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 지역의 사지 및 근·현대사찰

사림사 선림원지(寺林寺 禪林院址) - (6)성보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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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58회 작성일 2024-02-1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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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보 문화재


금당지(金堂址)

선림원지의 가람배치를 살펴보면 삼층석탑 뒤에 앞면 3칸, 옆면 4칸의 금당 건물이 배치되어 있었다. 현재 금당지의 주춧돌은 완전하게 남아 있으며, 오른쪽에 금당과 잇대어 또 하나의 건물지가 있다. 

 


선림원지 삼층석탑(三層石塔) ⇒ 보물 제444호

양양 선림원지 삼층석탑(보물 제444호)은 이중기단을 갖춘 삼층석탑이며, 전체 높이는 5m이다. 현재 금당터 남쪽 6.5m 되는 곳에 있다.

일제강점기에 사리구가 탈취되면서 도괴(倒壞)되어 있던 것을 1965년 해체 복원하였으며,  1966년 보물 제444호로 지정되었다. 한편 1964년 석탑을 옮기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이때 석탑 아래에서 납석제소탑(蠟石製小塔 : 통일신라시대 조탑경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법식에 따라 석탑에 넣기 위하여 납석으로 만든 소형의 탑) 69기와 금동풍탁(金銅風鐸)이 발견되었다.

지대석은 8매의 장대석으로 짰고, 하층 기단은 굄대, 면석(面石), 갑석(甲石)이 별도로 제작된 것으로서, 굄대는 7매, 면석은 8매의 장대석, 갑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면석은 1단의 굄대 위에 놓았고, 각 면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 1주가 정연하게 양각되고 있다. 또 갑석(甲石)은 6매의 판석으로 짜서 덮었는데, 상면에는 호형(弧形)과 각형(角形)의 2단 굄을 새겨서 상층기단면석을 받치고 있다.

상층기단 면석은 각 면 2개씩의 판석으로 조립하여 모두 8매로 구성하고,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를 그리고 팔부신중(八部神衆)을 양각하고 있다. 갑옷을 입은 팔부중은 모두 구름 위에 앉아 있고, 이 무장의 측면으로 흩날리는 천의가 면을 채우고 있다. 다소 풍화가 심하기는 하나 훌륭한 작품이다.

팔부중의 배치는 남서면에 아수라(좌)와 건달바(우), 북서면에 긴나라(좌)와 마후라가(우), 북동면에 야차(좌)와 용(우), 남동면에 천(좌)과 가루라(우)의 순서이다. 

이는 양양 진전사지 삼층석탑(국보 제122호)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진전사지 탑 팔부중은 시계방향으로 건달바-아수라-천-가루라-긴나라-마후라가-용-야차의 순인 반면 선림원지 탑은 건달바-아수라-마후라가-긴나라-용-야차-가루라-천의 순서로 배치되어 있다. 팔부중의 배치순서에 차이가 있는 이유에 대해서는 복원 시 잘못 배치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상층 기단 갑석은 4매 판석으로 덮고, 하면에 각형 1단의 부연(副椽)이 있고, 상면에 각호형의 2단 괴임이 있다. 괴임의상면에는 각 부재를 잇는 은장홈이 배치되어 있다. 갑석 동쪽 부재는 파손되어 있는데 후대에 신재(新材)를 이어 붙였던 은장홈 2개가 별도로 새겨져 있으며, 북쪽 부재 모서리에 풍탁공(風鐸孔)의 구멍이 2개가 뚫려 있다. 상면 중앙에는 각형 2단의 굄이 있어 탑의 몸돌을 받치고 있다. 

몸돌은 1, 2, 3층 모두 모서리 기둥(우주)만 새겼는데 1층 몸돌이 큼직하고 2, 3층은 절반으로 줄어들어 적절한 체감율(遞減律)을 보인다. 

각층 지붕돌의 받침은 5단 층이 지게 새겼으며 전체적으로 두툼한 느낌이다. 추녀 밑은 수평이며, 지붕돌 네 모서리에는 풍경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남아 있다. 낙수면은 평평하고 얇으며, 널찍한 지붕돌의 추녀는 경쾌한 인상을 주고 있다.

지붕돌 윗부분에는 2단 굄을 마련하여 그 위층의 몸돌을 받고 있는데, 이것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의 한 양식이다.

3층 지붕돌 위에는 찰주원공(擦柱圓孔)이 있고, 그 위에 노반(露盤) 과 보륜(寶輪)·보주(寶珠)를 함께 조성한 원추형의돌이 놓여 있다. 

그리고 탑 앞에는 크기가 79×48.5×24㎝인 장방형의 배례석(排禮石)이 놓여 있는데, 위쪽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고 옆면에는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다. 부처님의 영원한 몸을 모신 탑에 예배할 때는 무릎을 꿇고 이 배려석에 이마를 대서 절을 한다.

선림원지 삼층석탑은 진전사지 삼층석탑과 비례가 유사하고 기단부면석의 탱주 수, 결구 방식 등에서 유사성을 보이므로 진전사지 삼층석탑을 모본으로 하여 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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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림원지 삼층석탑 (보물 제444호)

 


선림원지 석등(石燈) ⇒ 보물 제445호

석등은 높이가 2.95m이고 보물 제445호로 지정하고 있다.  1965년 조사 당시 무너진 부재가 석축 아래까지 굴러 떨어져 흩어져 있던 것을 북서쪽 끝부분에 길이 32m, 너비 15m의 석축을 쌓아 조성한 평탄지 위에 복원하였다.

일반적으로 석등은 불을 켜두는 곳인 화사석(火舍石)를 중심으로 아래에는 이를 받치기 위한 3단의 받침돌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는다. 이 석등은 신라 시대의 전형적인 8각 형식을 따르면서도 받침돌의 구성만은 매우 독특하여 눈길을 끈다.

아래 받침돌의 귀 꽃 조각은 앙증맞게 돌출되어 아름답고, 그 위로 가운데 받침돌을 기둥처럼 세운 것이 마치 서 있는 장고와 같은 모양이며 그 장식이 화려하다. 기둥의 양 끝에는 구름무늬 띠를 두르고 홀쭉한 가운데에는 두 줄의 원권문(圓圈紋)을 두르고 총 8개의 꽃송이를 조각하여 마디를 둔 후, 이 마디 위아래로 대칭되는 연꽃 조각의 띠를 둘러 모두 3개의 마디로 이루어져 있다.

화사석은 8각으로 빛이 새어 나오도록 4개의 창을 뚫었고, 각 면의 아래에는 작은 공간에 무늬를 새긴 매우 드문 모습을 취하고 있다.

지붕돌은 8각의 모서리 선이 뚜렷하며, 추녀에는 아래 받침돌에서 본 것과 같은 모양의 귀 꽃 조각이 장식되어 있다.

경사진 면은 가파르지 않고 부드러운데, 귀 꽃 조각과의 어우러짐이 자연스럽다. 꼭대기에는 연꽃이 새겨진 머리 장식의작은 받침돌만 남아 있다.

지붕돌이 일부 없어졌으나 완전하게 남아 있으며, 전체적인 양식과 장식적으로 흐른 조각 등은 통일신라시대 작품인 담양 개선사지 석등과 거의 같은 모습일 것이다. 같은 절터 내의 홍각선사탑비와 함께 신라 정강왕 원년(886)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한다.

사림사 선림원지 (寺林寺 禪林院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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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림원지 석등 (보물 제445호)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弘覺禪師塔碑) ⇒ 보물 446호

거북 모양을 한 비석의 받침돌인 귀부(龜趺)와 용이 어우러진 모양의 비석 머릿돌인 이수(螭首)만 남아 있고 비신은 파괴된 홍각선사탑비는 비문을 통해 신라 헌강왕 12년(886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통일신라시대 탑비로 1966년9월 21일 보물 제446호로 지정되어 있다. 

비석의 하단부인 귀부의 높이는 73cm,  이수의 높이는 54cm로 비신은 대부분 파괴되고 일부만 남아 국립춘천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귀부는 정사각형에 가까운 거북 형상을받치고 있는 지대석은 모서리를 곡면 처리하였으며, 귀부의육각 거북등무늬는 뚜렷하게 새겨져 있고 정수리 부분에 흠이 있어 용의 뿔을 장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거북의 발가락은 각각 4개씩이고 꼬리는 오른쪽으로 18도 돌아 위쪽으로 향하다 약간 오른쪽으로 꺾여있다. 하부에는 파도 무늬가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다.  비신 받침에는 안상(眼狀, 눈처럼 생긴 모양)을 앞면에는 2개, 뒷면에는 3개, 좌우 측면에는 1개씩 배치하였고 아래에는 구름무늬를 위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다. 

탑신부는 원래 없었으나 2008년에 그동안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비신을 복원하였다. 가장 많은 비문을 탁본한『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를 기본으로 하여 규장각, 장서각, 국립중앙박물관 등의 탁본 자료와『금석청완(金石淸玩)』등의 비첩자료를 참고하였으며, 전체 비문은 雲澈(운철) 스님이 왕희지의 글씨를 모아 새겼다 하는데, 1,340자 정도로 추정되는 비문 중 현재까지 약 710자를 확인하여 비문에 복원하였다고 한다.  발굴된 비편의 연구를 통해 추정한 비문에 따라서 가로 32행, 세로 48자, 글씨는 2cm 정도의 행서로 비문울 음각하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비명(碑銘), 비문 찬술(撰述), 관련자, 홍각선사의 생애, 선사 사후(死後) 비석 건립 경위, 관련 인물, 건비(建碑) 시기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석의 크기는 너비 94.5㎝, 높이 173.5㎝, 두께 19㎝이다. 

이수(螭首) 받침에 연 꽃무늬를 새겼으며 비(碑)의 머리 각 면에는 4마리의 용이 구름 속에 뒤엉켜 있는 역동적인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고, 이수의 전면 중앙에 사각형의 제액을 만들고 그 안에‘홍각선사비명’이라는 글씨를 새겼는데 해서에 가까운 전서체이다. 홍각선사가 880년에 입적하자 왕명에 정강왕 1년(886) ‘병오 10월 9일’에 탑비는 세우다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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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 (보물 제446호)

 


선림원지 승탑(僧塔) ⇒ 보물 제447호

남북국(통일신라)시대 승탑(보물 제447호)으로 현재 기단부만 남아 있고 높이는 1.22m이다. 억성사를 초기의 선종 사찰로 크게 중수하여 일으켜 세운 홍각선사의 승탑으로 중대석에 용무늬를 새기기 시작한 최초 승탑으로 추정한다. 

일제강점기에 도굴이 자행되어 내부의 봉안물이 도난당하였고, 파손되고 무너진 채 부재들이 사역 내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65년 11월에 각 부재를 수습하여 현재의 자리에 복원하고, 현재 보물 제447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위치는 금당지 북동쪽의 뒷산 중턱으로 현재의 위치에서 50m쯤 위의 산 중턱에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추정지에는 6.1×6.2m 규모의 작은 평탄지가 있으며, 평탄지 앞쪽에는 석축의 흔적이 있다. 

승탑의 형식은 지대석 위에 상.중.하대의 기단부를 형성하고 그 위에 탑의 몸돌[탑신석(塔身石)]과 지붕돌[옥개석(屋蓋石)] 상륜부를 올려 놓았던 것이지만 기단부만 남아 있던 것을 2016년 옥개석이 발굴되어 탑신석만 없는 상태이다. 

승탑을 아래에서부터 살펴보면, 사각의 지대석은 땅 위로 노출되는 부 분만 다듬고 그 밑은 거칠게 다듬은 자연석 그대로 두었으며, 크기는 152.5×152.5㎝이다. 

하대석 하단의 팔각형 굄돌은 지대석과 하나의 돌로 조성한 2매의 부재가 결합 되어 있고, 높이 16㎝, 너비 121㎝이며 한 면의 너비는 50㎝이다. 

중대석은 높직하고 둥글게 생긴 기둥형으로 표면에는 용이 구름 위를 날아오르는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거의원각에 가까울 정도로 깊게 양각한 강한 용머리와 부리부리한 눈, 큼직한 입과 코, 유려한 수염이 생동감을 더해 주고 있다. 전신을 감싸고 있는 비늘은 생동적인 용머리와 어울리고 꿈틀거리는 몸 주위에는 굵게 조각한 구름 문양이 조화를 이루어 금방이라도 승천할 것 같다. 현존하는 기단부의 모습으로 볼 때 남아 있지 않은 탑의 몸돌과 상륜부가 얼마나 화려했을까를 추측해 볼 수 있다. 만일 원형을 갖추고 있다면 보물 중의 보물임이 틀림없다.

2016년 한빛문화재연구원에서 조사할 때 승탑 원형 추정에 중요한 단서가 되는 승탑 옥개석을 발굴하여 현재 양양 오산리선사유적박물관에 임시 보관 중이다. 옥개석은 팔각이며 높이 26㎝, 너비 95㎝이다. 옥개석의 낙수면은 석등 옥개석에 비해 평범한 형태이며 굴곡이 다소 완경사를 이루고 있다. 옥개석의 각 모서리에는 귀 꽃이 장식되어 있는데, 각 귀 꽃마다 중앙에 가릉빈가 (迦陵頻伽, 사람의 머리에 새의 몸을 한 상상의 새)를 새기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옥개석 하면에는 팔각 3단 받침이 있고, 상면에는 각호 각형 3단의 괴임이 있다. 상면 중앙은 다소 거칠게 다듬어져 있다.  팔각의 옥개석을 근거로 탑신석 역시 팔각인 팔각원당형 승탑이었을 것으로 판단되며, 홍각선사탑비와 함께 조성되었을 가능성에 따라서 제작 시기는 886년 무렵으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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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림원지 승탑 (보물 제447호) 사진 우측하단에 2016년 발굴 당시 출토된 승탑 옥개석.

 

 

선림원지 출토(出土) 신라범종(新羅梵鐘)

804년, 신라 애장왕 5년에 제작된 선림원지 동종은 이후 1948년 10월 강릉군 신서면 미천리, 지금의 양양군 서면 황이리 선림원지에서 숯 굽는 화부(火夫)들에 의해 동종이 발견되었다. 

땅속에서 처음 발견되었을 당시는 온전한 모습으로 출토되어 오대산 월정사에 보내졌다. 1950년 월정사 칠불보전 앞에 매달아 사진 촬영을 비롯한 탁본, 실측 조사 등이 이뤄졌다. 

이 동종은 총 높이 122㎝, 종 높이 96㎝, 입지름 68㎝ 크기로 출토 당시 철제 현가(懸架)가 그대로 붙어 있었다. 당시는 소형의 동종은 현가(懸架)를 설치하여 매달기도 하였다.

동종의 내부의 명문(銘文) 중에는 이두(吏讀), 인명(人名), 관직(官職), 지명(地名) 등의 기록(記錄)이 있어 신라 말기(末期)의 귀중(貴重)한 자료(資料)이다. 그리고 주종(鑄鐘) 연대와 승려, 시주자 등 주성(鑄成)에 관계한 인물들을 알려 주는 매우 귀중한 종이다.  출토될 때 종을 거는 철제현삭(鐵製懸索)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은 선림원지 종뿐이어서, 귀중한 국보급 범종이었다.

그런데, 한국전쟁 당시 월정사 칠불보전(七佛寶殿)이 전소되면서 함께 불에 타 파종(破鐘)되었다. 조성 내력과 연대를 새긴 이 종은 통일신라 범종 중 8세기 후반과 9세기를 잇는 중요한 역사 자료로 화려한 문양과 완벽한 주조기법을 자랑한다. 

선림원지 종은 오대산 상원사동종, 성덕대왕 신종과 더불어 통일신라시대의 가장 빼어난 유물 중 하나이다. 이 종은 현재 춘천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복원된 종과 함께 전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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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좌측 : 1949년 출토지인 선림원지에서 월정사로 옮겨진 당시의 동종모습.

사진 중앙과 우측 : 6·25 한국전쟁당시 훼손된 동종 외부와 내부 명문 모습.

 


▶ 범종의 명문(銘文)으로 본 역사

“貞元卄年甲申三月卄三日當寺鐘成內之 / 古尸山郡仁近大 紫草里施賜乎古鐘 / 金二百八十廷當寺古鐘金二百卄廷此以 / 本爲內十方旦越勸爲成內在之 / 願旨是者法界有情皆佛道中到內去誓內/ 時寺聞賜主信寅夫人君 上坐 令妙寺 日照和上 /時司 元恩師○ / 鐘成在伯士 當寺 覺智○ /上和上 順應和上 / 良惠師 / 平法師 / 善覺師 / 如住○師 / 牛誓師 / 宜司

○覺師 / 節唯乃 同說師


정원이십년갑신삼월이십삼일당사종성내지 / 고시산군인근대 자초리시사호고종 / 금이백팔십정당사고종금이백이십정차이 / 본위내십방단월권위성내재지 / 원지시자법계유정개불도중도내거서내/ 시사문사주신인부인군 상좌 영묘사 일조화상 / 시사 원은사○ / 종성재백사 당사 각지○ / 상화상 순응화상 / 양혜사 / 평법사 / 선각사 / 여주○사 / 우서사 / 의사○각사 / 절유내 동설사


정원 20년 애장왕(哀莊王) 5년인 갑신(804) 3월 23일에 당사의 종이 이루어지다. 고시산군의 대마말의 직분을 가진 인근과 자초리가 시납하신 옛종의 쇠 280정과 당사의 옛 종의 쇠 220정, 이것으로 밑천을 삼고 십방의 단월(시주자) 들이 노력하여 이루고자 하였다. 법계의 유정이 모두 다 불도에 도달하기를 서원한 때에 절에서 듣고 하사하신 분은 신인부인이다.

상좌는 영묘사의 일조화상, 당시 감독은 원은스님, 종을 만든 박사는 당사의 각지스님, 상화상( 우두머리 스님)은 순응화상, 양혜스님, 평법스님, 선각스님, 여주○스님, 우서스님, 의사(업무총괄) ○각스님, 당시의 유나[維那:재의(齋儀)를 지휘]는 동설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