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 지역의 사지 및 근·현대사찰

개운사지(開雲寺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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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73회 작성일 2024-02-15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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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건 및 위치


개운사지(開雲寺址)는 양양군 현남면 하월천리 647번지 일원이다. 이곳에 오르기 전인 625번지에는 석종형승탑(石鐘型僧塔) 2기가 큰 바위 옆에 있다. 이곳으로부터 10~15분 더 오르면 647번지가 나오는데 이곳이 절터이다.

개운사에 대하여는 영조 때인 1757년∼1765년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邑誌)를 모아 성책한 전국 지방지인 여지도서(輿地圖書) 사찰조(寺刹條)에 처음 나타난다. 그 내용은 부(府)의 남쪽 60리 오대산(五臺山) 동쪽 산기슭 아래에 있고 법당(法堂) 3칸, 요사(僚舍), 선방(禪房) 등 10칸이다.

현산지(峴山誌) 사찰조(寺刹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개운사는 부(府) 남쪽 70리 만월산(滿月山)의 동쪽 묘각동(妙覺洞)에 있다. 희랑조사(喜郞祖師)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연대는 알 수가 없다. 

영조(英祖) 2년(1738)에 월천(月川) 위쪽에 옮겨서 지었다. 영조 25년(1749)에 화재를 입었고 영조 26년(1750)에 정례봉(頂禮峰)의 서쪽에 옮겨지었다. 정조 10년(1786)에 화재를 입었고 순조 18년(1818)에 월천 위쪽에 다시 지었다.

현산지(峴山誌)는 양양군의 연혁, 인문지리, 행정 등을 수록하여 편찬한 지방지로 원본은 영조(英祖) 33년(1757)에 처음 편찬되었으며 이후 정조(正祖), 순조(純祖), 고종(高宗) 대를 거치면서 증보되었고, 1910년대 초반까지 편찬되었다.

다른 기록으로는 범우고(梵宇攷)와 관동지(關東誌)에도 기록이 나오며 해동지도(海東地圖)와 여지도서에도 표기되어 있다.

폐사와 관련하여서는 1871년에 편찬한 관동읍지(關東邑誌) 양양부 사찰조에 개운사 금폐(今廢 : 지금은 폐사되었다)라고 되어 있어 관동지(1829∼1831년)가 편찬된 이후와 관동읍지가 편찬되기 전인 1831~1871년 사이인 19세기 중반에 폐사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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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운사지 위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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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도서의 개운사:지도상에 개운사와 화상교가 표기되어있다(자료: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착오(錯誤)적인 기록

일제에 의해 1942년에 출간된『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는 현남면 하월천리 절터를 개흥사지(開興寺址)라 오기(誤記)하고 부도2기, 초석, 기와 편이 산재해 있다고 소개되어 있는데 이는 개운사지(開雲寺址)가 바른 표기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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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우고와 현산지의 개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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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운사 고지도




■ 성보문화재


● 부도 2기

개운사 절터 입구에서 우측으로 큰 바위가 있고 그 옆에 석종형(石鐘型) 부도 2기가 있다. 2기 모두 탑신부에 문양이나 장식이 없고 상륜부 복련좌(覆蓮座)에 반구형 연봉이다.

당호는 세로로 음각되어 있다.  학성당(鶴城堂) 부도는 104cm 높이에 지름이 74cm이다.

월성당(月城堂)의 부도는 114cm  높이에 지름은 74cm이다.

이와 관련한 특별한 기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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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운사지 학성당과 월성당 부도


● 개운사지 유물

수습된 기와로는 민무늬,  어골문(魚骨紋),  집선문(集線紋), 수파문(水波汶)이 있는데 어골문과 집선문은 고려말까지 올라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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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운사지에서 수습된 기와편


● 설영당(雪影堂) 암각문(巖刻文)

부도 위치에서 길을 따라 5분 정도 오르다 보면 물가를 기준으로 좌측에 가로 약4m 세로 2.5m의 바위에 세로로 암각한 글이 있는데 글씨 규격은 글자 당 가로 20cm,  세로 19cm이다.

암각문 내용은“청허구대청월문인설영당사준사리봉영(淸虛九代淸月門人雪影堂思峻舍利奉影)”으로“청허(서산대사)로 부터 9대 손제자(孫弟子)인 청월 설영당 사준의 사리를 봉안한다.”는 뜻이다. 




■ 앞으로의 과제


개운사는 절터를 3차례 정도 옮겼으며 부도가 위치한 사지(寺地)도 최종 위치인지는 발굴로 확인해 보아야 한다. 양양문화원에서 1995년 발간된 양양의 땅이름에서도 300쪽에서“윗 절골에 절을 지어서 번창하였는데 하월천리에서 어성전리로 통하는 울력 등으로 이사하여 현(現) 명주사(明珠寺)를 창건하였다”라는 기록에 대하여도 명주사와의 관련성을 밝혀야 한다.  

창건 연대와 관련하여서도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의 진각국사(眞覺國師) 천희(千熙 1307~1382년)의 비음기(碑陰記)에 “이름을 알 수 없는 문도가 개운사 주지로 임명되어 있어”라는 기록의 개운사가 양양의 개운사로 보는 견해가 있어서 연구가 필요하다. 그 이유는 천희가 낙산사에 머무른 적이 있어 개운사를 살펴볼 기회가 있었으며, 한국사찰사전(韓國寺刹辭典)에는 양양의 개운사가 유일하여 개운사는 고려 천희 이전에 창건된 사찰일 가능성이 짙다. 

수습된 와편(瓦片)도 여말(麗末) 선초(鮮初) 인데다 이곳은 첫 번째 절터도 아니며, 더구나 명주사 창건과 관련이 있다면 더욱 고려 시대 창건을 의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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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운사지 설영당 암각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