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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사 선림원지(寺林寺 禪林院址) - (5)고승(高僧) 대덕(大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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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93회 작성일 2024-02-16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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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승(高僧) 대덕(大德)


● 순응화상(順應和尙)

출생과 입적은 미상이다. 766년 당나라에 유학한 학승이며 802년 해인사(海印寺)의 창건주이다. 순응은 부석사의 의상을 계승하여 부석적손(浮石嫡孫)으로 일컬어진 신림(神琳)의 제자이다. 의상-상원-신림으로 이어지는 의상의 4세손에 해당한다. 따라서 낙산사와 부석사를 창건한 신라 화엄종(華嚴宗)의 초조(初祖) 의상(義湘)을 계승한 화엄종 승려이다. 

중국에서 돌아와 해인사를 창건하는데, 그 과정은 전하는 기록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해인사의 창건을 기록한 최치원의“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新羅伽倻山海印寺善安住院壁記)”에는 순응 스님이 유학에서 돌아온 뒤 애장왕의 할머니인 성목태후(聖穆太后)의 도움으로 해인사를 창건하던 중 순응이 갑자기 입적하자, 그 뒤를 이어 이정선백(利貞禪伯)이 공사를 완성한 것으로 기록하고있다. 또「순응화상찬」에는 그를 선재동자(善財童子)에 비유하여 높이 평가하였으며, 중국에 유학하여 진리를 체득(體得)하고 귀국하여 화엄(華嚴)과 선(禪)을 익혀 선교일치(禪敎一致)의 사상을 지녔으며 해인사를 창건한 사실을 찬미(讚美)하고 있다. 당나라 유학 시절 화엄학을 토대로 선종을 익혀 선교 융합적인 사상를 취한 순응법사는 해인사 건립 불사가 끝나기 전 억성사로 주석처(主席處)을 옮기고, 804년 3월 억성사(億聖寺)의 종(鐘) 조성에 참여한다. 이는 억성사 종의 명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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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응화상 진영(출처:해인사 성보박물관)

 


● 염거화상(廉居和尙)

염거(廉居,~844년)는 신라 후기의 선승(禪僧)이다. 염거(廉巨)라고도 하며, 가지산파(迦智山派)의 2대 조사(祖師)이다. 도의(道義,~825년)의 제자로서, 도의가진전사(陳田寺)에서 입적할 때 의발(衣鉢)을 전수했다.

주로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에 머무르면서 선법을 펴는 데 힘썼고, 사교(邪敎)를 배척하였다. 항상 일심(一心)을 닦고 밝혀서 삼계(三界)의 고통에서 벗어나야 함을 강조하였다. 선(禪)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었던 시대에 오직 일념무주(一念

無住)만을 의지하고 지내다가, 체징(體澄)에게 법맥을 전하여 가지산파의 기반을 마련한 뒤 입적하였다.

승탑은 원래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흥법사지(興法寺址)에 있었다가, 국보 제104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으며, 이전에 발견된 지판(誌版)도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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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거화상 진영(장흥 보림사 조사전)

 


● 체징(體澄, 804~880년) 

체징[804년(애장왕 5)~880년(헌강왕 6)]은 신라 구산선문 중 가지산파의 제3조인 선승(禪僧)으로 유학승이다. 성은 김씨(金氏), 웅진(熊津, 현재 충청남도 공주시) 출신이며, 시호는 보조선사(普照禪 師), 탑호(塔號)는 창성(彰聖)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화산(花山) 권법사(勸法師) 밑에서 불경을 공부하였으며, 827 년(흥덕왕 2)  가량협산(加良峽山)  보원사(普願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그 뒤 설산(雪山) 억성사(億聖寺)에 있는 염거(廉居)의 밑에서 일심으로 정진하여 법인(法印)을 받았다. 837년(희강왕 2) 정육(貞育)·허회(虛懷) 등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가 전국의 선지식(善知識)을 만났으나, 멀리서 구할 필요가 없음을 느끼고 840년(문성왕 1) 귀국하였다. 

이후 많은 승속(僧俗)에게 선(禪)을 가르쳤으며, 무주(武州 : 光州)의 황학난야 (黃壑蘭若)에 머무르자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859년(헌안왕 3) 왕이 궁중으로 청하였으나 병을 핑계로 사양하였고, 그해 겨울에 다시 청하자 가지산 보림사(寶林寺)로 옮겼다.

860년 김언경(金彦卿 : 병부시랑)이 제자의 예를 취하고 사재(私財)를 희사하자 비로자나불을 주조하여 안치하였다.

861년(경문왕 1)에는 보림사(寶林寺)를 증축하여 많은 제자를 가르쳤다. 880년 문인들에게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제자로는 8백여명이 있었다 한다.

김영(金潁)이 지은 탑비(塔碑)가 보물 제158호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로 지정되어 전라남도 장흥군 보림사 터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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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선사 체징 진영(장흥 보림사 조사전)

 


● 홍각선사(弘覺禪師, 814~880년)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弘覺禪師塔碑)의 비신(碑身)이 파손되어, 주인공인 홍각선사(弘覺禪師)에 대해서는 자세히 전하지 않는다.  17세기 중엽 당시 남아 있던 비 편 일부를 탁본한 것이 『금석청완(金石淸玩)』과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수록되었다.

선사의 속성은 김(金),  이름은이관(利觀)이요,  자는 유자(有者) 이며, 814년 당시 신라의 도읍인 경주에서 출생하였다.

출가 이전에 이미 경서(經書)와 사서(史書)에 통달하여 한번 본 것은 잊어버리지 않았다.  상당한 학문적 소양과 불교적 상식을 갖추고 있었다. 

830년 17세에 출가한 그는 해인사(海印寺)로 가서 선지식(善知識)을 찾았으며, 그 후 여러 선림(禪林: 선종의 사찰)과 영악(靈嶽: 신령스러운 산)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영암사(靈巖寺)에서 몇 달 동안 선정(禪定)을 닦았다. 그가 출가 후 해인사로간 것은 선종(禪宗)의 고승도 출가 전에는 유학 경전을 배우고, 출가 후에는 화엄종(華嚴宗)에서 기초를 익히며, 선종으로 대성하는 것이 당시의 보편적인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원감대사 현욱(圓鑑大師 玄昱, 787~868년)이 중국으로부터 돌아와 혜목산[惠目山: 지금의 여주 고달사지(驪州 高達寺址)]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는데, 비문이 마멸되어 그 내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문맥으로 보아 홍각선사가 구산선문 중 봉림산파의 개산조인 현욱을 찾아가 수학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홍각선사가 60세 무렵인 873년경 다시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에 주석했다고 기록하여(원문: 咸通末復往於雪山億聖), 873년 이전의 어느 때 홍각선사가 억성사에 머무른 적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840년을 전후한 시기에 억성사에는 염거화상(廉巨和尙)이 주석하고 있었으므로, 홍각선사는 염거화상의 만년에 억성사에서 그로부터 법문을 들었을 것이다. 이후 다시 억성사로 돌아온 홍각선사는 대대적인 중창을 통해 이 절을 크게 일으켰다. 홍각선사가 억성사에 주석할 당시 그의 명성이 임금에게까지 들려 그의 덕음(德音)을 흠모하던 왕의 요청에 신라 서울인 경주에 가서 궐내에서 왕에게 법문을 강설한 후 열흘을 채 머무르지 않고 되돌아오기도 하였다.

홍각선사는 880년 10월 아침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불법에 힘쓰라는 유언을 남기고 입적하였다. 신라 헌강왕 12년(886) 에 선림원에 탑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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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암전서의 신라홍각선사비(자료:규장각한국학연구원)