩어져 있는데 대부분 분청사기와 백자로 조선시대에도 사찰이 있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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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합문 수기와 외면과 내면




■ 앞으로의 과제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가 없으나 조선시대의 기록과 사지에 남아있는 유물로 보아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도적사지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어 조선 말기에는 작은 규모의 법당이 다시 건립되어 명맥을 잇다가 일제 강점기에 폐사되면서 불상 등이 외부로 반출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도적사지 청석탑재는 파손이 심하기는 하지만 작은 규모의 전형적인 고려시대 청석탑 양식을 취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청석탑에 서는 보기 드문 종자(種字)와 진언(眞言)이 함께 새겨져 있어 학술적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 성행한 청석탑이 영동지역에서는 처음 발견되었고, 당대의 불교문화 양상을 새롭게 보여 준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재 각자(刻字) 된 하층은 1824년 간행된 유점사 본“造像經(조상경)”의 내용으로 보아 보신진언[報身眞言, 입실지(入悉地)]이나 법신진언[法身眞言, 오륜종자(五輪種子)]에 해당된다. 

지금도 절터 곳곳에 기와조각과 자기조각 등이 산재(散在)해 있어 망실(忘失)되거나 외부로 반출될까 우려된다. 또한 땅속에는 다양한유물이 남아 있을 가능성도 있는바 도적사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하루빨리 이루어져 유물에 대한 보존과 활용대책이 세워져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도적사를 학술적으로 고증하여 양양뿐만이 아니라 영동지방의 불교계에서 차지하는 도적사의 가치를 조명할 필요가 크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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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기와에 새겨진 ‘貢’字(상)‘  寺’字(하) 탑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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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 접시편 내면과 받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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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석탑 상ㆍ중ㆍ하의 조상경(造像經) 오륜종자도(五輪種子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